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저는 충남대학교 철학과에 출강하는 철학박사 임병학(42세)입니다. 저의 본관은 예천임씨로 서하할아버지 23세손입니다.
제가 동양철학을 공부하기 때문에 서하 할아버지의 철학사상에 대한 논문을 연세대학교 {인문학연구}에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인터넷에서 뵙고 무작성 보내드리고 싶었습니다.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시고, 살펴봐주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럼 이만 줄입니다.
임병학 올림
서하 西河임춘 林椿의 철학사상
임병학 (충남대학교)
Ⅰ. 시작하는 말
우리나라 최초의 가전체 소설인 ?국순전(麴醇傳)?을 지은 서하(西河) 임
춘(林椿)은 1148년에 출생하여 1186년에 사망한 고려중기의 학자로 향년
39세의1) 짧은 생을 살았지만, 그의 친구인 이인로(李仁老)가 편집하고 무
신집권기의 최고 집정자인 최우(崔瑀)가 1222년에 간행한 ?서하선생집(西
河先生集)?(이후 ?西河集?으로 불림)이 지금까지 전해져 국문학이나 한문
학은 물론 역사학에서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서하는 어려서 영특하여 6·7세부터 백가서를 두루 읽고 경서(經書)에 통
달하여 깨우침이 깊고 정밀하였으며2), 백부 임종비(林宗庇)에게서 학문을
얻었다.3) 그의 가계를 살펴보면, 왕건(王建)이 고려를 건국할 때 선조는
1) 서하 임춘의 생애는 ?高麗史? 列傳과 이인로가 지은 「祭林先生文」(“靑春三十. 白衣永
沒.”)에 근거를 두고 다양한 주장이 있으나, 그의 생애에 대한 대표적 연구인 여운필의 「임춘의 생애에 대한 재검토」(?한국한시연구?, 제4집, 한국한시학회, 1996.)에서 39세로
논증하고 있다. 후손인 임영인은 ?서하임춘 선생 년보?에서 1150년에 출생하여 1196년
에 사망하여 향년 47세로 기록하고 있다.
2) 林椿, ?西河集?(이하 ?西河集?), 「高麗西河林公行狀」, “公幼而英潁. 六七世遍讀百家. 悟
祥精深.”
3) ?西河集?, 「序」, “其學實得之家. 叔學士宗庇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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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지노(汗馬之勞)의 공로가 있어 토지를 받은 적이 있었고, 증조 임언(林
彦)은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 예종(睿宗)때 여진족을 토벌하였으며,4) 조부
임중간(林仲幹)은 정이품 평장사(平章事)로 시호는 충경(忠敬)이며, 아버지
광비(光庇)는 상서(尙書)로 백부 한림학사 종비·숙부 민비(民庇)와 함께 이
름을 날린 한림학사들이었다.5) 이를 ?서하집?에서는 “우리 집안의 백부와
선친은 모두 뛰어난 글로 벽지까지 울렸고, 연달아 높은 과거에 합격하여
한 시대를 독보(獨步)하니 천지의 붕새는 물을 치며 남으로 나네.”6)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서하는 고려 건국 공신의 후예로 문신귀족 출신임에도 불구하
고,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정중부의 난을 겪으면서 목숨을 건지기 위
해 서울 개경을 떠나 피란을 다니고, 당시를 떨쳐 울렸던 그의 문명(文名)
에도 불구하고 세 번이나 과거에 실패하는 등 불우하게 생을 마감하였으
며, 후대의 평가에 있어서도 당시의 이인로나 이규보(李奎報)에 비해서 어
느 정도 절하되어 왔다.7)
?서하집?에 서문을 쓴 미수(眉叟) 이인로는 “대저 글 잘하는 무리가 시
를 잘하면 문장을 잘하지 못하여 서로 득실이 있었는데, 그 아름다움을
겸해서 얻기란 드문 일이다. 그러나 선생의 문장은 고문의 진수를 얻었고,
시는 이소(離騒)와 시아(詩雅)의 풍골을 얻었으니 해동에서 포의(布衣)로서
세상에 제일가는 자는 이 한 사람뿐이다.”8)라고 하여, 고문의 진수를 얻
4) ?高麗史節要?, 제7권, 「숙종 명효대왕 2(肅宗明孝大王二)」와 ?동문선?, 제44권, 「여진을
쳐서 그 땅을 빼앗아 성을 쌓고 못을 마련하고 실입정호를 마치고 공을 드린 표(伐女
眞取地築設城池實入丁戶訖獻功表)」 등에 기록되어 있다.
5) 徐居正, ?東文選?, 제19권, 칠언절구, 임종비가 지은 「아우가 새로 한림이 된 것을 기
뻐하며(喜舍弟新除翰林)」에서 “형제가 연달아 옥당의 봄을 누린 이, 손꼽아 지금까지
몇 사람인고. 상상컨대 화전(花甎)을 지날 적마다, 온 조정이 응당 임금 은혜 새로움을
부러워하리.(雁行聯拜玉堂春. 屈指于今有幾人. 想得入花甎上過. 傾朝應羨寵光新.)”라고
하여, 이러한 사실을 밝히고 있다.
6) ?西河集?, 권2, 「次韻李相國知命 見贈長句二首」, “吾家伯父與先子. 共振雄文隱地轟. 連
中高科時獨步. 圖南水擊天池鵬”
7) 강석중, 「임춘론」, ?한국한시작가연구?, 제1집, 한국한시학회, 1995, p. 93.
서하(西河) 임춘(林椿)의 철학사상 131
었다고 하였으며, 또 한국문집총관에서도 그에 대한 평가와 ?서하집?의
인용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9)
한국철학에서 유일하게 「고려해동칠현의 사상-임춘을 중심으로」를 연구
한 유명종 교수는 “(임춘은) 스스로 세속이나 형식에 구속되지 않으려는
자유인 그것이다. 일체의 세속적 권위에 도전하여 사회적 환경을 개혁하
려는 낭만적 문인의 생명·충동·의지가 노출된 기골은 난세에 나타난 천재
적(天才的) 영기(靈氣) 그것이었고, 천재들은 사회적 모순이 빚어낸 갈등
속에서 한을 품고 희생된 별들의 하나인데.”10)라고 평가하였으며, 이외에
윤사순의 「12세기경, 고려의 성리학 형성」(?동양철학?, 제32집, 2009.), 최
영성의 「고려중기 북송성리학의 수용과 그 양상-북송성리학의 전래시기와
관련하여-」(?대동문화연구?, 제31집, 1996.) 등에서 ?서하집?을 인용하면서
8) ?西河集?, 序, “大抵秉筆之徒. 工於詩則短於爲文. 互有得失. 右擅其美. 罕有兼得之. 先生
文得古文. 詩有騷雅之風骨. 自海而東. 以布衣雄世者一人而已.”
9) ?지봉유설? 中에서는 “文才는 한 시대의 으뜸이었다.(文才爲一時巨擘)”라고 하였고, ?
동사강목? 제10화에서는 강좌칠현(江左七賢)을 소개하면서, “임춘의 자는 기지(耆之)이
며 서하인(西河人)으로 서하(西河)는 지금의 예천(醴泉)인데 문장으로 세상에 날렸다.
······ 해동에 포의(布衣)로 시문에 뛰어난 이는 이 한 사람뿐이다.”라고 소개하고 있으
며, ?연려실기술? 별집 제14권 문예전고(文藝典故) 문장과 ?용재총화? 제1권에서는
江左七賢에 대하여 “李奎報는 눌러 다졌으나 거두지는 못하였고, 李仁老는 단련하였으
나 펴지는 못하였으며, 林椿은 면밀하였으나 윤택하지는 못하였고,”라고 평하고 있다.
또한 한국문집총관에 나타난 西河의 행적을 간략히 서술해보면, 먼저 ?목은시고? 제23
권, ?목은집? 부록, 서 목은시정선(牧隱詩精選) 서문, ?미수기언? 기언별집(記言別集)
제9권, 괘암(卦巖)의 제명기(題名記)와 기언별집 제15권 기행 무술주행기(戊戌舟行記), ?석주집? 제2권 七言古詩 西河歌, ?성호사설? 제29권 시문문(詩文門) (林西河), ?순암
선생문집? 제5권 書 홍 판서에게 보냄 와 제23권 묘지 처사 남군 묘지명, ?신증동국여
지승람? 제9권 경기 인천도호부·제11권, 경기 적성현·제12권 경기 장단도호부·제14권
충청도 충주목 · 제24권 경상도 예천군·제26권 경상도 밀양도호부· 제28권 경상도 성
주목, ?약천집? 제19권 묘갈명 통덕랑(通德郞) 임공 묘갈명,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
편 2 - 도장류 1, ?용재총화? 제8권, ?임하필기? 제12권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제현
의 문집, ?청장관전서? 제53권 이목구심서6(耳目口心書六), ?패관잡기? 제4권, ?지봉
유설? 권8 문장부1 문예와 권14 문장부7 등에 언급되고 있어, 후대에 임춘의 시문과
글이 널리 읽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http://db.itkc.or.kr/index.)
