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사(野史)

조선을 발칵 뒤집어놓은 스캔들 - 13

깊은산속 2010. 8. 10. 13:24

13. 열녀문을 하사받은 기녀 일선 일선은 미천한 관노의 딸로 태어나 함경도 단천군 관아에서 어머니와 함께 허드렛일을 하다가 타고난 화용월태(花容月態) 덕분에 군수의 눈에 띄어 일약 관기로 뽑혔다. 일선은 관노로 자랐기 때문에 학문은 깊지 못했지만, 다행히 천부적인 재주가 있어 관기로 뽑힌 뒤에 배운 거문고 솜씨는 일품이었다. 일선 의 나이 열여섯에 기만헌이 단천군수로 부임해왔는데, 그는 약관이 갓 넘은 아 들 기인을 데리고 왔다. 기인은 일선을 보자마자 그 매혹적인 자태에 단번에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 그녀는 시골 여인답게 행동거지는 매우 조신하면서도 단아한 용모에서는 염기 (艶氣)가 배어나고 있었다. 일선은 관기로 발탁된 뒤에도 군수 관사의 가사 일 을 도와주고 있었는데, 자연 기인과 자주 마주치면서 그녀도 기인의 훤칠한 체 구와 세련미를 은근히 흠모하게 되었다. 춘향과 이몽룡 얘기가 아니라도 예로 부터 사또의 아들이 관기와 사랑에 빠진 예는 빈번했으니, 꼬장꼬장한 남명 조 식도 부친이 산천군수로 있을 때 관기와 사랑에 빠진 적이 있었노라고 문집에 쓰고 있다. 기인은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공부에 진력하고 있었다. 하루는 밤늦게까지 책을 읽고 있는데, 어디서 거문고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마침 공 부를 마치려던 참이라 기인은 훤한 달빛을 헤치며 거문고 가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소리는 멀리 냇가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풀숲을 헤치며 나아가자 누군 가 냇가 바위 위에서 거문고를 타고 있었다. 마치 항아(姮娥. 달에 사는 선녀) 가 하강한 듯 거문고 탄주 삼매경에 빠져 있는 사람은 바로 일선이었다. 기인 은 곡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헛기침을 하며 바위 위로 올라갔다. 일선은 화들 짝 놀라 거문고를 바위 위에 내려놓고 황급히 일어서 인사를 올렸다. “일선이로구나. 솜씨가 아주 훌륭하구나.” “과찬이시옵니다. 이 밤중에 어인 일로…” 흠모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미 장가를 든 기인은 대하기가 매우 어려운 사람 이었다. “글공부를 하던 중에 네 거문고 소리에 이끌려 예까지 왔노라.” “송구하옵니다. 소인이 서방님의 공부에 방해가 되었나 봅니다.” “아니, 아니다. 막 공부를 마치려던 참이었다. 그보다 네 거문고 솜씨를 한 번 더 감상하고 싶구나.”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서투옵니다.” “아니다. 그만하면 한양의 일류 기녀에 못지않다. 한 곡만 더 듣자꾸나.” 솜씨가 좋건 나쁘건 뉘 영이라고 거역할까. 일선은 거문고 줄을 다시 한 번 고른 뒤 연주를 시작했다. 막 주법 공부를 마친 곡으로 가장 자신 있는 「매화 삼농(梅花三弄)」이었다. 연주가 시작되자 기인이 품속에서 단소를 꺼내더니 따라서 불기 시작했다. 「매화삼농」은 원래 거문고와 퉁소의 합주곡으로 기인 에게도 익숙했다. 일선은 귀하신 서방님이 단소로 장단을 맞추자 마치 합환(合 歡)이라도 하는 듯 가슴이 떨리기 시작했다. 남녀의 합주는 때로는 청풍이 불 듯 고요히 조화를 이루다가 때로는 하늘에서 별이 쏟아져 내리듯 격렬하게 어 울렸다. 이윽고 연주가 끝나자 기인은 팔을 벌려 일선을 안았고, 일선 또한 오 랜 연인을 만난 듯 스르르 기인의 품속으로 무너져 내렸다. 먼발치에서 아침저 녁으로 바라보며 얼마나 사모하던 서방님이던가. 이게 정녕 꿈은 아니겠지? 일 선은 온 세상을 얻은 듯했다. 기인은 조심스럽게 입술을 붙이는 한편, 한 손으 로는 일선의 치맛자락을 헤집었다. 달빛이 훤하게 쏟아져 내리는 바위 위에서, 일선은 그렇게 처음으로 남자를 맞아들였다. 일선은 그때까지 남자를 받지 않 았던 것이다. 단천에서 일선과 꿈같은 2년을 함께 지내던 인조 17년(1639), 기인은 식년시 (式年試)에서 진사 3등으로 과거에 합격했다. 진사시에 합격한 사람은 성균관 에 들어가 대과시험을 위해 공부해야 한다. 기인은 뜨거운 마지막 밤을 보내고 한양으로 올라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일선은 내처 울면서 마운령 아래까지 사 랑하는 서방님을 배웅했다. “네 나이 꽃다운 청춘이니 새 낭군을 맞아 행복하게 살도록 하거라.” “서방님은 어이하여 그리 무정한 말씀을 하십니까? 