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사(野史)

조선을 발칵 뒤집어놓은 스캔들 - 1

깊은산속 2010. 8. 10. 14:03
  - 조선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내세워 건국한 나라이다 보니 사회 모든 분야
가 몹시 경직되어 있었다. 특히 남녀문제는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금언에
서 보듯이 엄격하다 못해 잔혹하기까지 했다. 성 문제가 오죽 엄중했으면 단원 
김홍도는 예천현감 자리를 비워둔 채 일본으로 밀항하여 1년 동안이나 오매불
망 그리고싶어 하던 춘화를 실컷 그리고 돌아왔을까. 연애를 금기시하여 결혼
도 반드시 중매를 통해 이뤄졌는데, 대부분 일면식도 없는 상태에서 혼인을 하
다 보니 부부의 정이 돈독하지만은 못했다. 이러한 풍습은 우리 부모 대에까지 
이어져 축첩에 빌미를 제공했다. 남녀상열지사는 왕실이나 사대부 댁에도 만연
했다. 희대의 바람둥이 심프슨 부인과 사랑에 빠져 왕관을 버린 영국 황태자 
윈즈 공의 로맨스도 실은 양녕대군을 벤치마킹한 짝퉁이다. 조선의 스캔들 가
운데 왕실과 민가를 통틀어 대표적인 사건 몇 가지를 파헤쳐보고자 한다. -
1. 사랑에 빠져 왕관을 버린 양녕대군
☆ 연상의 경국지색 어리
  양녕대군 제(禔)는 태종 이방원의 장남으로, 왕자의 난에 가담하여 부왕이 
정권을 잡는 데 공을 세웠을 만큼 강인하고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어머
니는 원경왕후 민씨로 KBS 대하사극 「용의 눈물」과 「대왕세종」에서 최명길
이 잇달아 연기하는 인물이다. 문제의 발단은 태종은 개성에서, 양녕대군은 한
양에서 각각 정무를 맡고 있는 데서 비롯되었다. 한양 천도 준비가 덜 끝났기 
때문이었다. 자연 지는 태양 태종과 떠오르는 태양 양녕을 추종하는 세력이 갈
려 두 세력 간에 암투가 벌어졌다. 태종은 장남 양녕 외에 효령 충녕 성녕을 
두고 있어 그 아래에도 각각 독자적인 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다.
  아버지의 감시망을 벗어나 있다 보니 세자 양녕은 본연의 호방한 기질이 발
동되었다. 세자빈은 젖혀두고 천민들과 어울려 궐 밖으로 나다니며 엽색행각이 
잦았다. 그날도 젊은 내시 김기를 데리고 기방에 나가 한잔 걸친 뒤 동궁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양녕이 사직동의 한 대갓집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집 앞
에 가마가 멎더니 안에서 한 여인이 내렸다. 우연히 여인을 바라본 양녕은 심
장이 딱 멎는 것 같았다. 흐릿한 달빛 아래서도 빼어난 자태와 미색이 취기로 
몽롱한 양녕의 뇌리에 깊게 각인되었다. 여인은 이내 대문 안으로 사라졌다.
  “저 여인이 누구냐?”
  “어리(於里)라는 여인이옵니다.”
  “무엇을 하는 여인이냐?”
  “중추부지사 곽선의 애첩이온데, 조선 제일의 미색으로 소문이 자자하옵니
다.”
  ‘음, 곽선이 분에 넘치는 복을 누리는군. 내 어찌 저런 미색을 여직 모르고 
있었던고?’
  동궁으로 돌아온 양녕은 눈앞에 어리가 아른거려 며칠 동안 침식을 거를 정
도였다.