10) 유명종, 「고려해동칠현의 사상-임춘을 중심으로 하여」, ?석당논총?, 제8집,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1983, p.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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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술하고 있다. 또 한국유학사나 한국철학사에서는 고려 무신집권기 학자
로 간략히 다루고 있다.11)
국문학이나 한문학 또는 역사학의 영역에서는 임춘에 대한 연구가 자주
발견되지만, 철학사상을 중심으로 연구한 논문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11
세기 이후 고려 유학자들이 경학(經學)을 소홀히 하고 문학인 사장학(詞章
學)에 치중하는 분위기라 하지만, 경학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는 사장학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의 문학작품 속에는 철학사상이 담겨져 있음을 생각
할 수 있다.
특히 서하는 “저는 성품이 본래 광달하고 대도(大道)를 묻기를 좋아해서
세속에서 사용하는 문자를 즐기지 않습니다. ······ 바라는 바는 때때로 선
생을 따라 ?주역(周易)?의 대지(大旨)를 물어 우리 성인의 도를 잊지 않는
것입니다.”12)라고 하여, 잘못된 시속의 글을 즐기지 않고, ?주역?에 근거
한 유학의 대도(大道)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애초 문학에 뜻을
두지 않고 경학(經學)에 힘써 ?주역?과 관련된 저술인 ?성리종회(性理宗會)?
10편과 ?삼재상수(三才象數)?13) 20여 편을 찬술하였다고 전해진다.
그의 철학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성리종회?와 ?삼재상수?은 아직 발견
11) 한국유학사 속에서는 이병도의 ?한국유학사략?(서울: 아세아문화사, 1986)에서는 ‘제2
편 고려시대유학’ ‘제2장 중기유학’에서 林椿을 비롯한 죽림칠현을 간략히 소개하였으
며, 한국철학회의 ?한국철학연구?(서울: 동명사, 1984)에서는 ‘고려시대 유가사상의 이
해와 제문제’에서 무신집권기의 유학에 대하고 언급하였고, 최영성의 ?한국유학사상사
1-고대·고려편?(서울: 아세아문화사, 1996)에서는 ‘제5장 무인의 집정과 유학의 쇠퇴’에
서 임춘의 ?서하집?을 직접 인용하여 서술하고 있다.
12) ?西河集?, 권4, 「與趙亦樂書」, “僕性本曠達 好問大道 不樂爲世俗 應用文字. ····· 所願者.
時時從足下問易大旨. 以不忘吾聖人道耳.”
13) 오늘날 이 두 저술을 볼 수 없어 어떤 내용인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성리종회?를
직접보고 연구했다는 1865년 정해상(鄭海尙)은 ?西河集? 卷頭 서문에서 “총론하면 공
의 이학(理學)의 글은 락건(洛建·二程)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역수(易數)의 설은 악와
(樂窩·邵雍)와 뜻이 합하였다.(公理學之文遡流乎樂建 易數之說輿衛乎樂窩)”라고 하여,
성리설은 이정(二程)·주자(朱子)와, 역수설은 소강절과 같았다고 하였으며, 「고려서하임
공행장」에서는 “성장해서는 ?성리종회?와 ?삼재상수? 등의 책을 저술하였다.(及長述性
理宗會. 三才象數等書.)”라고 하였다.
서하(西河) 임춘(林椿)의 철학사상 133
되지 않고 있으나, ?서하집?은 1713년에 청도 운문사의 인담(印澹) 스님이
구리항아리에서 발굴하는 신비스러운 과정을14) 거치면서 그 자료가 온전
히 전해지고 있다. 이에 본고에서는 ?서하집?에 수록된 서(書)·시(詩)·기
(記)·계(啓) 등의 문장 속에 들어있는 철학사상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Ⅱ. 유불도(儒佛道) 삼교의 회통
유교와 불교, 도교는 한국철학사에서 근간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이들
삼교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한 인물의 철학사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문제라고 하겠다.
고려에서는 불교를 국교로 우대하였기 때문에 ‘유불도(儒佛道) 삼교(三
敎)’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불교의 우위 조건에서 삼교가 공존하였으며, 유
학자들은 불교를 수신(修身)의 근본으로, 유학을 나라를 다스리는 이국(理
國)의 근본으로 이원화하고 있었고, 그들의 시문(詩文)에는 노장사상이 흔
하게 나타나 있다. 특히 고려중기 이후에는 유·불 뿐만 아니라 도교도 구
제사상과 체계적인 신관을 통해 호국·위민의 성격과 구복적인 성격을 아
울러 가지고 있어 삼교가 정족(鼎足)의 세를 이루고 있었다.
서하가 활동하던 무신집권기의 사상적 흐름은 불교에서는 지눌의 선종
결사에서 시작된 조계종이 성립되었으며, 유교에서는 무신정변이 일어나
문벌귀족이 몰락함에 따라 크게 위축되었으나 패관문학의 발달이 특징을
이룬다. 유학의 패관문학이 국풍적 성향을 띄면서 시가(詩歌)·잡기(雜記)의
형식을 통하여 고대문화를 영가하는 낭만주의적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14) “(숙종때 청도) 운문사 인담(印澹) 스님이 이상한 꿈을 꾸고 사찰의 가까운 산록을 파
서 선생의 유집(遺集)을 얻으니, 시와 문이 무릇 6편으로 구리항아리에 담겨져 깊고
은밀하게 봉해져 있었는데, 고려의 담인(澹印) 스님 묻었다고 표기되어 있었다. 묻은
스님은 담인이요 얻은 스님은 인담이니 그 일이 더욱 기이하다”(乃者雲門寺僧印澹因
夢感之異. 掘得先生遺集於本寺之近麓. 詩文凡六編. 盛之銅器. 封識深密. 卽前朝僧澹印
所藏也. 藏之者澹印. 得之者印澹. 其事甚奇. ?西河集?, 「西河集重刊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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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경향은 그 당시 학자들이 유학에 대한 소양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경학(經學)보다는 문학에 치중하고, 유학자이면서도 동시에 도교(道敎)·불
교(佛敎)에 심취하게 되었기 때문이다.15)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서하는 「이미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옛날 우리 성인 공자가 쇠퇴한 주나라 말기에 나서 노담씨(老聃氏)와 같
은 시대에 드디어 서로 스승으로 도왔는데, 후세의 학자에 이르러 오히려
서로 헐뜯는 폐단이 가끔 있었으니, 하물며 우리 성인 공자께서 떠나신지
무릇 천백여년에, 석씨(불교)가 들어와서 공자, 노자와 더불어 다투어 삼
교가 되었으니, 서로 충돌하고 합하지 않는 것도 또한 당연하다. 불교는
자인(慈仁)·광박(廣博), 적멸·무위로써 도를 삼으니 ?주역(周易)?과 그 뜻
이 합치되는 바 있는 것이다. 진실로 회통하고 융화한다면 본래 다르게
돌아감이 없으니, 비록 성인이 다시 태어난다 해도 배척하지 않을 것이
다.”16)
라고 하여, 공자를 우리 성인으로 존숭하면서 노자와 같은 시대의 사람으
로 서로 도왔으나 후세 학자에 이르러 갈등이 있었으며, 천년 후에는 불
교가 전래되어 삼교가 서로 충돌하고 합하지 못하고 있으나, 불교의 도
(道)가 ?주역(周易)?의 뜻과 서로 합하는 바가 있어, 회통하고 융화한다면
본래 같은 곳을 돌아간다고 하였다.
그는 「소림사중수기(小林寺重修記)」에서 “성인의 도는 세상에 번갈아 일
어나면서 천하를 감화시키는 까닭에 옛날 우리 공자가 쇠약한 주나라 때
에 인의(仁義)로써 그 가르침을 베풀더니 다시 양주․묵적․황로의 기이한 말
과 재주가 뒤섞여 분열하여 나타나서 그 폐단은 진한(秦漢)에서 못하는 것
이 없어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이에 불교가 중국에 들어와서 순수한 참
15) 한국철학회편, ?한국철학연구?, 서울: 동명사, 1984, p. 491.
16) ?西河集?, 권5, 「送李眉叟序」, “昔吾聖人. 出衰周末. 與老聃氏同時. 遂相師資焉. 至後世.
學者猶或有迭相訾毀之弊. 而況去吾聖人凡千百餘載. 有釋氏者出. 與孔老抗爲三敎. 則其
抵梧而不合亦宜矣. 釋氏以慈仁廣博寂滅無爲爲道. 與大易有合其旨者. 苟統而和融. 本無
異歸. 雖吾聖人復生. 不得而斥也.”
서하(西河) 임춘(林椿)의 철학사상 135
다운 진리로 사람에게 보이며, 자비(慈悲)의 실천으로써 가르치고 중생을
제도한 것은 시기에 맞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류종원은 불교와 공자의 도
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여 말하기를 ‘진승의 법인을 유교의 경전과 같이
사용하여야 사람이 지향하는 길을 알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 그런 즉 만
일 회통하여 이를 합한다면 유교와 불교의 두 가지는 본시 그 목적에 있
어서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17)라고 하여, 공자의 인의 가르침과 불교의
자비 실천이 한 가지로 회통함을 밝히고 있다.
