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사(野史)

조선을 발칵 뒤집어놓은 스캔들 - 2

깊은산속 2010. 8. 10. 14:01

2. 동성연애로 폐출된 세자빈 세종은 한글을 창제하고 과학발전을 주도하는 등 성군으로 추앙받고 있지만 성문제에 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자신은 아홉 명의 부인 외에 수많은 궁녀를 건드려 무려 28명의 자녀를 두고도 세자의 부부관계에 관여하여 엄청시러분 스트레스를 줬던 것이다. 문종이 제위 2년 3개월 만에 죽으면서 어 린 단종이 왕위를 잇고, 이어 수양대군이 이를 찬탈한 것은 모두가 세종의 잘 못된 성관(性觀)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첫 번째 세자빈 김씨는 세자의 사랑을 받기 위해 뱀의 정액을 말린 가루를 몸에 지니고 다녔다 하여 빈이 된 지 2년 만에 폐출되었다. 은밀하게 지니고 있던 주술의 징표가 임금에게 알려 진 걸 보면 세자빈 김씨 역시 궁중암투의 희생자가 아닌가 싶다. 훗날 문종이 되는 세자 향은 병약한 몸인데도 불구하고 학자들과 함께 집현전에서 밤이 이 슥하도록 학문에 정진했다 하니, 세자의 애정을 갈구한 김씨를 그 정도 일로 폐출까지 한 것은 너무 가혹한 처사 아닐까? 세자는 창녕현감 봉여의 딸을 두 번째 빈으로 맞아들였다. 세종 17년(1435) 동짓날이었다. 세종은 사직에 망궐례(望闕禮)를 올린 뒤 세자 및 문무백관과 어울려 밤늦게까지 푸짐한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한밤중, 세자빈 봉씨는 궁녀 소쌍을 불러들였다. 소쌍에게는 낮에 이미 폐물을 보내 환심을 사둔 뒤였다. 소쌍이 도착했을 때 봉씨는 술을 마시고 있었다. 열여덟 살에 세자빈으로 입궁 한 봉씨는 자주 술을 마셨다. 출입이 뜸한 세자를 기다리다 못해 외로움을 달 래느라 술을 가까이하게 된 것이다. 봉씨는 시중드는 궁녀들을 모두 문 밖으로 물린 뒤 소쌍에게 술을 권했다. 예의상 몇 차례 사양하던 소쌍은 봉씨가 내리 는 술을 거푸 받아마셨다. 향기가 입 안 가득 맴도는 백화주였다. 이내 취기가 돌았다. “내 오늘은 너와 함께 자려고 하니 명을 따르라.” 소쌍은 세자빈과 살을 맞대고 누웠다. 대식(對食)이 시작된 것이다. 대식이 란 궁궐에서 여자들끼리 벌이는 동성애를 뜻한다. 대식은 처음이었지만 두 여 인은 이미 남정네의 맛을 알고 있던 터라 이내 달아올랐다. 두 여인의 뜨거운 신음소리가 낭하에까지 울려 퍼졌다. 봉씨는 그날 이후 매일 소쌍을 불러들여 대식을 즐겼다. 소쌍의 뜨거운 입김은 시원찮은 세자의 방중술과는 비교도 안 되게 봉씨를 열락으로 이끌었다. 조선조 초기, 궁궐에는 500여명의 상주하는 궁녀와 출퇴근하며 허드렛일을 하는 500여명의 무수리가 있었다. 남자는 내금위 병사 200여명, 내시 100여명, 승정원을 비롯하여 숙직관원 100여명이 궁내에서 밤을 보냈다. 극히 자연스럽 게 남녀상열지사가 끊이지 않았다. 비빈들 간, 비빈과 궁녀 간, 궁녀와 궁녀 간에 대식사건도 끊임없이 일어났다. 내시들끼리도 동성애를 즐기는 자들이 있 었다. 심지어 비빈이 내시를 끌어들여 통정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대식은 세 종 대에 특히 많았다고 하니, 세종의 절륜(絶倫)한 정력에 여인들의 피가 끓어 오른 때문 아닐까? 빈의 침전을 찾지 않던 세자가 부왕의 엄명을 받고서야 동궁에 들자 소쌍은 한동안 불려올 일이 없었다. 그러던 중 봉씨에게 태기가 있다는 보고를 받자 세종은 크게 기뻐하며 봉씨를 중궁전인 교태전으로 불러들였다. 그러나 한 달 도 지나지 않아 봉씨가 유산을 했다고 고하자 세종은 크게 실망하여 봉씨를 동 궁으로 돌려보냈다. 세자는 다시 발길을 끊었고, 봉씨는 다시 소쌍을 찾았다. 이때 대식에 맛을 들인 소쌍은 봉씨가 교태전에 들어가 있는 사이 권 승휘의 사비(私婢. 사가에서 부리던 종) 단지와 대식에 빠져 있었다. 승휘란 세자의 후사(後嗣)를 위해 명문가의 규수 가운데서 뽑혀 들어온 후궁이다. 권 승휘는 세자가 후사가 없자 뽑혀온 세 명의 승휘 가운데 한 사람으로 후일 단종을 낳 는다. 세자는 봉씨보다 승휘들을 자주 찾아 봉씨의 외로움을 부추겼다. 소쌍이 늦게 도착하자 봉씨는 불같이 화를 내며 자초지종을 추궁한 끝에 전말을 실토 받았다. “나는 너를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데 너는 나를 이처럼 업신여기는구나.” 봉씨가 눈물을 흘리자 소쌍도 따라 울며 사랑을 맹세했다. 이날 두 사람의 대식은 어느 날보다 뜨거웠다. 봉씨의 집착이 너무 강해 잠시도 자리를 비울 수 없자 소쌍은 단지를 찾아가 하소연했다. 단지는 곧 상전인 권 승휘에게 이 일을 고했고, 세자의 사랑을 두 고 경쟁관계에 있는 권 승휘는 이를 세자에게 일러바쳤다. 나아가 권 승휘는 봉씨를 내몰고 세자빈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중궁전에도 그 사실을 밀고했다. 단종애사의 업보가 배태(胚胎)되는 순간이었다. 세자는 은밀히 소쌍을 불러 사 실을 확인했지만 덮어두었다. 이미 첫 번째 빈을 쫓아낸 마당에 이런 일로 두 번째 빈조차 폐출 당하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두 여인의 대식도 꼬리가 너무 길어 끝내 세종의 귀에까지 들어가고 말았다. 세종은 즉각 두 여인을 불렀다. “예, 지난해 동짓날 이후 남녀가 교접하는 것처럼 환애(歡愛)해왔습니다.” 소쌍의 대답에 세종과 세종 비 소헌왕후는 대경실색했다. 봉씨가 대식을 한 것은 자기가 아니라 소쌍과 단지라고 우겼지만, 세종이 세자까지 불러 재확인 하자 봉씨는 고개를 떨구었다. 봉씨는 이미 권 승휘를 투기하고 세자의 옷을 여종의 사가에 내린 데다, 태기가 있다고 했다가 한 달도 안 돼 유산했다 하여 불신을 사는 등 처신이 불명(不明)하여 세종의 눈 밖에 나 있던 참이었다. “빈궁을 즉시 폐출하라!” 궁궐을 쫓겨날 때 봉씨의 나이는 한창 물오르는 23세였다. 봉씨는 수치심을 이기지 못해 목매 자살했다. 권 승휘는 소원대로 세자빈으로 승격했지만 단종 을 낳은 지 7일 만에 숨졌다. 두 번째 업보인 단종애사를 불러오는 첫 번째 업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