  어리는 곽선의 양아들 이승의 집에 기거하고 있었다. 그녀는 원래 곽선의 종
으로 있다가 미색이 출중하여 침실로 끌려 들어가 첩실이 되었는데, 서방이 늙
어 밤일이 없어지면서 스트레스가 잔뜩 쌓이던 중이었다. 어리는 그날도 방문
을 활짝 열어젖히고 눈 내리는 정원을 내다보며 불타오르는 정념을 다스리고 
있었다. 오래지 않아 후원이 떠들썩하더니 젊은 내시 김기가 들이닥쳤다.
  “세자 저하께서 수낭(繡囊. 비단주머니)을 보내시었소.”
  내시는 고급 비단주머니를 던지듯 건네주고는 두말없이 돌아갔다. 수낭은 여
인들이 사향이나 패물 등 값진 물건을 갈무리하는 애장품으로, 사내들이 노골
적으로 여자를 유혹할 때 보내는 정표였다. 수낭을 받아든 어리의 머릿속이 어
지러워졌다. 세자께서 자신을 어떻게 알고 보냈는지는 알 수 없으되, 세자 품
에 안기는 설렘과 사대부의 첩으로서 외간남자의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현실 사이의 갈등이었다. 그러나 어리는 한창 불타오르는 20대 후반, 세자를 
본 적은 없었지만 그의 품에 안기는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잠시도 수낭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며칠 뒤 내시 김기와 함께 권보의 첩 계지가 어리를 찾아왔다. 권보의 본처
는 어리의 남편인 곽선의 생질이었다. 계지가 은밀하게 귀엣말을 했다.
  “세자 저하께서 그대를 마음에 두고 만나기를 청하시네.”
  어리의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수낭을 받았을 때보다 훨씬 강렬
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첩실도 엄연한 사대부의 아낙, 쉽게 마음을 내줄 수는 
없었다.
  “내 이미 사대부의 아녀자거늘, 어찌 외간남자를 만날 수 있겠소?”
  내시 김기가 눈을 부라리며 끼어들었다.
  “감히 저하의 영을 거역하겠소?”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어리는 김기의 동행 요구를 거절한 뒤 양아들 이승에
게 전말을 알렸다. 이승도 몹시 당황할 뿐 묘수가 없었다.
  또 며칠이 지난 밤중이었다.
  “이리 오너라!”
  청지기가 문을 여니 악공 이오방이었다. 그는 양녕과 어울려 기방 출입을 하
거나 양녕에게 아녀자를 조달하는 악역을 맡고 있었다. 뒤에는 내시 김기와 미
복 차림의 양녕이 서 있었다.
  “세자 저하시다. 어리는 냉큼 나와 저하를 맞으렷다.”
  청지기는 우선 이승에게 고했다. 이승이 득달같이 달려 나와 눈 내린 맨땅에 
무릎을 꿇었다.
  “어리를 나오라 하라!”
  이번에는 부채로 얼굴을 가린 양녕이 엄히 명했다. 이승의 명을 받은 청지기
가 달려가 어리를 데려왔다.
  “고개를 들라.”
  횃불이 훤한 데서 보는 어리는 어둠 속에서 얼핏 본 처음 모습과는 비교도 
안 되게 아름다웠다.
  “음, 과연 조선 제일의 미색이로구나.”
  그 길로 어리는 양녕을 따라 악공 이법화의 집으로 갔다. 방안에는 주안상이 
차려져 있었다. 
  “가까이 와서 앉으라.”
  “세자 저하, 소인은 이미 남편이 있는 여자이옵니다. 어찌…”
  “네 감히 내 명을 거역하겠다는 것이냐! 내 네 미색이 어여뻐 오늘밤 취하
려고 하니 영광으로 알렸다.”
  그 한 마디에 어리는 양녕의 품속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맨살의 아리를 
품에 안은 양녕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여태껏 이리 부드러운 살결은 처음이었
다. 옷을 벗기 전에는 부끄러워하고 가벼운 거절의 몸짓을 지어 보이기도 했지
만, 옷을 벗고 양녕의 품에 안기자 요부기질이 뜨겁게 용솟음쳤다. 어리의 비
기(秘器)는 양녕의 남근을 잘근잘근 씹으며 전신을 빨아들일 듯 강하게 흡착했
다. 천하의 탕아 양녕도 그녀 속에서는 한낱 풋내기 샌님이었다. 양녕은 단 한 
번의 정사로 어리에게 혼을 쏙 빼앗기고 말았다.