서하는 유학과 불교의 참된 도가 실현되기를 바라면서도 「이미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세상의 싸우고 빼앗고 생명을 해치는 일들을 구제하는 것과 같이 오직
불교가 저 교화에 도움될 수 있는 까닭에 유가들도 또한 그 풍을 즐거워
하며 따랐다. 다만 한퇴지만은 곧 힘써 배척하여 매우 다투었다. 대개 그
렇게 하지 아니하면 학자가 드디어 공자의 가르침이 없어져 버리는 것을
구할 수가 없다. 그러나 유학․불교의 무리는 그 진리를 다 함께 해롭게
하지 않는 자가 없다. 요즘 대개 몸에 의관을 입고 입으로 인의를 말하면
서 나는 공자의 무리라 한다. 천천히 살펴보면, 그 도를 빙자하여 불의를
행하고 이따금 어리석고 무식한 사람도 차마 못할 바를 하고 있으니, 이
는 본래 시서(詩書)로써 장사함이어서 우리 성인에게 죄를 얻음이 또한
크다. 머리를 깍고 검정 옷을 입는 중은 부부나 부자가 없는데도 방탕하
고 부허하여 함부로 빈 말을 하여 사람을 유인하고 자기 이익을 찾는 자
가 있으니, 어찌 서로 다르다 하겠는가? 군자가 마침내 배척하지 아니하
고 도리어 찬양하며, 그대로 하도록 두겠는가? 내가 불교를 배척한 것은
대개 이에 이유가 있으니 더욱 그 도를 존중하기 때문이다.”18)
17) ?西河集?, 권5, 「小林寺重修記」, “聖人之道迭興於世. 而化成天下. 故昔吾孔子當衰周時.
以仁義設其敎. 及更揚,墨,黃,老. 奇言異術. 雜裂而四出. 其弊流於秦漢而無所不至.
而有不忍聞. 於是釋迦氏入中土. 醇以第一義示人. 敎之以慈悲之行. 以度衆生. 所以趣時
也. 故柳子以爲浮屠之說不與孔子異道. 又曰. 眞乘法印. 與儒典竝用. 而人知嚮方矣. 然則
苟統而混之. 儒釋二敎本無異歸焉.”
18) ?西河集?, 권5, 「送李眉叟序」, “若救世之搏鬪攘奪. 殘生害命者. 惟釋氏有可助夫敎化焉.
故雖儒家者流. 亦將悅其風而趨之. 唯韓退之乃力排而急與之角. 蓋不如是. 學者不可救而
遂無孔氏耳. 然而儒釋之徒者. 不能無俱害於其道. 今夫身衣冠口仁義而曰. 我孔氏徒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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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하여, 세속의 유학자와 타락한 승려를 동시에 비판하였다. 그가 불교
의 타락한 모습을 비판하여 불교를 배척하는 학자로 오인되기도 하였으
나, 그것은 그 도를 존중하여 참된 도의 회복을 요구하였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일차적으로 “아 슬프다! 세상의 이름난 승려가 깊숙한 집에 살면
서 외출하면 좋은 말을 타고 부처님을 팔아서 이익을 찾고 착한 일을 한
가지도 행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19)라고 하여, 당시의 승려가 타락하여
망령되게 빈 말을 가탁하고 사람을 속여 자기만 이롭게 하는 일들이 많다
고 꼬집어 불교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내
성품이 불도를 좋아하기 때문에 장차 그런 사람을 찾아서 벗을 삼을 양으
로 20년을 두고 구했으나, 만나지 못했는데 지금에야 비로소 그 사람을(謙
上人)을 만나게 되었다.”20)라고 하여, 성품이 불교를 좋아하며 법어를 즐
기고 감로의 맛에 뜻을 두고 선(禪)을 하는 승려인 겸상인(謙上人)을 만나
게 된 것을 기뻐하고 있다. 그가 훌륭한 승려는 자주 만나고 시를 지어
주는 등 불교에 매우 호의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21)
또한 서하의 문학작품에 나타난 ‘월궁(月宮)’·‘항아(姮娥)’·‘자부(紫府)’·‘서
왕모(西王母)’·‘격원(闃苑)’·‘옥황상제(玉皇上帝)’·‘문성(文星)’·‘옥루기(玉樓
記)’·‘적산(謫山)’ 등 천상계의 인물과 신선경의 모습은 도교사상으로, 그가
노장(老莊)의 책을 읽고 여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자신이 중심된 문학집단인 죽림고회(竹林高會)가 위진시대의 죽림칠현(竹
徐而視則資其道以濟不義. 往往爲愚陋恒民所不忍爲者. 是固以詩書發塚. 而得罪於吾聖人
也亦大矣. 至於髡而緇. 無夫婦父子. 縱誕浮虛. 妄取空語. 以誘乎人而利乎己者. 豈異夫
是. 君子其卒不斥. 而反譽以使進耶. 吾斥釋氏者蓋在是. 所以尤尊其道也.”
19) ?西河集?, 권5, ?妙光寺十六聖衆繪象記」, “噫. 世之名浮屠者. 居則邃宇. 出則肥馬. 賣佛
祖以漁利. 而不營一毫之善者多矣.”
20) ?西河集?, 권5, 「送志謙上人赴中原廣修院法會序」, “吾性好釋氏道. 故將求其人以爲友.
積二十年不遇. 今於上人有得焉.”
21) 김응환, 「임춘의 시세계 고찰」, ?한양어문연구?, 제5집, 한양어문학회, 1987, p. 29.
서하(西河) 임춘(林椿)의 철학사상 137
林七賢)을 빗된 것도 노장사상의 경향으로 당시 유학자들은 자신의 현실
불만과 여기에서 벗어나려는 욕구를 노장문학에서 찾고자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서하는 자신이 전통적 유가의 가문에 태어나 그 속에서 평생을
살았고, 불교의 많은 승려들과 친교를 맺고 불경에 조예 또한 깊었으며,
도교의 경우 그것을 신봉하여 그에 깊이 침잠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공
자를 우리 성인으로 존숭하여 그 근본을 유학에 두고, 불교의 가르침과
유학의 가르침이 근본에 있어서는 하나로 귀일된다고 하였고, 문학작품
속에서는 도교의 인물을 자유롭게 표현하여 삼교의 회통 내지 합일을 구
현하고 있다.22)
서하가 유학에 근본하여 불교와 도교의 회통을 하고자 한 것을 다른 각
도에서도 찾을 수 있다.
“오직 한퇴지만은 (불교를) 극력 배척하길 지극히 모나게 하였는데, 이유
는 이같이 배척하지 않으면 배우는 사람을 구할 수 없고, 마침내 공자(儒
學)가 없어질 따름이기 때문이었다.”23)
“한유와 류종원을 실컷 배워 자족했거니, 병같이 적은 그릇 채우듯 했어라
········· 장부가 어찌 다시 주충(雕蟲)을 쓰겠는가! 주공과 공자의 도를 잡아서
돕는 그 뜻 위대하리니. 이단설을 주장하여 눈멀고 귀 먹은 사람을 놀라게
하랴? 일을 만나면 봉기하기를 우레가 떨치듯 화급히 하였다.”24)
“하늘은 사문(斯文)을 없애지 않아, 우리의 도가 크게 행해질 걸세 ········
오직 한퇴지가 고문을 좋아하여 크게 후생을 창도하였네.”25)
그는 당송팔대가로 이름을 날린 고문운동가인 한유(韓愈)26)와 류종원
22) 유명종, ?한국유학연구?, 대구: 이문출판사, 1988, p. 95.
23) ?西河集?, 권5, 「送李眉叟序」, “唯韓退之乃力排而急與之角. 蓋不如是. 學者不可救而遂
無孔氏耳.”
24) ?西河集?, 권2,「次韻李相國 知命 見贈長句 二首」, “飫韓饜柳聊自足. 小器已盈如甁罌.
······· 丈夫何用更雕蟲. 扶持周孔意甚宏. 肯張異說驚盲聾. 遇事蜂發如振霆.”
25) ?西河集?, 권2, 「賀皇甫沆及第 二首」, “皇天未喪斯. 吾道當大行. ····· 退之獨好古. 大唱於
後生.”
26) 한유는 유학사상 내지 유불도 삼교의 교섭사에서 맹자를 존중하여 유불도 삼교 공존
138 ?人文科學? 第94輯
(柳宗源)을 사숙하면서, 불교와 공자의 도가 다르지 않다는 류종원의 입장
과 공자의 가르침이 사라질까 근심하여 불교를 배척한 한유의 입장을 정
확히 인식하고 있었으며, 하늘이 ‘사문(斯文)’을 없애지 않아 ‘오도(吾道)’
가 크게 행해질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특히 서하는 “한유 이후에 정도를 잡아 유지하고, 제가(諸家)를 배척하
여 공자를 존숭하였지”27)라고 하여, 한유 이후 자신이 공자를 존숭하였고,
「미수가 개녕에 있는 나를 방문하여 아리지주를 먹게 했으므로 시를 지어
사례함」에서는 “시의 명성은 일찍이 한유에서 취하고 류종원에서 가지런
히 하였으며, 도의 사귐에서는 거듭 공자의 도를 펴고 정자(程子)를 만났
다.”28)라고 하여, 이정(二程)으로 대표되는 북송 성리학을 깊이 있게 공부
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서하는 성인의 도와 유학의 핵심 경전인 ?주역?을 가장 중요시한
데에서도 유학을 근거로 유·불·도 삼교의 회통을 주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저는 성품이 본래 광달하고 대도(大道)를 묻기를 좋아해서 세속에서 사
용하는 문자를 즐기지 않습니다. 다만 어려서 부형(父兄)의 강권으로 이
를 지을 수 밖에 없었으나 난리를 만난 후로 그만두고 짓지 않은 것이
오래되었습니다. ······ 바라는 바는 때때로 선생을 따라 ?주역?의 대지(大
旨)를 물어 우리 성인의 도를 잊지 않는 것입니다.”29)
의 풍토에서 도교와 불교를 이단으로 배척하고 유학을 위주로 개혁하고자 한 점과 선
진유학을 송대 신유학으로 연결시키는 고리의 역할을 담당하는 중요한 위치를 치지하
고 있다. 송대 성리학이 당대의 한유나 이고(李翶) 등의 불교 배척의 토양에서 발흥할
수 있었음에 유의하게 되며, 불교 배척의 대안적 유학으로 발흥한 것이 성리학인 만큼
고려 유학자들도 이점을 간파한 것이다.(윤사순, 「12세기경, 고려의 성리학 형성」, ?東
洋哲學?, 제32집, 한국동양철학회, 2009, p. 4.)
