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조정신(崇祖精神)

서하 임춘

깊은산속 2009. 5. 27. 17:31

고려시대 대 문장가 서하(西河) 임춘(林椿)선생에 대하여 알아보자!.

선생의 생존 년대는 정확히 밝혀 진게 없다. 그러나, 여러 사료들을 참고해 보면 1150년(고려 毅宗4년) 전후하여 출생하였고 1196년 (丙辰, 明宗26년) 47세에 졸(卒) 한 것으로 추정 된다. 서하집의 기몽(記夢)에 보면 시(詩)로서 세상에 이름을 날린지가 30년이 되었다고 하는데, 15세부터 시명(詩名)을 떨쳤다고 하드라도 30년이면 45세쯤에 기몽을 쓴 것으로 예측된다. 이인로 선생이 임춘선생의 유고를 모으고 분류하여 6권으로 편집을 완성하고 “서하선생집” 이라고 이름을 붙인 시기가 1216년 이며 이인로 선생은 아들 비(秘)에게 판목에 새겨서 전하도록 하였다. 이인로 선생은 1220년에 세상을 하직하였다. 이후 이 원고가 당시의 실권자 최우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고 최우는 이 서하집을 제학원에 보내어 간행토록 하였는데 1222년에 판각이 완료되어 간행되었다. 이인로 선생은 서하집 편집을 완성하면서 임춘 선생이 세상을 떠난지 꼭,20년이 되었다고 하였다


선생의 시대적 배경은 ?.

1170년 의종(毅宗)이 보현원에 행차하는 때를 이용하여 정중부를 중심으로 한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켜 많은 문신들이 죽음을 당하고 의종은 폐위된 사건이 있었다.“정중부의 난”이다

정중부의 난이 일어난지 4년째인 1173년에는 김보당의 의종복위(毅宗復位) 사건이 발각되어 정중부의 난 때 보다 더 많은 문인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선생은 이때 몇 년간은 개경에서 곤궁하게 살았다. 선생은 1174년에 가족을 데리고 강남으로 이주 하였다. 상주(낙동) 밀양, 성주, 죽령, 단양, 강릉에 관련된 기록들이 서하집에 일부 소개 되고 있다. 선생은 1179년 봄 가족과 함께 개경으로 귀한 한다. 주머니는 고갈되고 병든 아내와 같이 개경에 돌아오니  송곳 찌를 땅도 없었다. 1182년 6원 과거시험에 응시 하였으나 낙방하였다.

선생은 무인난 이전에 득세한 문신 가문 출신으로 무인 정권에서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나아갈 생각 자체를 포기하게 된 다. 과거 시험을 세 번 보았으나 불운 때문인지 한 번도 합격을 하지 못 하였다. 무신정권에서는 어떤 기개도 펼칠 수 없음을 판단한 것이다. 이때가 선생의 나이 33세였다.

이인로 선생이 임춘 선생을 두고 청춘삼십 백의영몰(靑春三十 白衣永沒)이로고 한 것은 선생이 벼슬을 얻고자 하는 뜻을 버리고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게 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선생의 가계(家系)는 ?.

선조(先祖)는 태조가 건국할 때 한마(汗馬)의 공로가 있어 토지를 물려 받은 적이 있다.

고려사에 의하면 증조부(林彦)은 예부사랑으로 예종때 여진족을 물리친 공적이 있었다

조부(林仲幹)은 백부(林宗庇)의 글에 의하면 근시직(近侍職.현, 왕의 비서)에 종사 하였다.

백부는 당시 이름있는 재사(才士)였으며 선생의 부친(林光庇)역시 문명(文名)을 날린 인물 이였다. 선생은 7세에 육갑을 외웠고 경서를 통달 했으며 재능이 풍부한 신동 이였다.

선생은 백부의 총애를 받아 왔고 백부의 학문세계도 그대로 전수 받은 것이다.

선생의 집에는 윗대부터 지은 시(詩)가 삼천 수가 넘고, 선생의 문장으로 개경을 뒤흔들어 놓았고, 숫돌에 학문을 갈고 딱아 하늘과 땅 사이에 휘 둘러도 걸릴바가 없다고 했다,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나서 사람을 능욕했다고 하고, 하늘의 문창성이 속세에 숨어 버렸다고들 했다. 또한, 과거에 급제는 못했지만 명성은 천년을 떨칠것이라 든가 하는 것들은 선생의 학문 수준이 높고도 높음을 뜻 하는 말들이다. 선생의 학문은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 났지만 시대적으로 박복한 운을 안고 어렵게 살아온 것이다.


선생의 묘소및 관리는 ?.

선생의 묘소는 오랜 기간 실전해 오다가 1888년에 선생의 후손인 부안 임씨 학사공파 문중에서 발현하여 보존 관리 되고 있으며, 인천시 서구 마전동 마전초등학교에서 서북쪽으로 약 500m 지점에 있고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세일사를 모시고 있다


선생에 대한 요지(결론) ?.

과거에 수차 낙방하였으며, 1170년(의종 24) 정중부의 난 때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이인로(李仁老)·오세재(吳世才) 함순(咸淳) 조통(趙通) 이담지(李湛之) 황보항(黃甫抗)과 함께 강좌칠현(江左七賢)의 한 사람으로 시와 술로 세월을 보냈다.
한문과 당시(唐詩)에 능하였으며, 이인로가 그 유고(遺稿)를 모아 [서하선생집(西河先生集)] 6권을 엮었다.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에 시문(詩文)이 기록되어 있고, 두 편의 가전체 소설이 전한다. 예천 옥천서원(玉川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에 [국순전(麴醉傳)] [공방전(孔方傳)]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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