  이튿날 아침 양녕은 어리를 동궁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세상의 이목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하룻밤 사이에 어리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날 오전 중으로 양녕은 이승에게 활을, 어리는 이승의 
아내에게 비단을 보냈다. 조선조의 이별의식이었다. 양녕은 국사를 젖혀둔 채 
동궁을 떠날 줄 몰랐다. 연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뒹굴며 식을 줄 
모르는 정염(情炎)을 불태웠다. 
☆ 춤추는 권력의 저울추
  양녕이 철저하게 입단속을 했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그의 행각은 태종
의 귀에도 들어갔다. 세종 때 편찬된 「태종실록」에는 양녕의 장인인 김한로
의 한 가노(家奴)가 무수리와 염문을 일으켜 심문을 받던 중 양녕의 행각을 발
설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권력의 속성을 아는 사학자들은 충녕의 장인인 심
온 일당이 고변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김대중․노무현이 권력을 잡자 수백 개
의 위원회를 만들어 장관급 위원장 자리에 측근들을 줄줄이 앉히고도 모자라 
함량 미달인 똘마니들을 300여 공기업의 수장과 임원 자리에 내려 보냈듯이, 
국본(國本)이 바뀌면 모든 부귀영화는 그 뒤에 줄을 선 패거리들의 차지다. 관
직에 나가면 직급에 따라 토지와 노비가 지급되는데, 유부녀고 처녀고 반반한 
노비가 눈에 띄면 마음대로 취할 수 있었던 조선조의 법도가 피비린내 나는 사
화와 당쟁의 알파요 오메가였던 것이다.
  보고를 받은 태종은 진노했다. 태종은 먼저 어리의 양아들 이승, 양녕을 모
시는 내시 김기, 양녕을 따라다니며 갖은 망나니짓을 주선한 이오방과 이법화 
등을 잡아들였다. 이승은 온 몸을 와들와들 떨면서 양녕이 어리를 납치해갔다
고 이실직고했다.
  “그런데도 너는 어찌하여 그와 같은 사실을 내게 알리지 않았느냐?”
  “권보가 만류하여 알리지 못했습니다.”
  권보는 애첩 계지를 보내 아리에게 양녕의 연정을 전하도록 주선한 인물이었
다. 태종은 이승에게는 태형을 가한 뒤 방면하고 양녕을 잘못 인도한 김기 이
오방 이법화는 사형에 처했다. 권보도 파직하여 귀양을 보냈다. 양녕의 행적이 
속속 밝혀지면서 조정이 크게 술렁거렸다. 태종의 처남이자 양녕의 외삼촌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가 왕자들을 제거하려다 태종의 진노를 사 귀양길에 오른 
후 사약을 받은 일이 있었다. 이 일로 태종은 양녕을 의심하고 있던 차였다. 
양녕이 다시 동생들을 죽이지나 않을까 두려워 처벌을 망설이던 태종은, 결국 
어리를 동궁에서 추방하고 양녕을 엄히 꾸짖은 뒤 반성문을 쓰게 하는 것으로 
사건을 덮었다. 
  한양으로 돌아온 양녕 앞에 스승 이내를 비롯한 측근들이 찾아와 부복했다. 
이내는 양녕을 통렬하게 비판한 뒤 비장하게 한마디 덧붙였다.
  “전하의 아들이 저하뿐인 줄 아십니까?”