27) ?西河集?, 권2, 「贈皇甫若水兄弟」, “扶持正道韓公後. 破出諸家孔氏尊.”
28) ?西河集?, 권2, 「眉叟訪予於開寧 以鵝梨旨酒爲餉 作詩謝之」, “詩名早竊韓齊柳. 交道重
申孔遇程.”
29) ?西河集?, 권4, 「與趙亦樂書」, “僕性本曠達. 好問大道. 不樂爲世俗. 應用文字. 但少爲父
兄所強. 未免作之. 自遭難. 廢而不爲者久矣. ····· 所願者. 時時從足下問易大旨. 以不忘吾
聖人道耳.”
서하(西河) 임춘(林椿)의 철학사상 139
?주역?에 바탕한 유학의 대도를 익혀 성인의 도를 잊지 않고자 한다고
하여, 유학의 도의(道義)를 잊지 않고 실천하는 것이 자신의 학문적 사명
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함순을 전송하는 서」에서 “그는 순박하고 중후하며 곧은
도를 임무로 삼으며, 효·경(敬)·충·신을 마음 가운데 바탕으로 삼고, 문학과
사채(辭彩)가 밖으로 꾸며져 하는 일이 헤아릴 만한 것인져”30)라고 하여,
유학의 충효(忠孝)와 경신(敬信)을 강조하였으며, 또 「항보약수에게 주는
서」에서는 “제가 남들에게 내쳐지고 모함에 빠져 세상의 비웃음거리가 되
고, 궁벽진 시골에 살면서 고루함만 늘어가니 학문은 더 늘지 않고 도도
더 나아가지 못해 마침내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다만 때때로
책을 읽는 것은 오직 우리 성인의 도를 잊지 않고자 함이니.”31)라고 하여,
성인(孔子)의 도를 잊지 않고 공부할 것을 밝히고 있다.
특히 「향교의 제생들이 회음에 초대하므로 시를 지어 사례함」에서는
“지난 날 궁색에 들려 성인의 진영을 뵈었는데 선비들의 고회는 행단의
봄철이구료! ····· 무수히 승당하는 훌륭한 선비들, 흐뭇하게 만좌한 모든
가빈들! 이 노유(老儒)는 오랫동안 사문(斯文)이 없어짐을 탄식했지만, 이
름난 고을마다 예의가 새로우니 매우 기뻐라.”32)라고 하여, 성인의 도인
예의를 배우는 선비들이 많음에 기뻐하고 있다.
한편 서하는
“함께 세속 밖에 놀아 인간의 일에 끌리지 않고도 안회(顔回)는 누항(陋
巷)을 지키니 비록 한 그릇의 밥과 한 바가지의 물로 걱정을 견디지 못하
나, 왕속(王續)의 취향(醉鄕)에 들어가니 수레바퀴도 이를 수 없는 곳입니
다.”33)
30) ?西河集?, 권5, 「送咸淳赴翼嶺序」, “敦朴質重. 與直道爲任. 孝敬忠信資乎中. 文學辭彩飾
乎外. 則其施於事業者. 又可量耶.”
31) ?西河集?, 권4, 「與皇甫若水書」, “其時時讀書. 唯欲不忘吾聖人之道耳.”
32) ?西河集?, 권2, 「鄕校諸生見訪」, “昨入宮墻拜聖眞. 衣冠高會杏壇春. 祇因曾點初成服. 得
見宣尼善誘人. 藹藹升堂多吉士. 陶陶滿坐盡嘉賓. 老儒久歎斯文喪. 始喜名都禮義新.”
140 ?人文科學? 第94輯
라고 하여, 유학의 이상적 군자적 삶을 살아간 안회의 생활을 자신의 삶
과 빗대고, 보통 사람은 찾아오지 못한다는 왕속의 고사를 인용하면서 안
분지족(安分知足)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는 ?논어(論語)?에서 공자가 안
회를 칭찬하면서 말한 “안회는 끼니를 잇지 못할 정도로 가난해도 항상
태연하며 군자의 풍이 있으므로 회야 말로 성인의 도에 가깝다.”34)라고
한 것을 동경한 것이라 하겠다.
또 「이학사에게 올리는 계」에서는
“특히 ?논어?의 ‘써 주면 나와서 일하고, 버리면 자취를 감춘다.’ 이 말은
공자가 안자(顔子)에게만 칭찬한 말이고, 세상이 화평하면 나아가고 어지
러우면 물러난다는 것은 맹자(孟子)가 백이(伯夷)에게 허락하여 준 것으
로 오직 나아가고 물러남의 그 때를 따르는 것이니, 이는 성인과 현인이
함께한 것이다.”35)
라고 하여, 그의 출사관(出仕觀)도 공자의 도에 근거하고 있다. 공맹(孔孟)
의 도를 함께 밝힌 것에 대하여 유명종 교수는 “이것은 중요한 유학사적
의미가 있다. 고려 초기의 유학은 주공과 공자의 학문을 중심으로 하는
‘주공지학(周孔之學)’으로 맹자는 전공하지 아니하였으니, 중국 후한 이후
전성한 고문학파의 영향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북송의 도학이 공맹을 중
심으로 함에 이인로, 임춘, 이규보 등에 이르러 북송의 이취문학(理趣文學)
을 수용하여 문학 혁신이 일어났다.”36)라고 하여, 북송 성리학자들이 맹
자를 중시한 것과 그 맥이 닿아 있다고 하였다.
33) ?西河集?, 권6, 「射人見訪啓」, “共爲方外之遊. 不導人間之事. 守顏回之陋巷. 雖簞瓢不堪
其憂. 入王績之醉鄕. 非轍迹所可得至.”
34) ?論語?, 「雍也」, “子曰, 賢哉, 回也! 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 回也!”
35) ?西河集?, 권6, 「上李學士啓」, “竊以用捨行藏. 仲尼獨稱於顏子. 理進亂退. 孟軻亦與於伯
夷. 惟隱顯之隨時. 乃聖賢之同致.”
36) 유명종, 「고려해동칠현의 사상-임춘을 중심으로 하여」, ?석당논총?, 제8집,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1983, p. 41.
서하(西河) 임춘(林椿)의 철학사상 141
Ⅲ. 주기론(主氣論)의 주창
임춘은 “문은 기운이 위주요, 중심에서 움직여서 말에 형용되는 것이
다.”37)라고 하여, 한문학사에서는 ‘문이기위주(文以氣爲主)’인 문기(文氣)의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한 학자로 평가받고 있다.38) 그는 문장의 바탕에는
기(氣)가 위주가 됨을 밝히고, 또
“무릇 글을 짓는 데는 기로서 주인을 삼는다. 그러나 여러 번의 우환을
겪고 나니 정신과 의지가 황폐하여 캄캄하고 참으로 한 늙은 농부의 몸
이 되었구료. 때로 글을 읽음은 우리 성인의 도를 잊어버리지나 말자고
한 것 뿐이다.”39)
라고 하여, 글을 짓는 것은 기를 주로 삼아야 하며, 글을 짓고 읽음에 성
인의 도를 잊어버리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러한 문학적 경향에 대하여 정
우봉 교수는 “열렬한 유교주의자로서 고려의 문화·문학의 유교화·고문화
로의 개조의식을 지녔던 임춘은 타고난 기질·정신적 역량으로써 기를 원
용하여 전대의 화미한 과문(科文) 위주의 형식주의적 문풍을 극복하는데
주력하였다.”40)라고 하여, 문기(文氣)를 토대로 고려의 문화·문학을 바꾸려
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서하는 문장과 기에 대하여
“문장이 어렵다 함은 말할 것도 없으나 배워서 능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대개 지극히 강한 기가 몸 가운데 충만하여 얼굴에 넘치고 언어로 나타
남을 스스로 알지 못할 뿐이다. 진실로 능히 그 기를 기른다면 비록 일찍
37) ?西河集?, 권6, 「上按部學士啓」, “文以氣爲主. 動於中而形於言.”
38) 정우봉, 「산문론의 형성과 전개 삼국시대-무신집권기」, ?민족문화연구? 제30집, 고려대
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7, p. 308.
39) ?西河集?, 권4, 「與皇甫若水書」, “凡作文. 以氣爲主. 而累經憂患. 神志荒敗. 眊眊焉眞一
老農也. 其時時讀書. 唯欲不忘吾聖人之道耳.”
40) 정우봉, 앞의 논문, p. 308.