소녀는 죽어도 서방님만 섬길 것입니다.” “네 정녕 그리 하겠느냐?” 기약 없는 길을 떠나면서 차마 기다려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 나 내심으로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일선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싶지 는 않았다. 일선은 대답 대신 손가락을 깨물어 자신의 비단 소매에 언문으로 글을 썼다. ‘내 마음 변치 않으면 이 글 또한 지워지지 않으리.’ 이에 기인은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잘라 동심결(同心結)을 맺었다. 죽을 때 까지 한마음으로 변치 말자는 굳은 약조였다. 두 사람이 부둥켜안고 슬피 울자 기인을 수행하는 노비들도 따라 울었다. 일선의 애타는 그리움이 켜켜이 쌓이기 시작했다. 훗날 「구운몽」의 작가 서포 김만중은 이즈음 일선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아침에도 낭군이 가신 길을 바라보고 해질녘에도 낭군이 가신 길을 바라보고 보고 또 보아도 낭군은 보이지 않아 임 그리며 하염없이 서성대고 있네.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있는 기인도 일선을 잊은 날이 하루도 없었다. 그러나 대과 급제가 쉽지 않아 일선을 만날 날을 기약할 수 없는 가운데 세월만 흘러 갔다. 매일 서방님과 나누어 가진 동심결을 꺼내 보던 일선은 어느 날 상자를 열고 동심결을 보다가 기겁을 했다. 동결심이 하얗게 변해 있었던 것이다. 간직하고 있는 동심결이 하얗게 변하면 상대방에게 변고가 생겼음을 의미한다. 불안에 떨고 있는 일선에게 서방님의 부고가 날아들었다. 청천벽력이었다. 일선은 반 은 넋이 나간 채 한겨울 삭풍을 헤치며 한양으로 올라갔다. 시댁에 도착한 일 선은 빈소에서 절을 올린 뒤 섧게 곡을 했다. 시어머니와 기인의 본처는 일선 을 매우 홀대했다. 기인이 일선을 너무 그리워한 나머지 상사병으로 죽었다는 것이었다. 일선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삼년상을 모신 뒤에야 단천으로 내려 왔다. 단천으로 내려온 일선은 다시 관기로 일하기 시작했다. 기인이 정식 첩실로 맞아들여 기적에서 빼내주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날 관북관찰사가 군정을 순 시하기 위해 단천에 내려왔다. 그날 저녁 군수는 관찰사를 위해 연회를 베풀었 는데, 관기를 점고하던 관찰사는 일선을 한 번 보고는 눈을 떼지 못했다. 공직 생활을 하는 동안 숱한 기생을 품어봤지만 일선 같은 미색은 처음이었다. 이윽 고 연회가 끝나자 관찰사는 일선을 지목하며 수청을 명했다. 그러나 일선은 몸 이 아프다는 핑계로 이를 거절했다. 관기가 지체 높은 사대부의 수청을 거절하 면 최고 사형까지 받는 지엄한 시절이었으나, 일선에게는 서방님을 향한 일편 단심이 더 중요했다. 군수가 나졸을 시켜 억지로 잡아가려 하자 일선은 우물로 뛰어들었다. 대경실색한 나졸들이 일선을 구해내자 관찰사도 미련을 거두었다. 세월은 흘러 현종 6년(1665), 김만중이 29세의 나이로 예조좌랑 벼슬에 있을 때였다. 단천군수로부터 절부(節婦. 정절이 높은 부인)를 포상해달라는 장계가 올라왔다. 절부로 이름이 오른 사람은 일선으로, 단천군에 소속되어 있는 관기 였다. 장계에는 일선의 행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일개 기생이지만 포상 을 요청할 만한 내용이었다. 김만중은 일선과 관련된 시를 많이 남겼는데, 모 두 이때 일선의 행적을 기록한 장계를 보고 감동을 받은 데서 연유했다. “미천한 관기에게 무슨 포상을 내린단 말인가!” 예조판서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김만중이 공손하게 의견을 개진했다. “대감, 절개를 지키는데 어찌 신분의 고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관기의 신분으로 이토록 굳게 절개를 지켰다면 오히려 가상한 일 아닙니까?” 결국 이 일은 예조 당상관들의 논의를 거쳐 현종에게 상주되었고, 현종이 이 를 윤허함으로써 단천 관기 일선에게 열녀문이 내려졌다. 일선은 열녀문을 하 사받고도 몇 년을 더 살다가 노환으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