경북 문경에는 잘 생긴 산이 많다. 새재 한복판 주흘산이 유명하지만 그 앞 운달산도 높이나 바위투성이 근육질 몸매가 주흘산 못지않다. 명장 천한봉(千漢鳳·75)의 1600평 문경요(聞慶窯)가 거기 있다. 이 땅에서 그는 청자도 백자도 아닌 조선시대 막사발을 재현해내고 있다.
조선 백성들은 막사발을 밥 공기로 썼다. 때로 김치를 담아 먹고 때로는 막걸리잔이 됐다. 뒷산에서 캐온 흙을 빚은 뒤 헐렁한 물레로 틀을 잡아 둘레가 매끈하지 않고 삐뚤삐뚤하다. 굽도 거칠다. 필요에 따라 용도가 바뀌는, 한마디로 잡기(雜器)다.
그 막사발을 일본인들은 '고려다완(高麗茶碗)'이라 부른다. 명품 고려다완 하나 손에 넣어 차의 빛깔과 향기를 감상하고 싶은 게 소원이라는 사람도 많다. 한국의 잡기가 일본 상류층의 명기(名器)로 둔갑한 이유를 알려면 교토 대덕사라는 절에 있는 그릇의 유래로 넘어가야 한다.
그 사찰에 '기자에몬오이도(喜左衛門大井戶)', 줄여서 이도다완(井戶茶碗)이라는 고려다완이 있다. 16세기 조선에서 건너간 것으로 높이 8.8㎝다. 우리 눈에 투박해 보이는 이 막사발을 국보(國寶)로 지정하면서 일본인들은 "차의 경지가 모두 여기 모여있다"고 경탄했다.
1930년대 조선 문물을 아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도 이도다완에서 평범 속에 감춰진 아름다움을 보았다. 너무 탐닉한 나머지 임제록(臨濟錄)에 나오는 구절 하나를 이도다완에 바치기도 했다. "무사함이 귀인(貴人)이요, 단지 조작하지 말라."
발에 채이던 게 고려다완, 이도다완이었건만 일제시대를 거치며 맥이 끊겼다. 그 잃어버린 세월을 복원해낸 이가 천한봉이다. 기자는 그에게서 한 해에 일본에만 15만 달러어치씩의 도자기를 수출하면서 받은 동탑산업훈장의 빛보다 막사발보다 더 끈끈한 삶의 빛을 발견했다.
조선 백성들은 막사발을 밥 공기로 썼다. 때로 김치를 담아 먹고 때로는 막걸리잔이 됐다. 뒷산에서 캐온 흙을 빚은 뒤 헐렁한 물레로 틀을 잡아 둘레가 매끈하지 않고 삐뚤삐뚤하다. 굽도 거칠다. 필요에 따라 용도가 바뀌는, 한마디로 잡기(雜器)다.
그 막사발을 일본인들은 '고려다완(高麗茶碗)'이라 부른다. 명품 고려다완 하나 손에 넣어 차의 빛깔과 향기를 감상하고 싶은 게 소원이라는 사람도 많다. 한국의 잡기가 일본 상류층의 명기(名器)로 둔갑한 이유를 알려면 교토 대덕사라는 절에 있는 그릇의 유래로 넘어가야 한다.
그 사찰에 '기자에몬오이도(喜左衛門大井戶)', 줄여서 이도다완(井戶茶碗)이라는 고려다완이 있다. 16세기 조선에서 건너간 것으로 높이 8.8㎝다. 우리 눈에 투박해 보이는 이 막사발을 국보(國寶)로 지정하면서 일본인들은 "차의 경지가 모두 여기 모여있다"고 경탄했다.
1930년대 조선 문물을 아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도 이도다완에서 평범 속에 감춰진 아름다움을 보았다. 너무 탐닉한 나머지 임제록(臨濟錄)에 나오는 구절 하나를 이도다완에 바치기도 했다. "무사함이 귀인(貴人)이요, 단지 조작하지 말라."