142 ?人文科學? 第94輯
이 붓을 잡고 배우지 않는다 하더라도 문장은 더욱 저절로 기이할 것입
니다. 그 기를 기르는 자가 명산대천을 두루 구경하여 천하의 기문(奇聞)
과 장관(壯觀)을 궁구하지 않는다면 역시 가슴 가운데에 있는 뜻을 넓힐
수 없는 것입니다. 이로써 소철(蘇轍)은 생각하기를 ‘산에서는 종남산과
숭산, 화산의 높음을 보았고, 물은 황하의 큼을 보았고, 사람으로는 구양
수와 한기를 본 연후에 천하의 큰 구경을 다하였다.’고 여겼습니다.”41)
라고 하여, 문장은 몸 가운데 기가 충만하여 언어로 드러날 때 기이(奇異)
하다고 하였다. 여기서 ‘지극히 강한 기가 몸 가운데 충만하여 얼굴에 넘
치고 언어로 나타나 스스로 알지 못할 뿐이다.’는 내심에 충만하고 밖으
로 넘쳐 나오는 호연(浩然)한 기운을 의미하고, ‘그 기를 기르는 자가 명
산대천을 두루 구경하여 천하의 기문(奇聞)과 장관(壯觀)을 궁구하지 않는
다면 역시 가슴 가운데에 있는 뜻을 넓힐 수 없는 것입니다.’는 호연한 기
운을 기르는 방법을 밝힌 것이다.42)
‘지극히 강한 기’(至剛之氣)는 ?맹자?에서 말한 “나는 호연지기(浩然之
氣)를 잘 기르노라. 감히 호연지기가 무엇을 이른지 묻고자 합니다. 맹자
가 말하기를 말하기 어렵다. 그 기(氣)됨이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하니 곧
음으로 기르고 해침이 없으면 천지의 사이 가득차게 된다. 그 기됨이 의
리와 도에 짝하니 이것이 없으면 굶주리게 된다.”43)에 등장하는 호연지기
(浩然之氣)이며, ‘그 기를 기르는(養其氣)’ 양기론(養氣論)도 ?맹자?의 “무릇
뜻(志)은 기를 통솔하고 기(氣)는 몸의 가득찬 것이니 뜻이 지극한 것이고
기는 그 다음이다. 그러므로 뜻을 잘 잡고도 그 기를 난폭하게 하지마
41) ?西河集?, 권4, 「上李學士書」, “文之難尙矣. 而不可學而能也. 蓋其至剛之氣. 充乎中而溢
乎貌. 發乎言而不自知者爾. 苟能養其氣. 雖未嘗執筆以學之. 文益自奇矣. 養其氣者. 非周
覽名山大川. 求天下之奇聞壯觀. 則亦無以自廣胸中之志矣. 是以. 蘇子由以爲於山見終南
嵩華之高. 於水見黃河之大. 於人見歐陽公,韓大尉. 然後爲盡天下之大觀焉.”
42) 홍성욱, 「임춘 산문의 연구-무신집권기 산문창작 경향의 변화와 관련하여」, ?민족문화
연구?, 제32호,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1999, p. 451.
43) ?孟子?, 「公孫丑章上」, “曰我知言. 我善養吾浩然之氣. 敢問. 何謂浩然之氣.曰難言也. 其
爲氣也. 至大至剛. 以直養而無害. 則塞於天地之間. 其爲氣也. 配義與道. 無是餒也.”
서하(西河) 임춘(林椿)의 철학사상 143
라”44)에 근원한 것으로 기는 뜻(志)에 의하여 통솔 되는 것이기 때문에
명산대천을 두루 구경하여 마음 속의 뜻(志)을 스스로 넓혀 기를 길러야
함을 밝힌 것이다.
「산인 익원에게 부치다」에서도 “나도 젊어서 산천을 좋아했기에 호연히
돌아갈 것을 생각했지”45)라고 하여, 호연한 기를 기르기 위해 산천을 좋
아함을 노래하고 있으며, 또 양기(養氣)의 방법에 대하여 「동행기(東行記)」
에서는
“옛날 사마태사(司馬太史,사마천)는 일찍 회계(會稽) 땅으로 가서 우혈(禹
穴)을 구경하고 천하의 장관을 다 보았으므로 정신이 더욱 기걸(奇傑)하
고 커져서 그 문장이 소탕하고 호장한 기가 있었으니, 대장부가 널리 돌
아다니며 먼 곳으로 구경을 다니며 천하를 휘졌는다면, 장차 그 가슴 속
에 수기(秀氣)를 넓히게 될 것이다. 내가 만약 명리나 벼슬에 얽매어 있
었다면 반드시 그 기이하고 기섬(奇摻)을 끝까지 찾아다니면서 그 이상함
을 채집하고 평소에 가졌던 뜻을 달성하지 못하였을 것이다.”46)
라고 하여, 명산대천 혹은 훌륭한 인물들과 만나 기문, 장관을 경험하여
가슴속의 수기(秀氣)를 길러야 함을 밝히고 있다.
서하의 이러한 문기론은 고문가인 당대(唐代) 한유와 송대(宋代)의 소철
(蘇轍) 등에게 직접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47) 무신난으로 인해 몰락한 서
하는 힘든 생활 속에서 기(氣)를 중요시 한 자신의 세계관(우주관)과 인간
관이 직접 관계된 것으로 「이학사 지명에게 올리는 편지」에서
44) ?孟子?, 「公孫丑章上」, “夫志. 氣之帥也. 氣體之充也. 夫志至焉. 氣次焉. 故曰. 持其志.
無暴其氣.”
45) ?西河集?, 권2, 「奇山人益源」, “吾少愛林泉. 浩然思歸歟.”
46) ?西河集?, 권5, 「東行記」, “昔司馬太史嘗遊會稽. 窺禹穴以窮天下之壯觀. 故氣益奇偉. 而
其文頗疏蕩而有豪壯之風. 則大丈夫周遊遠覽. 揮斥八極. 將以廣其胸中秀氣耳. 余若桎梏
於名檢之內. 則必不能窮其奇摻其異. 以賞其雅志也.”
47) 허남욱, 「죽림고회의 시학연구」, ?한문고전연구? 제13집, 한국한문고전학회, 2006, p.
156참조.
144 ?人文科學? 第94輯
“저는 일찍이 조화(造化)의 용광로 사이에서 여러 번 단련된 정련한 기
(氣)를 받고, 음양(陰陽)으로써 그 바탕을 삼고, 오행(五行)으로 그 육체를
형성했으며, 28수(宿)의 별 기운을 받아 그 가슴에 나열한 후에 영혼(靈
魂)을 받아 태어났으며, 머리가 나와서 만물(萬物)을 이롭게 하였다.”48)
라고 하여, 자신의 탄생에 대하여 기를 중심으로 우주생성론의 입장에서
밝히고 있다. 즉, 조화자인 기로부터 음양이 나누어지고, 음양이 다시 오
행을 생성하고, 28수를 받아 영혼이 생성되고 그 영혼에 의해 탄생되어
만물을 이롭게 한다고 하여, 일체의 만물이 기에 근거하여 생명이 발생되
는 주기론(主氣論)을 주장하고 있다.
「6월 15일 밤에 비가 개이므로 달을 보고 감회를 씀」에서는 “뜨겁고 차
가움의 본질은 본래 없다 해도, 하나의 기운(一氣)은 서로 주야를 대행한
다네. 거북과 토끼는 음과 양에 붙었으므로 옛날부터 이물(異物)이 서로
변화했다 하네.”49)라고 하여, 하나의 기운(一氣)이 주야로 대행하여 음양
의 변화가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또한 「부도가일명자서(浮屠可逸名字序)」에서는
“사람은 기를 의지해서 사는 것이고, 기는 호흡(息)에 의거하여 존재한다.
자오(子午)에 따르고 음양에 순응하여 출입하고 시작에 그치지 않는다.
바야흐로 또한 성색(聲色)과 취미(臭味)가 밖에 돋아나고, 생각함과 지려
(智慮)가 안에서 꾸미니 거의 옹색하고 위태롭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군
자는 일에 있어서 그 정신을 수고롭게 하지 않고 그 기운을 난폭하게 하
지 않으니 편안히 기다릴 뿐이다. ·········· 담담히 무위(無爲)함으로서 진기
(眞氣)를 지킨다면 바깥 사물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되는 것이다.
············ 학문을 하되 즐기고 그 기를 난폭하게 하는데 이르지 않으면 거
의 가깝다고 하리라”50)
48) ?西河集?, 권4, 「上李學士知命書」, “僕嘗於造化爐鎚間. 受百鍊精剛之氣. 而陰陽資其質.
五行成其體. 二十八宿羅其胸襟. 然後稟靈以生. 首出利物焉.”
49) ?西河集?, 권2, 「六月十五夜對月六首」, “要知炎冷本無質. 一氣交馳代日夜. 銀蟾玉陰繫
陽.”
50) ?西河集?, 권5, 「浮屠可逸名字序」, “人恃氣以生. 氣恃息以存焉. 隨子午順陰陽而出入. 未
서하(西河) 임춘(林椿)의 철학사상 145
라고 하여, 인간의 탄생이 기에 의지하고 있으며, 기는 숨쉼에 따라서 활
기를 얻게 되고, 진기를 유지하자면 담연무위하고 무욕하여 기를 난폭하
게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기시식(氣恃息)’은 생명의 근원을
기식(氣息)으로 보는 우주론으로 이러한 임춘의 주기사상은 우리나라 사
상사에서 처음 나타난 것으로 이규보와 최자(崔滋)51)의 글에서도 나타나
고 있다.52)
「형부 이시랑에게 올리는 편지」에서는 “그러한 후에 한 점의 화창한 기
가 태허 속에서 와서 사물이 생을 얻어 화락한 봄이 되었을 것입니다.”53)
라고 하여, 북송 성리학의 핵심 개념인 ‘태허(太虛)’를 말하고 있다.
