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조정신(崇祖精神)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2010.3.26)

깊은산속 2010. 3. 25. 09:29

[의사에서 순국까지]
하얼빈역 들어온 이토에 '대한독립 방아쇠' 당겨
"독립전쟁 수행 중 적장 포살 日법정서 재판 받을 수 없다"
만국공법 따른 절차 요구해
"죽은 뒤에도 韓·日 양국 협력하길…" 유언 남기고 형장의 이슬로

"코레아 우라!"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중국 하얼빈(哈爾濱)역에 '한국 만세'라는 뜻의 러시아 말이 울려퍼졌다. 일본 내각총리대신과 초대 조선통감을 지낸 68세의 노(老)정객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3발의 총성과 함께 플랫폼에 쓰러져 있었다. 역사(驛舍)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러시아 의장대의 군악 소리, 일장기를 흔들던 환영인파의 함성이 일순 사그라졌다.

거사의 주인공은 '대한국인(大韓國人)' 안중근(安重根)이었다. 일본제국주의의 조선 침략에 주도적 역할을 한 이토는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초프와의 회담을 위해 특별열차를 타고 하얼빈역에 들어온 직후였다. 안중근은 이토에 이어 그를 수행하던 가와카미 도시히코 하얼빈총영사, 모리 다이지로 궁내대신비서관, 다나카 세이타로 만철이사 등도 쓰러뜨렸다. 그리고 권총을 머리 위로 던진 뒤 '코레아 우라!'를 세 번 힘차게 외쳤다. 이토는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가슴과 옆구리, 배에 관통상을 입고 30분 뒤 숨졌다. 11시 40분 특별열차는 이토의 시신을 싣고 떠났다.

1909년 10월 26일 의거 직전 러시아 병사들이 도열해 있는 하얼빈역.

검은색 모직 신사복 위에 반코트를 걸치고 납작한 모자를 쓴 안중근은 이날 오전 7시 마차를 타고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러시아 군인들이 삼엄한 경계를 펼쳤지만 일본인을 가장해 역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안중근은 플랫폼이 잘 보이는 역 구내 찻집에 들어가 차를 시켰다. 열차는 오전 9시 하얼빈역으로 들어왔다. 30분 뒤 열차에서 내린 이토는 각국 사절과 인사를 나누고 도열한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했다. 안중근은 이토가 열차 쪽으로 되돌아올 때 찻집에서 뛰쳐나와 플랫폼으로 나섰다. 러시아 의장대 뒤로 바짝 붙어 선 그의 앞으로 이토가 다가왔다. 순간 안중근은 권총을 뽑아 사격했다.

거사 직후 안중근은 달려드는 러시아 헌병에게 현장에서 포박됐다. 역 구내 헌병대 파출소에서 취조받은 안중근은 오후 9시쯤 쇠사슬로 묶인 채 지금의 화위안가(花園街) 97호에 있던 일본 총영사관으로 이송됐고, 지하실 감옥 독방에 수감됐다. 이어 11월 1일 뤼순(旅順) 감옥으로 이송됐다.

안중근을 소재로 한 엽서.

30세 청년 안중근은 자신의 거사가 사적인 감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서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적장(敵將)을 포살(砲殺)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신은 일본 법정에서 일본 법으로 재판을 받을 수 없으며 만국공법(萬國公法·국제법)에 따라 전쟁포로로서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줄기차게 요구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이유를 묻는 일본 검찰관에게 그는 '명성황후를 살해한 죄' '동양평화를 깨뜨린 죄' 등 이토의 죄(罪) 15가지를 조목조목 열거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1907년 정미7조약을 통해 내정을 유린하는 등 이웃나라 조선을 강제합병하려 함으로써 동양평화를 위협한 것이 이토의 죄라는 것이다.

1910년 3월 10일 안중근 의사와 두 동생 정근·공근(왼쪽), 빌렘 신부(등을 보이는 사람)의 옥중면회 장면.

1910년 2월 14일 사형을 선고받은 안중근은 생의 마지막 날들을 옥중에서 자서전 '안응칠역사(安應七歷史)'와 한국·중국·일본이 공동번영을 이루는 길을 모색한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저술하는 데 쏟아부었다. 안중근은 일제의 서두른 사형집행으로 미완의 저작이 되고 만 '동양평화론'을 통해 "대저 합하면 성공하고 흩어지면 패망한다는 것은 만고의 이치"라고 전제한 뒤, 서양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동아시아를 지키려면 한·중·일 3국이 힘을 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안중근은 뤼순에 한·중·일 3국이 참여하는 동양평화회의를 설치할 것, 3국 공동은행을 만들어 공용화폐를 발행할 것, 3국의 젊은이로 공동군대를 편성하고 상대방의 언어를 가르칠 것, 한국과 청나라는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앞서 있던 일본의 지도 아래 상공업 발전을 꾀할 것 등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했다.

하얼빈 의거로부터 꼭 다섯 달 후인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뤼순 감옥에서 안중근의 사형이 집행됐다. "나는 동양평화를 위해 한 일이니 내가 죽은 뒤에도 한·일 양국은 동양평화를 위하여 서로 협력해주기 바란다." 서른하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달리한 안중근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조선일보 김경은 기자 (2010.3.25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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