발에 채이던 게 고려다완, 이도다완이었건만 일제시대를 거치며 맥이 끊겼다. 그 잃어버린 세월을 복원해낸 이가 천한봉이다. 기자는 그에게서 한 해에 일본에만 15만 달러어치씩의 도자기를 수출하면서 받은 동탑산업훈장의 빛보다 막사발보다 더 끈끈한 삶의 빛을 발견했다.
- ▲ 도자기 명장 천한봉이 가마 앞에 앉아 그릇을 쓰다듬고 있다. 그릇을 쓰다듬는 그의 손 길이 마치 자기 자식의 머리를 어루만지는 것처럼 부드럽다/천한봉 명장의 문경요 창고에는 장작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그는 도자기를 만드는 데 제일 중요한 것은 불(火)이며, 자기 가마에는 장작만을 쓴다고 했다.오종찬 기자 ocj1979@chosun.com
"제가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습니다. 종조부가 의병 천보락 장군 밑에서 좌익장(左翼將)을 지낸 바람에 왜정 때 시달렸어요. 아버지가 징용으로 끌려가 4형제 모두 거기서 났죠. 해방 직후인 1945년 11월 고향 문경으로 귀향했는데 아버지가 이듬 해 초 돌아가셨어요. 제가 가장(家長) 역할을 맡을 수 밖에 없었죠."
―왜 하필이면 도자기 공장이었습니까.
"당시 문경에만 도자기 공장이 22개나 됐어요. 1800년대 정부가 운영하던 경기도의 관요(官窯)가 폐쇄되면서 도공(陶工)들이 남쪽으로 내려오며 곳곳에 민요(民窯)를 만들었는데 그 중 한 곳이 문경이지요. 남쪽에서는 김해, 웅천, 하동, 진주가 유명하지요. 제가 아버지 친구 분 소개로 들어간 도자기 공장은 정씨라는 분이 운영하는 곳이었습니다."
―처음부터 도자기를 빚지는 않았지요.
"지게 지고 나무해오고 흙 나르는 일만 했지요. 당시 품값이 아이는 하루에 보리쌀 반 되, 어른은 쌀 한 되, 기술자는 쌀 반 가마를 줬어요. 기술자를 극진히 대접하는 거죠. 그 모습을 보고 '기술 배우면 잘 살겠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남에게 기술을 잘 안 가르쳐 주잖아요. 그 때부터 어깨너머로 배우고 밤에 혼자 도자기를 만들어봤습니다."
―그 기술을 발휘한 게 언제입니까.
"2년쯤 지났을 때 공장 기술자들이 자기들끼리만 꽁치 반찬에 하얀 쌀밥을 먹는 모습을 보고 발끈했어요. 기술자 두 분 다 70노인들이었는데 제가 한마디 했어요. '도자기 만드는 게 뭐 그리 대단한 기술이라고 유세를 하느냐. 남들에게도 쌀밥 한번 먹어보라고 하면 어떠냐'고 했지요."
―기술자들이 어안이 없었겠군요.
"한 기술자가 대뜸 '이런 건방진 놈, 그럼 네가 도자기 한번 만들어봐'라고 하더군요. 제가 대꾸했습니다. '내가 도자기 만들면 앞으로 수정꾼을 시켜달라'고요. 수정꾼은 기술자를 보조하는 일을 말합니다. 옆에서 기술 배우기 쉽겠다 싶어 도박을 건 거죠."
―어깨너머로 배우고 밤에 혼자 익힌 기술이 나올 차례군요.
"말을 그렇게 했는데 물레 앞에 서니 땀이 비 오듯 쏟아지더군요. 제가 키는 작은데 물레는 높아 앉지도 못하고 서서 물레를 돌렸지요. 그 때부터 버릇이 돼 저는 지금도 서서 물레를 돌립니다. 한참 도자기 모양을 만들고 있는데 옆에서 보던 기술자 영감이 탁 무릎을 치더니 '이 녀석은 천재라 천재' 이러는 거예요. 16살 때의 일입니다."
―기술이 일취월장(日就月將)할 때 6·25전쟁이 터졌지요.