서하의 이와 같은 기와 음양에 대한 논의는 북송 성리학 형성기의 소옹
(邵雍)·장재(張載) 등 주기론자들의 주장과 유사한 것으로 이러한 점은 그
가 고문가류의 문기론에 그치지 않고 성리학적 기론(氣論)에 접근하였음
을 입증하는 것이며, 또 우주 자연의 태초나 그 생성문제의 언급을 과거
의 학자들과 달리, 상제(上帝)· 천(天)과 같은 인격신(人格神)에 의지하지
않고 ‘신명(神明)’같은 궁극적 근원의 개념과 ‘조화(造化)’와 ‘기(氣)’ 개념
을 동원하는 사유는 곧 우주의 생성을 자연적인 현상으로 해명하고자 하
는 철학이라 하겠다.54)
그리고 위 인용문에서 폭기·양기라 할 때는 맹자의 호연지기와 그대로
상통하지만, ‘담담히 무위해서 진기를 지킨다면’에서 진기는 노장(道家)의
기와 서로 통하고 있다. 「안부 학사에게 올리는 계」에서는 “기운을 토하
始有止也. 方且以聲色臭味蘖其外. 思爲智慮柴其內. 則幾何其不壅而殆哉. 故君子之於事.
無勞其神. 無暴其氣. 逸以待之而已. ······· 淡然無爲. 以守眞氣. 則不爲事物之所擾也. ······
其爲學. 耽而不至於暴其氣則幾矣.”
51) 임춘의 이러한 주기론(主氣論)의 철학을 이규보는 이를 발전시켜 산문 창작의 개성적
측면을 부각하였으며, 최자는 이들 앞서의 논의를 종합하고자 하였다.(정우봉, 앞의 논
문, p. 308.)
52) 유명종, 앞의 논문, p. 42.
53) ?西河集?, 권4, 「上刑部李侍郞書」, “然後一點和氣從太虛中來. 物得以生而熙熙然春矣.”
54) 윤사순, 「12세기경, 고려의 성리학 형성」, ?동양철학?, 제32집, 한국동양철학회, 2009,
p. 8참조.
146 ?人文科學? 第94輯
여 문장을 이루니 우연히 진인의 기침소리도 발하였습니다”55)라 하여, 도
교에서 말하는 토기(吐氣)와 진인(眞人)을 말하고 있다. 토기(吐氣)는 도인
술인 기의 토납(吐納)과 관계되고, 진인·지인(至人) 등은 장자에 의해서 처
음으로 사용된 것으로 도교의 기론(氣論)도 같이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Ⅳ. 북송 성리학의 수용
성리학의 동래(東來) 시기는 13세기 말로 보는 것이 통설이지만, 고려중
기 내지 무인집권기56)에 이미 성리학이 전래 되었을 가능성이 수 차례
제기된 바 있으며,57) 고려후기 성리학의 수용은 고려중기의 1세기 이상
북송 성리학과의 접촉, 전래의 과정을 겪고, 또 1세기 이상 무신정권기를
거쳐서 고려말 신진사대부들에 의하여 실제 정치적·사회적 기능을 담당하
는 사상으로 정착되었다고 하겠다. 고려 중기에 발달한 유학사상이 무신
정권기를 거치면서 당시 불교계의 혁신운동인 신앙결사운동과 상호교류
를 맺으면서 주자 성리학을 수용하게 된 것이다.58)
55) ?西河集?, 권5, 「上按部學士啓」, “吐氣成章. 偶發眞人之聲欬.”
56) 무신집권시대의 조계종과 패관문학의 발달은 그 다음 몽고간섭시대에 성리학을 수용
하게 되는 전제적 기반이 된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조계종의 수양론과 호국의
식, 그리고 패관문학이 지니는 불교적 요소와 회고적 주체의식은 몽고에서 들어온 성
리학을 자기 것으로 소화하여 재구성할 수 있는 기반이 되고 있다.(한국철학회편, ?한
국철학연구?, 서울: 동명사, 1984, p. 491.)
57) 이에 대한 한국철학계의 연구는 최영성의 「고려중기 북송성리학의 수용과 그 양상-북
송성리학의 전래시기와 관련하여-」(?대동문화연구원?, 제31집, 1996.)에서 자세히 밝히
고 있다.
58) 이원명, ?고려시대 성리학수용 연구?, 국학자료원, 1997, p. 57.
한편 중국에서 성리학 발흥의 중요한 근거인 고문운동과 심성론은 고려 중기에 수용
되었으며, 특히 무신집권기에 무신들로부터 소외되어 지방에 은거했던 유학자들 사이
에서 보존·계승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하며, 무신정권 내에서 유불의 교섭은
성리학 수용의 과정이요 준비단계였다고 하겠다.(최일범, 「고려중기 유불교섭의 철학
서하(西河) 임춘(林椿)의 철학사상 147
송대(宋代)에 새로운 유학이 발흥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끼친 유교 경전
은 ?중용(中庸)?과 ?주역(周易)?이다. ?주역?과 ?중용?은 성리학의 형이상
학적인 원리인 태극(太極)과 이기(理氣)의 설(우주론, 존재론)과 성리(性理)
의 설(심성론)의 토대를 제공한 경전으로 고려중기 이후 유학자들이 지대
한 관심을 가졌으며, 이것은 유학에서 새롭게 싹트고 있던 성리학적인 경
향을 찾아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특성이라고 하겠다.59)
제2장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서하는 ?주역?의 대도에 뜻을 두고 공부하
였기 때문에 「고려서하임공행장」에서는 “공은 어려서 영특하였고, 6·7세
때부터 백가서(百家書)를 두루 읽었으며, 심오하고 정밀한 뜻을 깊이 깨달
아 성장해서는 ?성리종회?와 ?삼재상수? 등의 책을 저술하였다.”60)라고
하여, 서하의 학문이 ?주역?에 근본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성리종회?
는 성리학의 핵심사상인 ‘성즉리(性卽理)’의 으뜸을 모아 놓았다는 뜻이며,
?삼재상수?는 ?주역?의 역도(易道)인 천지인(天地人) 삼재지도와 송대 도
서상수역학(圖書象數易學)을 함께 말한 것으로61), 성리학의 본질을 담고
있는 서적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또 「서(序)」에서는 “성명(性命)의 근원을 나누어 분석하고 상수의 이치
를 추연하는데 이르는 것은 현묘한 빗장과 신비한 열쇠, 옥 빗장과 금 열
쇠가 손재주에 근거하여 훌륭하게 벗겨지는 것이다.”62)라고 하여, 성리학
적 근거에 관한 연구」, ?동양철학연구?, 제25집, 동양철학연구회, 2001, p. 17.)
59) 변동명, ?고려후기 성리학 수용 연구?, 일조각, 1995, p. 15.
그러나 이러한 유학계의 동향에도 불구하고 고려중기 이래의 ?주역?과 ?중용?에 의한
심성화의 방향은 무신난 이후에는 그 주도권이 오히려 儒家의 손을 벗어나 당시 불교
계에 새로운 기풍을 불러 일으켰던 禪宗계통으로 넘어가게 됨으로써 유학은 침체기를
맞이하며, 성리학의 도입시기가 후대로 이해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문철영, 「고
려후기 신유학 수용과 사대부의 의식세계」, ?한국사론?, 제41.42집, 서울대 국사학과,
1999, p. 345.)
60) ?西河集?, 「高麗西河林公行狀」, “公幼而英潁. 六七世遍讀百家. 悟祥精深. 及長述性理宗
會. 三才象數等書.”
61) 임병학, 「易學의 河圖洛書原理에 관한 연구」, 충남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5,
p. 15참조.
62) ?西河集?, 「序」, “至於剖析性命之原. 推衍象數之致. 玄關秘鍵. 玉鑰金匙. 隨手潁脫. 不遠
148 ?人文科學? 第94輯
을 깊이 연구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주역?과 직접 관련된 내용을 고찰해보면, 서하는 ‘궁리진성(窮理盡性
)’63)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로써 현자가 조정에 있는 것이 산림 사이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음을
알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이치를 궁구하고 본성을 다하는 오묘함이
니, 그것을 체로 삼아서 행할 사람이 각하가 아니면 누구이겠습니까?”64)
즉, 성리학의 중심 주제인 ‘천리(天理)’와 ‘인성(人性)’의 근거가 되는
‘성(性)’과 ‘리(理)’를 말한 것이다. ‘궁리진성’이란 우주자연의 이치인 천
리를 궁구하며, 또한 인간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선한 본성을 곡진히 한
다는 것으로 성리학의 본령을 정곡으로 찌르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산인오생에게 주는 서」에서는
“제가 옛날 현사들이 처세하는 것을 보니 구차하게 세속과 다르다 하지
도 않고 부화뇌동하려고 하지 않아 등용되면 임금의 스승도 되고 쓰이지
않으면 궁벽한 골짜기의 한 늙은이로 지낼 뿐이었습니다. 까닭에 동정어
묵(動靜語黙)이 모두 합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65)
라고 하였다. 여기서 동정어묵(動靜語黙)은 ?주역? 계사상편 제8장의 “혹
묵혹어(或黙或語)”66)를 인용하여 처세를 서술한 것으로, 동정과 어묵은 음
錙銖而餘事詩文.”
