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 시작

할머니' 여자의 마지막 이름'

깊은산속 2011. 9. 22. 21:13

[연극리뷰] 아름다운 꿈 깨어나서
할머니도 여전히 여자이고 여전히 사람이다
딸, 아내, 어머니의 세월 지나 그녀들은 삶을 완성할 것이다

여자로 태어나면 네 번의 인생을 산다. 딸, 아내, 어머니, 할머니가 그것이다. 딸일 땐 부모님의 사랑과 보살핌을 받는다. 아내가 되면 남편과 서로 의지해서 자식을 낳고 어머니가 된다. 자식들이 떠날 때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으로 바뀌며 갱년기라는 생의 환절기를 거친다. 여자마다 정도가 달라도 가혹한 시기다. 이 시기를 거치고 났을 때 여자는 타인에 의해 자신을 확인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누군가 '할머니'하고 부른다. 할머니? 맨 처음 그 이름으로 불릴 때의 느낌은 참담하다. 딸아! 여보! 엄마! 이렇게 불린 적도 있었지만, 그때의 첫 느낌은 따뜻하고 뿌듯했다.

할머니는 여자의 마지막 이름이다. 살아보지 못한 할머니의 삶은 미지수이고 그래서 불안하다. 할머니 다음엔 이름이 없다. 할머니로부터 이어져 왔을 자기 삶을 반추해도 내가 살아야 할 할머니는 감이 잡히지 않는다. 적어도 다른 할머니이길 바란다.

할머니는 여전히 여자이고 여전히 사람이다. 어떻게 여자인 할머니, 사람인 할머니로 잘살 수 있을까. 연극 '아름다운 꿈 깨어나서'(연출 임영웅)는 바로 이런 할머니들의 내면을 다뤘다. 어느 날 갑자기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혜숙(이현순), 서서히 죽어가는 파킨슨병을 앓는 남편을 간병하는 옥란(지자혜), 그리고 자살한 남편의 장례를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은 재분(손봉숙). 이들은 모두 예순일곱 살 양띠 동갑의 여고 동창생, 단짝이었다.

황혼기 세 여성의 꿈과 사랑을 다룬 연극‘아름다운 꿈 깨어나서’. 작가 윤대성과 연출가 임영웅이 만나 완성도 높은 앙상블을 빚어냈다. /극단 산울림 제공

재분의 초대로 함께 만난 할머니들. 50년을 거슬러 올라가 여고생을 추억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다. 어제처럼 또렷하고 생생하다. 그 남학생! 학교 앞 빵집. 그 남자 선생님! 추억은 아주 싱싱하다. 물만 주면 금방 싹을 틔울 씨앗들이다. 더군다나 되살아난 사춘기, 청춘기는 예전의 그것처럼 미숙하지 않다. 그래서 서로를 질투하고 시기하지 않는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임을 알기 때문에 누구라도 충분히 자기 자신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그것이 아름다움이라는 걸 믿기 때문이다. 거짓 행복으로 살았던 결혼생활(재분), 의지하고 살았던 남편이 배반처럼 세상을 떠난 뒤 홀로 남아 결혼한 딸의 출산과 육아에 호출되고(혜숙), 희망 없는 노역이 된 불치병 환자 남편(옥란), 이것이 예순일곱 살 할머니들의 현실 삶이지만 그 삶에 치이지 않아야 한다고 서로를 격려한다.

또 하나의 발견! 재분에겐 연하의 건실한 연인이 있다. 소박한 삶의 자유를 알고 예술도 즐기는 남자다. 할머니 재분은 완고한 인습과 통념을 깨고 그를 사랑한다. 지나간 예순일곱 해에 섞인 의존과 위선과 자기 억압과 우울을 모두 털고 일어서는 생의 혁명이다. 동창생 할머니들은 박수를 친다. 그리고 거기서 힘을 얻는다. 모든 시간에 스며 있는 청춘의 아름다움. 그것만이 딸과 아내와 어머니의 세월을 관통해서 할머니의 삶을 완성하리라 믿는다. 곰삭은 우정의 확인으로 연극은 끝나고, 객석의 할머니는 문득 자기 생의 빈 구석은 무엇일까, 질문하느라 일어서지 못한다.

▶10월 9일까지 산울림 소극장. (02)334-5915

# 조선일보 2011.9.22 (목) 문화 A25 에서 퍼온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