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사(野史)

임해군의 치정살인과 선조의 비호

깊은산속 2010. 8. 6. 11:05
선조 36년(서기 1603년) 8월 21일.
휴가 중이던 특진관(오늘날의 부총리) 유희서가 포천에서 살해당했다.
한밤중에 30여명의 도적떼가 말을 타고 몰려와 접근을 차단하고 유희서의 왼쪽 가슴을 찔러 죽인 것이다.
유희서는 전 영의정 유전의 아들로 당대 최고 명문 가운데 하나였다.
포천현과 경기감영이 발칵 뒤집혔다.
경기 감찰사는 즉각 현장에 출동하여 검안과 수사를 진두지휘했다.
급보를 받은 형조에서도 살인사건을 관장하는 형조참의가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출동했다.
포도청에 비난이 쏟아졌다.
도적떼가 횡행하도록 방치하여 사건을 예방하지 못했다는 추궁이었다.
포도대장 변양걸은 경기감영의 사건 이첩을 기다리지 못하고
즉시 종사관과 포도부장을 현장에 파견하여 조사해오도록 했다.
변양걸은 임진왜란(1592~1598)으로 흉흉해진 한양의 민심을 수습하고 치안을 바로잡는 데 많은 공을 세운 무관이었다.
‘단순히 도적떼가 저지른 짓이 아니군.’
종사관이 그려 올린 시형도(屍形圖)를 일견한 변양걸은 대뜸 칼을 잘 다루는 자의 소행임을 간파했다.
종사관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영감. 유희서 살해사건은 신중하게 다뤄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뜻인가?”
“살인사건은 유희서의 애첩 애생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자세히 아뢰어라.”
“유희서의 애첩 애생이 임해군과 통정하고 있다는 소문이 포천고을에 파다했습니다.”
“음~”
변양걸은 어금니로 신음을 씹어 삼켰다.
사건의 전말이 눈에 선했다.
따라서 사건을 파헤치다 보면 자신에게도 화가 미칠 게 뻔했다.
망나니로 온 조선에 악명이 자자한 임해군,
오죽하면 임진왜란으로 온 나라가 쑥대밭이 된 가운데도 똘마니들을 이끌고 노략질을 일삼다가
백성들 손에 잡혀 왜적들에게 넘겨지지 않았던가.
임진왜란으로 온 백성이 도륙을 당하는 마당에 홀로 압록강을 건너 목숨을 부지하려 했던 비겁한 임금 선조,
그는 여덟 비빈(妃嬪)이 낳은 자식들 교육에도 철저히 실패한 애비였다.
광해대왕을 제외한 자식들은 아들(14남)이고 딸(10녀)이고 하나같이 개망나니들이었다.
그 가운데도 임해군의 횡포는 끝간데를 몰라 폭행, 재물 약탈, 부녀자 겁탈을 밥먹듯 했다.
동생인 광해군에게 세자 자리를 뺏기자 난폭성은 몇 배 업그레이드되었다.
어쨌든 포도대장의 직무를 유기할 수는 없는 일,
변양걸은 은밀하게 유희서의 아들 유일을 부추겨 범인을 탐색하도록 했다.
유일은 서모 애생이 임해군과 밀통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이어
임해군의 가노(家奴) 설수가 똘마니들을 데리고 포천으로 달려가 유희서를 살해했다는 사실을 낱낱이 확인했다.
유일의 고변을 접수한 경기 관찰사는 즉각 범인들을 체포하여 공초를 받아낸 뒤 포도청으로 이송했다.
사건을 이첩받은 포도대장 변인걸은 즉각 형조에 보고를 올린 뒤 범인을 국문했다.
국문장에는 피살자 유희서의 아들 유일도 임석했다.
국문장의 삼엄한 위세에 눌린 범인 일행은 범행 일체를 순순히 자복했다.
패륜아 임해군의 똘마니답게 범인들은 임해군과 애생의 통정 사실에서부터
유희서의 항의를 받고 격분한 임해군이 유희서 살해를 명한 일들을 소상히 실토했다.
유희서를 직접 살해한 인물은 설수였다.
임해군의 경호실장인 설수는 검술이 뛰어난 칼잡이였다.
변인걸은 의정부에 자초지종을 보고하고 하회를 기다렸다.
“임해군의 범행이 명백하니 엄히 벌해야 합니다.”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 삼사의 상소에 이어 유림에서도 상소가 잇달았지만 선조는 침묵했다.
이때 포도청에 하옥되어 있던 유희서 살해종범 김덕윤, 춘세 및 황복이 동시에 암살되었다.
임해군의 손길이 이미 당직 옥리(獄吏)들에게까지 뻗힌 것이다.
이후에도 투옥된 임해군의 똘마니들은 차례로 비명횡사했다.
임해군의 범행사실을 입증할 증인들의 입이 원천봉쇄된 것이다.
사헌부에서 포도청 옥리들의 처벌을 요구하는 상소가 올라오면서
특진관 살해라는 문제의 본질이 흐려지고 분산되기 시작했다.
전옥서(교도소) 옥리들과 포도청 포졸들이 줄줄이 고문에 이어 축출되고
사건은 포도청에서 의금부로 넘겨졌다.
의금부로 이첩된 임해군의 똘마니 박삼석은 포도청에서 실토했던 범행내용 일체를 번복했다.
포동대장 변양걸과 유희서의 아들 유일의 무고라는 것이었다.
침묵하고 있던 임해군도 유일이 자신을 모함했다고 고소했다.
이에 선조도 드디어 속내를 드러냈다.
임해군을 불러 직접 진상을 캐물은 것이다.
자기편인 아비의 속내를 잘 알고 있던 임해군은 자신의 혐의를 전면 부정하면서
포도청에서 자기 똘마니들이 진술한 사실은 모두가 고문에 의한 거짓자백이라 아뢨다. 
짜고 친 고스톱이었다.
선조는 승정원에 영을 내려 포도대장 변양걸을 불러다 문초하라 지시했다.
종사관이 변양걸에게 유희서 살해사건 초동수사 내용을 보고하면서 덧붙였던 우려가 현실도 나타난 것이다.
변양걸은 끝내 파직되어 의금부에서 조사를 받았다.
조사의 유일한 수단은 고문이었다.
그러나 변양걸은 꿋꿋하게 사실대로 진술했지만
의금부는 막무가내, 선조의 의도대로 변양걸에게 장 90대를 가한 후 유배형을 내렸다.
포도청 종사관과 포도부장들도 줄줄이 고문 끝에 파직되었다.
의금부로 끌려온 유일도 가혹한 고문에 못이겨 아버지의 첩 애생과 임해군을 모함했노라고 실토했다.
유일은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할머니인 전 영의정 유전의 부인 김씨의 상소를 받은 선조의 사면으로
장 100대 후 유배형에 처해졌다.
이후에도 사건은 변양걸을 변호한 영의정 이덕형의 파직을 비롯하여
함량 미달인 임금 선조의 실정(失政)이 곳곳에서 조선의 국력을 소진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이덕형은 귀양간 변양걸에게 사약을 내리자는 상소를 차단하여 변양걸을 구명하기도 했다.
아비의 무조건적 비호를 업은 임해군 또한 비인간적인 만행을 멈추지 않았다.
임해군은 광해대왕 즉위 후 반정을 도모하다가 잡혀 유배 끝에 사약을 받고 사악한 일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