63) ?周易?, 說卦, 제1장에서는 “옛날에 성인이 ?주역?을 지음에 신명에 은밀히 참여하여
그것으로 시(蓍)를 낳았으며, 셋은 하늘 둘은 땅의 수에 의지하고, 음양의 변화에서 괘
를 세웠으며, 강유작용을 발휘하여 효를 표상하였으며, 도덕에 화순하고 의에서 다스
리며, 이치를 궁구하고 성을 다하여 명에 이르니라.(昔者聖人之作易也. 幽贊於神明而生
蓍. 參天兩地而倚數. 觀變於陰陽而立卦. 發揮於剛柔而生爻. 和順於道德而理於義. 窮理
盡性. 以至於命.)”라고 하여, 성리학의 핵심적 개념을 밝히고 있다.
64) ?西河集?, 권4, 「答同前書」, “以此知賢者之處乎廟堂也無異於山林間矣. 斯乃窮理盡性之
妙. 其體而行之者. 非閤下而誰耶.”
65) ?西河集?, 권4, 「與山人悟生書」, “僕觀古賢士之於世, 不苟異不苟同, 用之則爲帝師, 不用
則乃窮谷一叟耳, 故其動靜語黙 皆得其所矣.”
서하(西河) 임춘(林椿)의 철학사상 149
양의 변화원리에 근거하여 군자가 행동할 때와 움직이지 않을 때, 말할
때와 침묵할 때를 알아서 행한다는 의미이다. 또 「최문윤이 단주에 집을
마련하려 한다」에서는 “나아가고 처함은 진실로 천명이 있으니 가장 좋은
것은 앞서 정한데 달렸거니와 그 다음은 오로지 이미 어두워라 때에 맞게
동정하는 이는 드물구나.”67)라고 하여, 출처(出處)함이 동정(動靜)에 맞아
야 함을 말하고 있다.
또한 시에서도 ?주역?을 여러 곳에서 인용하고 있는데, 「정시랑의 서시
에 차운함」에서는 “비록 하수(河水)의 맑음도 기다렸건만, 한 세상은 마치
과객과 같았었다. 비(否)와 태(泰)는 각기 이치가 있는 것, 어이해 시책(蓍
策)으로 점칠 수 있으랴?”68) 라고 하여, 천지비괘(天地否卦· )와 지천태괘
(地天泰卦· )의 이치를 말하고, 「장검행(杖劒行)」에서는 “꼿꼿한 여섯 자의
몸으로, 한번 건곤(乾坤)안에 떨어졌네.”69)라고 하고, 「상국 이지명이 준
장구 2수를 차운함」에서는 “주의 옛 시가(詩歌) 300여 편이 있지만, 풍아
(風雅)가 망한 지금 누가 유경을 보완하랴! 후세의 작가들은 서로 달리기
를 경쟁하여, 문호를 굳게 닫고 건곤(乾坤)의 정화를 긁어모았네.”70)라고
하여, 중천건괘(重天乾卦· )와 중지곤괘(重地坤卦· )를 중심으로 64괘의 이
치를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다.
「미수를 그리면서」에서는 “스스로 복희 이전 사람이라 하니, 누가 ?주
역?의 역도(易道)가 동쪽으로 온 줄 알리.”71)라고 하여, 팔괘(八卦)를 저작
66) ?周易?, 繫辭上篇, 제8장, “天火同人卦에서 먼저는 울고 뒤에는 웃는 다고 하니, 공자
께서 말씀하시기를 군자의 도는 혹은 나아가고 혹은 거쳐하고 혹은 침묵하고 혹은 말
하니 두사람이 한 마음이니 그 날카로움이 쇠와 같으니 한 마음의 말이 그 향기가 난
과 같다.”(同人. 先號咷而後笑. 子曰君子之道. 或出或處或黙或語. 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라고 하여 ‘或黙或語’의 이치를 밝히고 있다.
67) ?西河集?, 권1, 「崔文胤將卜居湍州」, “出處信有命. 大上付前定. 其次固已昧. 鮮以時動
靜.”
68) ?西河集?, 권1, 「次韻鄭侍郞敍詩」, “雖俟河之淸. 百歲如過客. 否泰各有理. 豈用占蓍策.”
69) ?西河集?, 권1, 「杖劒行」, “骯髒六尺身. 一落乾坤內.”
70) ?西河集?, 권2, 「次韻李相國 知命 見贈長句 二首」, “周詩古有三百篇. 風亡雅缺誰復補由
庚. 後來作者競馳騖. 爭欲牢籠撑抉乾坤精.”
150 ?人文科學? 第94輯
한 복희씨를 언급하고 ?주역?의 도가 서쪽에서 왔음을 밝히고, 「2월 15일
밤달에 대하여」에서는 “공자가 만년에 저술을 남겨, 천년의 의심이 일조
에 풀렸다. ····· 건곤이 열려 비가 개고 바람도 잦고, 옥반같은 둥근달은
동쪽 하늘에 떠올랐다.”72)라고 하여, 공자가 만년에 ?주역?의 십익(十翼)
을 지어 천년의 의심을 하루 아침에 풀 수 있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일재기(逸齋記)」에서는
“구차하게 남에게 영합하지도 않고 구차하게 남과 뜻을 다르게 하지도
않아서 때에 맞게 물러나니, 백이가 아니면 숙제가 되고, 때에 맞게 나아
가니 고요모가 아니면 기가 된다. 한번 부침하고 한번 왕래함에 가서 스
스로 얻지 않음이 없는 자가 진실로 은현(隱顯)하는 것이다. 은둔해서는
도와 더불어 감추고 출세해서는 도와 더불어 행하는 것이다.”73)
라고 하여, ?중용?의 “군자는 중용에 의거하여 세상에 숨어서 알아주는
사람을 보지 못해도 후회하지 않으니”·“군자의 도는 널리 쓰이기도 하고
은둔하기도 한다.”74)와 동일한 은현관(隱顯觀)을 밝히고 있어, ?중용?의
심성론과 은현관을 깊이 있게 연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학문적 계통에 있어서도 ‘궁리진성’을 말한 편지는 원주에 은거하
고 있는 권돈례(權敦禮)에게 답한 것으로 임춘과 권돈례는 고려중기 유학
자 권적(權適)에게 그 학맥이 연결되는 인물들이다. 이인로에 의하면 임춘
은 백부인 임종비로부터 학문을 익혔다고 하는데, 임종비는 바로 권적의
문하에서 급제하였다. 권적은 예종 대에 송나라의 태학에서 수학하고 그
나라의 외국인 시험인 빈공과에서 급제한 인물로, 그가 송나라에 들어가
수학한 때는 이정(二程)의 문인들이 활동하던 시기로 직접 송으로부터 성
71) ?西河集?, 권1, 「有懷眉叟」, “自謂羲皇上. 誰知易道東.”
72) ?西河集?, 권2, 「二月十五夜對月」, “我向嶺南樓上適. 乾坤開霽微風緊.”
73) ?西河集?, 권5, 「逸齋記」, “必有不苟同不苟異. 時乎退. 不夷而齊之. 時乎進. 不皐而夔之.
一浮沈一往來. 無適而不自得者乃眞隱顯. 而隱與道俱藏. 顯與道俱行也.”
74) ?中庸?, 第11章, “君子. 依乎中庸. 遯世不見知而不悔.” “君子之道. 費而隱.”
서하(西河) 임춘(林椿)의 철학사상 151
리학을 익히고 돌아온 것이다. 권돈례와 임춘은 그러한 권적을 학문의 연
원으로 공유하며, 학문적 전통을 계승하는 가운데 성리학을 받아들인 것
이다.75)
또 한유와 류종원을 사숙하면서 고문에 대한 경도와 주렴계·정이천과
유사한 문학관을 드러낸 점을 들 수 있다.76) 그는 “오늘날 이른바 장옥(場
屋) 문장이라는 것을 취해 읽어보니 공교롭기는 하되 그리 어렵다고 말할
수 있지 않으니 진실로 배우들이 하는 말과 같았습니다.”77)라고 하여, 기
존의 장옥 문학의 폐단을 비판하고 고문창작을 강조하였으며, 「이학사에
게 올리는 계」에서는
“가만히 생각하건대 도는 글을 빌려서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술하
는 사람은 철인이요 짓는 사람은 성인입니다.”78)
라고 하여, 성인의 문장을 배워서 성인의 도를 밝히고자 하는 유학의 문
도합일(文道合一)을 근거로 고문가(古文家)의 ‘문이관도(文以貫道)’를 넘어
서, 도학가(道學家)의 ‘문이재도(文以載道)’에 가까운 문학관을 밝히고 있
다. 서하의 이러한 입장은 도(道)를 중시하고 문(文)을 경시하지 않으며 경
세치용(經世致用)의 도를 주장하는 고문가의 ‘문이관도’보다, 도는 의리와
덕성으로 본체이고 문(文)은 의리를 궁구하고 덕성을 함양하는 도구로 작
용이며, 중도경문(重道輕文)하고 도로 문을 대신한다는 도학가(道學家)의
문이재도에 가까운 것이다.79)
또한 성리학의 핵심인 심성론(心性論)에 있어서는 인의(仁義)를 중심으
75) 변동명, ?고려후기성리학 수용연구?, 서울: 일조각, 1995, p. 18.