  효령 충녕 성녕의 측근들이 세자 자리를 노리고 치열하게 암투를 벌이는 일
을 발설한 것이다.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역린(逆鱗)
이었다. 실록은 이때 이내와 측근들이 모두 소리 내어 울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충심도 어리에게 뿅 간 양녕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양녕
은 결코 어리를 잊을 수 없었다. 어리의 미모를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왔고, 그
녀의 매끄러운 살결과 전신을 빨아들이는 듯한 비법을 생각하면 애간장이 녹아
났다. 양녕은 거의 식음을 전폐했다.
  보다 못한 세자빈이 친정어머니와 상의하여 어리를 은밀하게 친정으로 불러
들였다. 양녕은 지옥에서 부처님의 구원이라도 받은 듯 기뻐하며 처가로 달려
가 두문불출, 어리와 불같은 정염에 빠져들었다. 세자빈의 친정에서 시앗과 즐
기는 전무후무한 폐행(弊行)이건만 양녕에겐 이미 어리를 능가하는 가치는 아
무것도 없었다. 세월이 흘러 어리가 아이를 낳자 양녕이 누이 정순공주와 경정
공주에게 유모를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유모를 구해준 두 공주에게는 즉각 양
녕을 반대하는 세력의 사주가 분주했다. 두 공주는 개성으로 달려가 어머니 원
경왕후에게 알렸다. 왕후는 경악했지만 덮어둘 수 없는 중대사라 태종에게 고
했다. 이야기를 들은 태종은 치를 떨며 세자빈과 양녕의 아들딸을 모두 동궁에
서 추방했다. 양녕의 장인 김한로는 유배형에 처한 뒤 사약을 내렸다. 어리에
게도 추방령을 내렸다. 양녕이 개성으로 달려와 알현을 청했으나 만나주지 않
았다. 
  한양으로 돌아온 양녕은 태종의 영을 거역하여 어리를 처가에서 내보내지 않
았다. 그리고는 작심한 듯 부왕의 처분을 강력하게 비판하는 서신을 올렸다.
  ‘전하께서는 많은 첩을 두고 계시면서 왜 제게는 금하시는 것입니까? 첩 하
나를 금하다가는 잃는 것이 많고 얻는 것은 적을 것입니다. 능히 천만세 자손
의 첩을 금할 수는 없을 것이니 잃는 것이 많으며, 겨우 첩 하나를 내보내는 
일이니 얻는 것은 적다는 것입니다. 김한로는 오로지 신을 기쁘게 했을 뿐인데 
그를 버리시니 이로써 공신이 위험해질 것입니다. 쫓겨난 세자빈은 잉태 중인
데, 식음을 전폐하고 있다 하니 무슨 일이 생기면 어찌하시렵니까?’
  해괴한 논리요 협박이었다. 어리는 사대부의 첩이기 때문에 왕이라 하더라도 
취할 수 없는 게 법도였다. 양녕도 이를 알면서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지엄한 왕명을 거역한 것이다. 편지를 읽던 태종은 분노로 온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태종은 마지막으로 양녕에게 근신을 명하는 강
경한 서신을 내렸으나 양녕은 듣지 않았다.
  태종은 드디어 결심을 굳혔다. 
  ‘세자가 황음(荒淫)하여 불의를 자행하고 있다. 후일 생사여탈권을 마음대
로 휘두른다면 그 폐단이 두려우니, 여러 중신들은 이를 살펴 바르게 시행하라.’
  왕명을 받든 의정부와 대간에서는 일제히 세자를 폐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태종은 세자 양녕을 폐하여 경기도 광주로 유배하고 대신들의 중의에 따라 충
녕을 세자로 책봉했다. 둘째아들 효령은 술을 한 모금도 못 마신다는 이유로 
세자에 책봉되지 못했다니 극히 지당한 결정이다. 얼마 후 양녕은 이천으로 이
배(移配)되었지만, 유배 중에도 수시로 탈출하여 사가에 나가 있는 어리와 뜨
거운 정사를 계속했다. 어리는 결국 보다 못한 태종의 명을 받고 목매 자결함
으로써 비련의 막을 내렸다.
출처 ; munjung13.com    글쓴이 ; 남성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