"1951년 1월에 징집돼 충북 제천에서 1주일 훈련 받고 8사단 16연대 2대대 수색중대에 배속됐어요. 배운 거라고는 M1소총에 탄알 장전하는 법, 조준하는 법뿐이었어요. 한달 뒤 강원도 횡성까지 북진했다가 인민군 포로로 붙잡혔지요."
―고생이 심했겠네요.
"평양의 포로수용소에 수용됐는데 먹을 것도 안주고 약도 없어 죽어나가는 포로가 부지기수였어요. 한달 쯤 지나자 같이 포로로 있던 20연대 대대장이 '인민군 장비가 안 좋으니까 탈출하자. 적과 가까이 있는 사람만 죽는다고 각오하면 나머지는 도망갈 수 있다'고 하는 거예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한가지라 믿고 포로 1개 연대가 냅다 산으로 뛰었지요."
―믿기지 않는 이야기네요.
"다른 포로들과 흩어져 오는데 동서남북을 가릴 수 없었어요. 그 때 어른들이 한 말이 생각났어요. 북두칠성 꼬리가 남쪽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한달 동안을 걸어 경기도 여주까지 왔지요."
―죽을 뻔한 고비를 넘겼군요.
"웬 걸요, 정작 죽기는 미군한테 죽을 뻔 했지요. 제가 탈출하면서 어느 마을 주민에게 빌린 옷에 지게 지고 내려오는데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미군 전차부대에 포위됐어요. 뭐라고 영어를 하는데 알아들을 수도 없는데 '스톱 스톱'소리만 들려요. 그래 제 흰옷을 찢어 흔드니까 잠시 후 통역이 왔어요. 사정을 설명하고 겨우 대구의 한 초등학교에 있던 자대 헌병대로 넘겨졌지요."
―고초를 겪고도 군번이 없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우리 부대가 그 다음에는 지리산 공비 토벌에 나섰어요. 포로가 돼 탈출했는데 군번도 주지 않고 다시 공비 토벌하라니 화가 나더군요. 몰래 집으로 도망쳐왔습니다. 얼마 지나자 불안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문경경찰서 의무경찰에 지원했지요."
―의경 생활은 편했겠군요.
"의경으로 2년을 일하는데 다시 입대 영장이 나온 거예요. 다 군번이 없어 벌어진 일이지요. 문경경찰서장에게 사정을 했는데 소용없었어요. 꼼짝없이 다시 논산훈련소로 갔지요. 마산 육군 군의학교에서 근무했습니다. 하하."
군 복무를 마치고 천한봉은 다시 문경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전쟁으로 20개가 넘던 도자기 공장이 대부분 문을 닫은 상태였다. 게다가 60년대 들어 플라스틱과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 생활용품이 등장하면서 도자기 산업은 일대 위기를 맞게 됐다.
천한봉의 기술은 그 때부터 도자기를 만들기 보다 요강, 항아리, 화분을 만드는 쪽으로만 쓰였다. 운명의 여신(女神)은 이럴 때 그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다. 1973년 어느 날, 그가 큰 화분을 만드는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한 일본인이 탄식했다.
- ▲ 일본 교토 대덕사에 있는 국보 기자에몬오이도.
"사쿠라가와라는 스님이었어요. 알고 보니 그는 고고학자로 조선의 도자기 명산지를 돌아보던 중이었습니다. 그 스님이 '화분 말고 이런 걸 만들면 팔자를 고칠 텐데…'라고 중얼거리는 거예요. 그래서 뭘 만들어야 하느냐고 묻자 등에 지고 있던 바랑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보여주는 겁니다."
―무슨 책이었나요.
"다완이라는 사진이었는데 제 눈에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 제가 만들던 막사발이 분명했어요. 그게 일본의 국보인 이도다완이라는 건 나중에 알게 됐지요. 스님에게 제가 그랬어요. '그런 거라면 지금이라도 만들 자신 있습니다.'"
―그 일이 있은 지 1년 뒤 일본에 갔지요.
