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신분의 벽을 넘지 못한 양녀의 사랑
세종 때 경상도 청송에 가이라는 양녀(良女. 양반댁 규수)가 있었는데, 어릴
때 부모를 잃고 혼자서 집안을 꾸려갔다. 그녀는 인근에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미색이 빼어났다. 가이의 집에는 부금이라는 사노(私奴)가 있었는데, 어찌나
성실한지 가이는 모든 일을 부금에게 의지했다. 부금은 일을 할 때나 가이가
나들이를 할 때나 그림자처럼 그녀를 따르며 극진하게 모셨다. 두 사람 사이에
는 저절로 사랑이 깊어졌다. 그러나 태종 5년(1405) 9월 22일 천민이 양녀에게
장가드는 것을 금하는 법령이 반포되어 이들의 결혼은 엄연한 위법이었다. 부
금은 가이의 적극적인 구애에도 불구하고 연모의 정을 억누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아가씨, 우리는 국법에 따라 사랑해서는 안 되는 사이입니다. 제발 천한
저를 잊으시고 적당한 혼처를 찾아보세요.”
“나는 어떠한 난관이 닥치더라도 부금과 결혼할거예요.”
“우리가 결혼하면 두 사람 다 살아남지 못합니다. 저야 죽어도 그만이지만,
아가씨같이 귀하신 분이 저처럼 천한 사노로 인해 목숨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가이는 부득부득 부금과 혼례를 올렸다.
이웃에서 손가락질을 하고 수군거렸으나 별일이 없는 가운데, 1년 뒤 가이는
옥동자를 낳았다. 부부는 더없이 행복했다. 그러나 어느 고루한 양반이 청송현
감에게 두 사람을 고변했다. 현감도 이미 알고 있었으나 고변이 없어 외면하고
있던 차에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현감은 즉각 경상도 관찰사에게 보고하고
두 사람을 경상감영으로 압송했다.
“양녀가 천민과 혼인한 것은 강상(綱常)의 죄를 저지른 것이다. 가이는 이
나라 양반의 명예를 더럽혔으니 이혼시켜 왜관의 왜인 손다에게 시집을 보내라.”
관찰사의 판결은 가혹했다. ‘강상의 죄’란 부모나 남편을 죽이거나 노비가
주인을 죽인 죄를 말하는 것으로 대역죄 다음으로 큰 범죄였다. 양반 남자들은
마음대로 천민 여인을 취하면서 양녀는 천민과 혼인할 수 없도록 했으니 기괴
한 국법이 아닐 수 없었다.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노비는 사람 취급을 못 받았다. 주인의 사유재산이므
로 죽여도 죄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가슴 속에서 움트는 사랑은 국법으로도
다스릴 수 없었으니, 양녀와 천민 사이에 로맨스가 싹터 비극적 종말을 맞은
경우가 허다했다. 성종 3년(1471) 11월에는 양녀 선비가 사노 지중과 결혼했다
가 교수형을 당한 기록이 있고, 현종 12년(1653) 5월에는 양녀 옥장이 사노 김
돌과 통정하여 처형된 기록이 있다. 가이에 대한 경상도 관찰사의 판결 가운데
왜인과 강제 혼인을 하도록 한 조치도 양반의 우월성을 보장하기 위한 잔인한
보복이었다. 조정의 허락을 받고 왜관에 집단거주하면서 생필품을 만들어 파는
왜인들은 조선의 노비보다 더 천하게 취급되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관찰사가
가이를 손다라는 왜인과 짝지어준 것도 선고 전에 미리 왜관을 조사하여 가장
못생기고 비루한 왜인을 고른 것이었으니, 조선조 양반들의 행태에 치가 떨린
다.
왜인 손다에게 강제로 시집간 가이에게는 지옥과 같은 나날이 계속되었다.
무지하고 간악한 손다는 날마다 가이를 두드려 패며 학대했다. 참다못한 가이
는 청송에 살고 있는 부금에게 몰래 편지를 보내 손다의 가혹행위를 자세히 설
명하고 자신을 구해달라고 요청했다. 부금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사랑하
는 가이가 왜놈에게 시집간 일만 해도 참기 어려운데, 섬 돼지가 감히 조선의
양녀를 학대하다니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부금은 이웃에 사는 이내근내에게
사실을 알리고 협조를 요청했다. 이야기를 듣자 오랫동안 가이를 알고 지내온
이내근내도 울분을 참지 못했다. 두 사람은 곧장 왜관으로 잠입하여 손다를 죽
이고 가이를 청송으로 데려갔다.
조정에서 허락한 왜인들의 유일한 집단거주지인 왜관에서 살인이 일어나자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가뜩이나 왜구의 노략질이 분분하던 터에 자칫 그들
을 자극하지 않을까 해서였다. 형조판서의 진두지휘 아래 즉시 수사가 진행되
어 진상이 밝혀졌다. 가이 부금 이내근내는 즉각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
다. 심문 결과는 세종에게도 보고되어 형량에 대한 재가를 받았다. 형조는 부
금에게는 참수형을, 가이와 이내근내에게는 교수형을 정하여 경상감영으로 이
첩했다.
“관찰사 나리, 소인에게 부금이 참수되면 시신을 안장한 뒤 형을 받도록 허
락해주십시오.”
관찰사는 국법에 크게 저촉되지 않는 한 사형수의 마지막 청은 들어주도록
되어 있는 관행에 따라 이를 허락했다. 옥에서 풀려난 가이는 옥사장의 허락을
받고 마지막으로 부금을 면회했다.
“미안하오. 저 때문에 아가씨까지 목숨을 잃게 되는구료.”
“부디 그런 섭섭한 말씀일랑 하지 마세요. 죽어서도 저는 서방님을 다시 만
날 것입니다.”
이튿날 부금은 참형을 당했고, 가이는 포졸들의 감시 하에 시신을 수습하여
지성을 다해 인근 야산에 묻어주었다. 처연한 모습으로 감옥으로 돌아온 가이
는 옥사장에게 마지막으로 간직하고 있던 옥비녀를 뽑아주며 부탁했다.
“제가 죽거든 그 사람과 합장을 해주십시오.”
옥사장은 고개를 끄덕여 가이의 청을 받아들였다.
세종 10년(1428) 9월, 드디어 가이에게 형을 집행하는 날이었다. 부금과 합
장을 해주겠다는 약조를 받은 터라 가이는 편안한 마음으로 형장을 향했다. 이
승에서 맺어질 수 없는 운명이라면 저승에서라도 인연이 맺어지기를 기대하는
마음 간절했다. 형장에는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국법의 지엄함을 훈
도하기 위해 형 집행일을 형장이 있는 지역의 장날로 잡았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으면 하라.”
경상관찰사가 엄숙하게 말했다.
“소인의 형을 집행한 다음에 부금과 합장을 해주십시오.”
관찰사는 좌우 판관들과 협의한 뒤 이를 허락했다. 가이는 관찰사를 향해 이
승의 마지막 절을 올렸다. 판관이 일어서서 판결문을 읽었다. 이어 가이의 목
에 밧줄이 걸리고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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