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사진

안동교구성체대회 (1989,5,7)

깊은산속 2017. 8. 29. 21:12

한국 천주교회에 있어 1989년은 역사적인 해였다. 1989년 10월 4일부터 8일까지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라는 주제로 제44차 세계 성체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천주교 200주년 기념 성체대회를 앞두고 안동교구는 (드봉 주교님) 1989년 5월 7일 문경 공설운동장에서 안동교구와 인근교구 성직자와 신자 20,0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안동교구자체 성체 대회가 다체롭게 개최 되었는데 입양아에 대한 관심과 사례 발표도 있었다


대회를 앞두고 안동교구 드봉주교님께서 방문하여 실정을 확인 하시고 위로 격려 하였습니다.

미혼모에 의한 출생아 문제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고 정부가 개입하게 되었다.



윤** (율리아)

미혼모에서 갓 태어나 머리에 물도 체 마르지 않은 갓난 애기를 키우기 시작 한것은 1986년 10월 부터였습니다. 홀트아동복지회 점촌 소장과의 친척관계로 애기를 돌보는 일에 관심을 갖게된 것이 엊그제께 같은데 벌써 2년 7개월에 154명의 애기들이 저의 손을 거쳐 나간 것입니다.

여학생에서부터 철없는 공장 아가씨, 시부모로부터 딸만 낳는다고 구박 당한 죄없는 며느리, 한 순간의 빛좋은 감정으로 맺어진 부부가 헤어짐으로 위탁할곳 없는 아기부터 7~8세된 어린 남매에 이르기까지 친모의 따뜻한 사랑과 손끝에서 멀어져야만 하는 불쌍한 애기들이 우리 주위에는 너무나 많은것 같습니다.

저는 복지회로부터 애기들을 받아 돌보는 위탁모입니다.

저의 가정은 첫 단계이기 때문에 받아온 애기는 15일 이내에 국내 입양이 되거나 해외 입양을 위해 서울 사무소에 인계 합니다.

무엇보다 철이든 아이와는 짧은 보살핌 이였지만 그동안 정이 들어 서울에 인계하고 돌아올때 “엄마 엄마” 하며 떨어지지 않으려고 매달리는 애기들을 남겨두고 돌아서야 하는 때에는 코끝이 시큰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 질때가 한두번이 아니 였습니다.

이른 새벽 갓난 애기를 업고 서울행 버스를 탈때는 죄없이 불행한 애기들에게 행복한 앞날이 있기를 비는 묵주기도로 성모님께 청합니다.

저의 집에 오는 애기들은 건강하고 총명한 애기, 코밑에 입술이 찢어진 언청이 한쪽 귀가 없거나 두귀가 전부 없는 장애아, 인큐베이트에서 1개월 정도 입원했든 애기도 있으며 머리와 등 종아리에 타박상이 심한 큰 아이들도 있습니다. 내 자녀들이 어린시절 울거나 칭얼대면 밤잠 설친다고 짜증부리든 남편이 사방에서 주워온 애기들이 밤중에 울어 댈때의 불만이 오죽이나 했겠습니까.

저는 무엇보다 갓난 애기들이 쌍나발로 울기 시작하면 옆에서 잠자는 남편에게 미안 했습니다.

위탁된 어린 애기들이라 우유도 시간 맞추어 먹여야 하고 귀저귀도 수시로 갈아줘야 하며 목욕도 시켜 잠이 잘 오도록 시원하게 마련해 주어야 했습니다.


임** (다니엘)

아내가 원해서 버림받은 애기들을 키워 보겠다기에 나와는 직접 상관되는일이 아니라고 생각되어 쉽게 승낙을 했습니다.

처음엔 저에게 미안했든지 갓난 애기들을 집 아이들방에 눕혀 놓았습니다. 결과는 불편함이 말로 다 할수 없습니다. 직장에서 근무하고 집안에 들어서면 몸과 마음이 피곤 할때가 많았습니다. 가끔 언제 왔는지 하나밖에 없든 애기가 3-4명으로 불어나 아랫목을 나란히 차지하고 있고 나는 꾸석 빈자리를 찾아 잠을 자려고 하면 그때부터 3-4명의 애기들은 교대로 밤새 울기도 합니다.

밤 1시 새벽3시가 따로 없습니다. 사무실에 출근하면 왜 그리 졸음이 찾아 오는지 참기 어려울때가 많았습니다. 내일도 정상 출근하여 근무를 해야 하는데 짜증이 날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살며시 일어나 우유먹이고 귀저귀 갈아주며 우는 애기 다독이는 아내를 보면 위로의 마음으로 밤을 보내기도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아내는 밤샘을 한것이 분명하지만 피곤한 모습은 보이질 않습니다. 나는 머리도 딩하고 밥맛도 없고 짜증스러움이 밖으로 나오려 합니다. 사정이야 어떻튼 지금부터 남의 애기 돌보는 일을 그만 두도록 말 하였드니 아내는 몇일후 이웃가정에 아기들를 인계 시켰습니다.

그런데 5가정에서 3일에서 5일이 지났을 무렵 애기들을 더 이상 돌 볼수 없다는 것입니다. 애기들을 더 이상 돌보지 않겠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맡길수도 없었습니다. 아내는 나에게 건너방에 가서 편안히 자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는 애기 달래느라 잠못자는 아내를 생각하니 차라리 아내와 함께 애기들을 돌보는 것이 부부의 도리라 생각 되었습니다. 처음엔 내키지 않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버려진 애기들이 불상하고 가엽게 생각되어 봉사 하자고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버스를 타면 멀미를 잘 하는 아내는 애기들 인계하려 수시로 서울 본사에 다녀와야 합니다. 그래도 아내는 불평이나 원망 한마디 없이 제일먼져 저의 안부 부터 물어 봅니다.

나의 속 쫍은 뒷모습을 보여 주는 것 같았습니다.


임** (글라라)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집에 들어서면 어머니는 나에게 애기들을 돌보라 합니다. 귀찮은 생각에 초등학교 4학년 막내 여동생에게 제게 하라는 일을 시키기도 했습니다. 불쌍한 사람을 돌보라는 신부님말씀을 생각하니 내가 해야할 일을 하지 않고 어린 내 동생에게 미룬다는것이 부끄럽게 생각 되었습니다.

저보다도 더 애기들을 귀여워 해주고 뽀뽀도 하며 안아주고 보살펴주는 어린 내 동생의 모습이 무척이나 선하고 착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바쁘실때면 이젠 스스로 불쌍한 애기들을 보살피며 동생과 함께 놀아 주기도 하였습니다.

소란스럽게 울든 여러 애기들이 순간에 서울로 모두 떠나고 나면 나의 마음은 텅 빈것 같았습니다.

귀엽고 예쁜 애기들이 앞으로는 건강하고 훌륭한 일꾼이 되기를 하느님께 기도 드렸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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