"이도다완에 왜 그렇게 일본인들이 열광하는지 알고 싶었어요. 교토를 비롯해 유명한 찻그릇이 있는 곳은 모두 들렀어요. 일본 도자기 공장도 다 돌아봤지요. 그리고 돌아와 이도다완을 재현하기 시작한 겁니다. 당시 새마을운동으로 경제가 좋아져 비로소 차 문화에 대한 관심이 생겨난 것도 제가 이도다완을 재현하게 된 원인이 됐습니다. 일본에서는 그때 한국에 골동품 사러 오는 게 유행이었습니다."
―왜 일본인들이 이도다완에 열광하는 겁니까.
"이도다완만큼 차 색깔을 잘 받아들이는 그릇이 없습니다. 맛도 좋지요. 화려하고 요란한 게 처음에는 눈길을 끌지만 투박해 보이는 게 사실은 더 오래가는 법입니다."
―첫 전시회부터 일본에서 성공했지요.
"사쿠라가와 스님이 많이 도와줬어요. NHK와 아사히 TV 인터뷰도 주선해주고 저를 '지금 한국에서 고려다완을 만드는 유일한 도공'이라고 소개해준 거예요. 그 뒤 제 전시회가 일본에서 개최될 때마다 유명인들이 많이 왔지요. 일본 황실에서 꽃병을 20개 주문하기도 했고요."
―인연이라는 게 무섭군요.
"어느 때는 한 중년의 일본 부인이 저를 찾아왔어요. 왜정 때 문경군수를 지낸 할아버지 묘를 찾아온 손녀였어요. 제가 일본말을 하니까 찾아왔대요. 문경에 권 약국이라는 곳이 할아버지의 거처였어요. 그 부인이 안방 한 구석에 꽃을 꽂아놓고 하염없이 울더군요. 그 후 한참이 지나서 제가 일본 도쿄에서 전시회를 하는데 예전의 부인이 찾아와 2만엔을 내밀더군요. 집안 사정이 넉넉한 것 같지도 않았는데…. 세상은 그런 겁니다."
―선생이 만든 막사발이 일본에서 76만엔(한화 800만원)에 팔린다지요. 제 눈에는 청자나 백자보다 못한 것 같은데.
"청자, 백자와 달리 이도다완은 산화(酸化)의 원리로 만드는 겁니다. 산화는 불로 변화를 일으켜 색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그걸 요변(窯變)이라고 부르는데요, 이도다완 같은 요변 도자기는 1000점을 구워도 색이 같은 게 한 가지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변 도자기를 가진 사람들은 자기만의 작품을 갖게 되는 것이죠. 바로 옆에 놓여도 불의 영향이 다 다르니까요."
―기술보다 불에 의해 만들어지는 도자기라면 명품이 나올 확률이 높지 않겠군요.
"이도다완은 1000점을 구우면 제 마음에 드는 게 5%밖에 안나와요. 이도다완은 가마에 놓는 위치도 다른 자기와 달라요. 가마 양쪽 벽 밑이 산화가 가장 잘되는 곳이거든요."
―장작이 창고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 지금은 왜 가마에 불이 없죠?
"가마는 1년에 5번 정도만 불을 붙입니다. 열심히 도자기를 만들어놓았다가 한번에 다 굽는 거예요. 제가 보통 새벽 3시에 일어나 전날 반죽해 놓은 흙으로 작품 만들고 굽 갈아붙이고 건조하는 일을 해요. 가마에 불을 때는 것도 초벌구이하고 유약 바르고 다시 재벌 하니 쉴 틈이 없지요."
―도자기를 만드는 과정이 흙을 빚고 형태 만들고 그림 그리고 유약 바르고 굽는 것으로 나뉘어져 있죠. 어느 과정이 가장 중요한 겁니까.
"도공이 그 모든 걸 혼자 할 수는 없지요. 제 경험에는 불 때는 게 제일 어렵고 중요합니다. 옛날에도 불 때는 사람을 최고 기술자로 쳤지요. 덮어놓고 장작만 넣는 게 불 때는 게 아닙니다."