76) 여운필, 「임춘의 생애에 대한 재검토」, ?한국한시연구?, 제4집, 한국한시학회, 1996, p.
235.
77) ?西河集?, 권4, 「與趙亦樂書」, “取時所謂場屋之文者讀之. 工則工矣. 非有所謂甚難者. 誠
類俳優者之說.”
78) ?西河集?, 권6, 「上按部李學士啓」, “竊以道假辭而傳. 述者明而作者聖.”
79) 양광석, 「古文家와 道學家의 文學觀 - 문이관도와 문이재도를 중심으로-」, ?유교사상연
구?, 제22집, 한국유교학회, 2005, pp. 443-444참조.
152 ?人文科學? 第94輯
로 밝히고 있는데, 「이학시 지명에게 올리는 서」에서
“덕(德)과 도(道)로 칼등을 삼고, 인(仁)과 의(義)로 칼끝을 삼고, 지(智)와
용(勇)으로 칼날을 삼고서는, 언행의 바름과 믿음직함으로 감싸고, 문장의
빼어나고 아름다움으로 차렸으되, 이것들을 궤에 넣어 간직하면, 그 몸을
보호하고 명철히 하는 것입니다. 이런 능력을 가지고 실행하면, 시대에
부응하여 능히 쓰일 수 있는 것입니다.”80)
라고 하여, 인간 본성에 바탕을 둔 ‘인성적 덕목’을 갖추는 일이 선행되어
야 하며, 그 필수적인 덕목이 덕(德)·도(道)·인(仁)·의(義)·지(智)·용(勇)이라고
하였다. 인(仁)·의(義)외에 덕(德)·도(道)·지(智)·용(勇)을 아울러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간주한 것은 바로 성리학적 선비관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윤사순 교수는 “공자의 삼달덕(三達德, 智·仁·勇)의 하나로 지
목된 ‘용(勇)’을 꼽은 점은 정주성리학의 덕목관과 조금 차이를 보이는 것
이다. 이것은 임춘 나름으로 지닌 독자적 특징이라 해야 할 듯하다. 고려
성리학의 한계는 반드시 한계라기 보다는 시대 환경과 학자들의 학문 성
향에 기초한 특징이라 함이 더 타당할 것이다.”81)라고 하여, 한국의 성리
학은 그 형성 초기부터 한국인의 ‘독자적 문화의식’을 키우는 자양소 역
할을 한 사상에 해당한다고 평가하고 있다.
한편 서하는 우주관·인간관 등의 철학적 문제에 대하여 이전 학자들에
서 볼 수 없었던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천지(天地)․조화(造化)․신명(神
明)․일기(一氣)같은 개념을 사용하여 우주 자연의 태초와 그 생성변화 및
궁극적 근원에 대한 사유를 보인 것이다. 특히 그의 기론(氣論)은 성리학
적 기론과 유사한 입장을 보인 점을 앞장에서 고찰해보았다.
이상에서 서하는 성리학의 형이상학적 원리와 심성론의 철학적 근거를
80) ?西河集?, 권4, 「上李學士(知命)書」, “以德道爲鋏. 仁義爲鋒. 以智勇爲鍔. 包之以言行之鯁亮. 飾之以文章之英麗. 柙而藏之. 所以保其身而明哲也. 持而行之. 所以應其時而能用
也.”
81) 윤사순, 앞의 논문, p. 13.
서하(西河) 임춘(林椿)의 철학사상 153
제공하는 ?주역?과 ?중용?에 연원하여 성리학적 용어를 스스럼없이 구사
하고 있으며, 학문적 계통에 있어서도 북송 성리학을 배운 권적의 문인으
로 초기 성리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Ⅴ. 맺음말
이상에서 고려 중기 학자인 서하 임춘의 철학사상에 대하여 고찰해 보
았다.
먼저 서하는 공자를 우리 성인으로 존숭하여 그 근본을 유학에 두고 불
교와 도교의 회통 내지 합일을 추구하였음 알 수 있다. 불교의 가르침과
?주역?의 가르침이 하나의 근본으로 귀일된다고 하였으며, 문학 작품 속
에서는 도교의 인물들을 자유롭게 표현하여 삼교의 회통을 구현한 것이
다. 그가 유학에 근본하였음은 ?주역?의 대도에 깊은 관심을 두고 이를
가장 중요시 하였으며, 고문가인 당대 한유와 류종원을 사숙하였고, 자신
의 실천적인 삶의 지표로 안분지족의 이상적 삶과 출사관에 있어서도 공
맹(孔孟)의 도에 근거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서하가 유학에 근본하여 유·불·도 삼교의 회통을 주장한 것은 현재 우리
가 살고 있는 시대 역시 회통과 화해의 철학을 요구하고 있음에 주목하게
된다. 동서 이데올로기가 해체되고, 중동의 민족주의가 무너져 내리고, 우
리나라는 남과 북의 대립이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으며, 다문화 사회가
도래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종교적·사회적·문화적으로 회통과 화해의
철학적 원리가 강력히 요청되고 있는데, 이에 서하의 철학사상은 좋은 시
사점을 주고 있다고 하겠다.
또 서하는 ?맹자?의 호연지기(浩然之氣)와 양기론(養氣論)에 그 연원을
두고 문장은 기를 주인으로 삼아야 한다는 문기론(文氣論)을 우리 문학사
에서 처음으로 주장하였다. 그의 문기론은 일체 만물이 기에 근거하여 발
154 ?人文科學? 第94輯
생된다는 주기론(主氣論)에 바탕한 것으로, 서하는 하나의 기운이 밤낮으
로 대행하여 음양의 변화가 이루어지고, 만물과 아울러 인간의 탄생도 기
에 의지하고 있는 주기론을 주창하였다. 이러한 기론(氣論)은 성리학자들
의 기론에 가까운 것으로 성리학적 소양을 갖추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서하는 성리학의 형이상학적 원리와 심성론의 철학적 근거를 제
공하는 ?주역?과 ?중용?을 근거로 성리학적 용어를 스스럼없이 구사하고
있으며, 학문의 계통에 있어서 북송 성리학을 배운 권적의 문인으로 초기
성리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한국유학사에 있
어서 성리학의 수용 시기와 관련된 것으로 특히 그가 저술한 ?성리종회?
와 ?삼재상수?가 ?서하집?과 같이 발굴된다면 한국유학사에 중요한 자료
가 될 것이다.
끝으로 서하가 국문학이나 한문학에서는 현존 최초의 가전체 소설을 창
작했으며, 고문복고운동을 실천적으로 펴고, 문학사에서 처음으로 문기론
을 주창하여 한문학의 대가로 평가하고 있지만, 철학사상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는 실정과 한국철학계에서 고려중기 학자에 대한 연구가 미흡한
현실에서 본 연구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주제어] : 임춘, 유불도, 회통, 문기론, 주기론, 성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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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자료, http://db.itkc.or.kr/index.(한국고전자료DB)
서하(西河) 임춘(林椿)의 철학사상 157
[日文抄錄]
西河林椿は、1148年に出生し、1186年に死亡した高丽中期の学者で享年39
世の短生が住んでいたが、李 仁老が编辑して最高执政者である崔瑀が1222年
に刊行した西河先生集今まで传なり国文学や汉文学はもちろん、歷史学で贵
重な资料で活用されている。
西河が现存最初の假传体小说を创作しており、古文復古运动を实践的に展
開して、文学史の最初の文气论を主唱して汉文学の大家として评价している
が、哲学思想の硏究はほとんどない实情と韩国哲学系で高丽中期学者に对し
た硏究が未洽一现实で本硏究の意义を見つけることができる。
本稿で考察した、彼の哲学思想を要约みると、まず、西河は孔子を私達圣
人として尊崇し、その根本を儒学に置き、佛敎の道敎の会通乃至合一を追求
している。佛敎の敎と周易の敎が同一の根本に归一になる。文学作品の中で
は道敎の人物たちを自由深く表现して三敎の会通を具现しました。
また、西河は、孟子の浩然之气と养气论にその渊源を置いて文章は气を主
にすべきだという文气论を私たちの文学史で最初に主张した。彼の文气论は
一体万物が气に根据て发生という主气论に根据したことで、西河は一つの气
运が昼夜を代行して阴阳の变化が成して、万物与人间の诞生も气に依支して
いる主气论を主唱した。气论は性理学者たちの奇论に近いもので性理学的素养を具备した。
そして、西河は性理学の形而上学的原理と心性论の哲学的根据を提供する
周易と中庸を根据に性理学的用语を気兼ねなく表现しており、学问の系统に
おいて北宋性理学を学んだ权适の门人で初期性理学を积极的に受用したこと
が分かる。これは、韩国儒学史における性理学の受用时期と关联されたもの
で、特に彼が著述した性理宗会と三才象数が西河集のように发掘場合韩国儒学史の重要な资料になるだろう。
158 ?人文科學? 第94輯
[キーワード] 林椿, 儒佛道, 會通, 文氣論, 主氣論, 性理學.
논문접수일: 2011.07.25 / 논문심사일 2011.08.17 / 게재확정일 2011.09.02
[저자연락처] phlim@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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