지금도 매년 수십만 달러어치의 자기를 해외에 수출하고 있는 이 노(老)산업역군은 몇 년 전부터 심장을 비롯해 몸 여기저기에 이상이 와 고생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5명의 딸 가운데 천명숙(47)과 천경희(37)가 가업을 잇도록 했고 제자도 40명 넘게 배출했다. 지금은 문경대에 명예교수로 출강해 젊은이들에게 도자기를 가르치고 있다.
그는 자기 경험과 유럽과 중국, 일본을 방문해 목격한 그 나라들의 도자기 산업 수준을 알려주면서 "앞으로 자기산업은 더 발전할 수밖에 없다"고 역설한다고 했다. 자기산업이 결국 세라믹산업이며 그 중요성은 과학이 발전할수록 더 커질 수밖에 없다는 믿음에서다.
―고려청자, 조선백자가 유명했지만 지금 우리 도자기산업은 일본이나 중국보다 뒤처져있지요.
"현대자기는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건 기계설비 때문이지요. 일본에 가면 길이가 36m에서 50m인 가마가 있어요. 그 안에 레일이 깔려있고 컴퓨터로 작동됩니다. 기계가 흙을 반죽하고 형태를 만들고 유약을 바르고 건조하고 굽지요. 전 자동입니다. 그런 분야는 우리가 당할 수 없지요."
―그 이야기는 전통자기는 그렇지 않다는 뜻인가요.
"그렇습니다. 도예 명장이 저를 포함해 모두 7명이 있고 세라믹 명장이 5명인데 모두가 작품세계가 달라요. 저는 우리 전통자기가 세계최고 수준이라고 봅니다. 일본에도 심수관, 이참평씨 후손이 대(代)를 잇고 있지만 현대자기에 비할 수는 없지요."
―전통자기라면 중국도 있지 않습니까.
"중국이 도자기의 원조이긴 하지요. 그렇지만 그 나라도 현대자기로 다 옮겨갔어요. 규모는 어마어마하지만요. 유럽 쪽에서는 독일의 전통자기가 꽤 높은 수준인데 독일은 주로 토기(土器)에 치중해있지요."
―우리 전통자기가 세계최고라는 것은 우리 땅과도 연관이 있지 않겠습니까.
"연관이 있다마다요. 우선 흙이 좋지요. 저도 문경 땅에서 나는 흙에 고령토를 30%쯤 섞어 씁니다만 다른 나라 흙은 낮은 온도에 금세 녹아버리지만 고령토는 1300도에도 녹지 않습니다. 1300도는 불순물이 완전히 사라지는 온도입니다. 고령토뿐 아니라 경남 하동에 가도 최상급 흙이 널려있지요. 제 집 앞에 저 구멍이 보이지요? 지하 150m 아래에서 끌어다 쓰는 지하수입니다. 물 맛 한번 보실래요? 최고의 물이지요. 땔감은 또 어떻습니까. 우리 땅에는 없는 게 없지요."
―저 같은 사람이 도자기를 익히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한 7~8년은 해야 합니다."
명인과의 대화가 어느덧 2시간을 넘어섰다. 사진촬영을 위해 이런 저런 주문을 해도 낯빛 한번 변치 않는 그는 보면 볼수록 막사발이라 불리는 이도다완과 생김새가 비슷했다. 자그마한 키에 해맑은 웃음, 자기가 만들어낸 자기를 손주 쓰다듬듯이 매만지는 다정한 손길….
기자의 눈에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한국인의 정신, 질박(質朴)이 형상화된 모습처럼 보였다. 가마 앞에서, 운달산을 등에 지고, 나무 틀 앞으로 자리를 바꿔 설 때마다 명인은 배경과 함께 녹아 들고 있었다. 한국의 잡기가 왜 일본의 최고 명기가 됐는지를 기자가 깨닫는 순간이었다.
'좋은글 중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편의 편지 (0) | 2008.10.17 |
---|---|
술 = 좋은 음식 (0) | 2008.09.08 |
일본인이 잘사는 이유 (0) | 2008.08.20 |
읽어도 읽어도 좋은글에서 (0) | 2008.08.13 |
品位있는 老人의 12道 (0) | 2008.08.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