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사(野史)

신립 장군과 조령관문

깊은산속 2010. 8. 10. 09:21

"신립신 장군이 과거를 볼라고 한양으로 올라가는데, 새재고개 중간에서 고만
에 해가 꼴딱 넘어갔데여."
엄마는 이야기 대장이었다. 
스물다섯의 姿色 빼어난 靑孀.
엄마와 둘이 살던 우리집 사랑방에는 저녁마다 집안 형님들이 모여들어 밤이 
이슥하도록 엄마의 이야기에 넋을 놓곤 했었다. 가은면 성저리 우리 의령남씨 
집안은 명절 때 집집마다 돌아가며 次例次例 차례(茶禮)를 같이 지내는 '元'
字 돌림 남자 형제만 16명이었으니, 우리 일가의 위세는 가히 불가촉이었다.
해마다 초겨울이 되면 벌어지는 진풍경이 하나 있었다.
집안 형님들이 하루 날을 잡아 산에서 소깝을 한 지게씩 지고 내려와 우리집
마당 한켠에 차곡차곡 쌓아놓았는데, 그 소깝더미는 한해 겨울 땔감으로 충분
한 양이었다. 혹 모르는 사람을 위해 설명하자면, 소깝이란 소나무 가지를 땔
감으로 사용하기 위해 적당한 크기로 잘라놓은 것이다. 형님들은 매일 나무
하러 산에 올라가면 자신의 짐을 다 꾸린 뒤 우리집에 가져다주기 위해 별도
로 소깝 무더기를 쌓아두었다가 날을 잡아 한목에 져다주곤 했던 것이다. 그
소깝더미의 주인을 잘 알고 있는 동네사람들은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다.
엄마는 외모도 빼어났지만 노래솜씨도 탁월하여 군내 콩클에서 솥이며 냄비를
휩쓸어오곤 했었다. 다들 일가붙이인 가운데 타성받이 한 사람도 형님들의 묵
시적 동의 하에 우리 사랑방에 드나들었다. 6·25 상이군인인 그는 미제 축음
기를 하나 가지고 있었는데, 당시 한창이던 유행가를 틀어 형님들의 마음을 사
로잡았던 것이다. 엄마는 한두 번만 들으면 가수와 똑같이 노래를 불러 한창 
피끓는 청년인 형님들의 심금을 울렸다. 집안 형님들이 번갈아 드나들며 스스로 
우리 집안일을 보살펴준 건 순전히 엄마의 여성적 매력 덕분이었다. 엄마는 몇
년 못 가 그 축음기 주인과 동티가 나서 내 인생행로를 바꿔버렸다.
그 가운데도 형님들의 마음을 가장 강력하게 사로잡은 건 엄마의 이야기 솜씨
였다. 견훤과 신립 장군 등 고향에 얽힌 역사적 전설은 기본이었고, 저녁마다
온갖 신소설의 가슴 저리는 애환을 들려주어 좁은 사랑방은 그야말로 선착순
이었다. 주인공에 따라 때로는 굵직하고 때로는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이야기
를 풀어가는 엄마의 솜씨는 요즘 활약했더라면 딱 공중파TV 고정출연級 구전
동화 구술가다.  
엄마의 이야기에 나오는 신립신 장군은 나중에 역사를 알고보니 신립 장군이
었는데, 엄마는 언제나 신립신 장군이라 했다. 연유는 엄마 생전에나 이후에
나 알아보지 못했다. 그 신립이 22세에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올라가던 중
날이 저물어 산길을 해매다가 멀리서 깜빡이는 불빛을 보고 찾아가 귀신을
처치하고 한 처자를 살려준 전설은 문경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는 내용이다.
엄마 이야기 속의 난리는 바로 임진왜란이었다. 
그때 처자가 '목숨을 살려주셨으니 하룻밤 소녀를 취하시옵소서' 하고 몸을
許했으나 신립이 이를 거절했다는 대목에서는 열이 받친다. 꼴딱, 우쒸!
어쨌거나 진주의 뼈대있는 집안 선비로서 신립의 고결한 덕목이 엿보이는 대
목 아닌가 한다. 날이 밝아 신립이 한양으로 떠나려는 찰라, 처자가 신립을 
불러 돌아보니 치마를 뒤집어쓰고 지붕에서 뛰어내려 한많은 청춘을 마감했
다. 자신 역시 삑다구있는 집안의 규수로서 외간남자에게 함부로 몸을 허한
허물을 스스로 懲治했음이리라.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대재앙 뒤에는 항용
이처럼 안타까운 스토리가 주루룩 생겨나기 마련이다. 죽은 자보다 헐썩 더 
고통스러운, 살아남은 자들의 억지춘향식 생존 당위성이다.
이 전설은 正史와 뒤섞인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각중에 삼도순변사에 제수
되어 500여 징집병을 이끌고 문경새재로 내려온 신립에게 처자귀신이 나타
난다. 조령관문은 守勢가 불리하니 충주 達川으로 가서 배수진을 치라는 현
몽이었다. 이에 따라 신립은 충주로 후퇴하여 충주목사가 거느리고 있던 8천
정예병을 이끌고 달천에 배수진을 쳤으나, 고니시 유키나가의 1만 5천 왜병
에게 몰살당하고 만다. 이에 신립은 탄금대에서 남한강에 몸을 던져 나라를
지키지 못한 장수로서 최후의 책임을 진다.
문경면 면서기 시절, 내가 제1관문 주흘관 안쪽 동네인 상초리를 담당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그때 상초리에는 30호 내외가 살고 있었던 걸로 기억된
다. 그때까지 주흘관은 史蹟으로 지정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흐려 아무나 그 위에서 술판을 벌이곤 했다. 한날은 누에고치
공판 일을 끝내고 고치 검사원과 함께 바로 그 주흘관 위에서 술판을 벌였
다. 닭백숙을 비롯하여 푸짐한 안주가 상굿도 기억에 남은 걸로 봐서 이장
의 은밀한 초대를 받고 검사원을 꼬셔서 딜고갔던 게 아닌가 한다.
거기서 어릴 때 엄마한테 들은 신립 장군의 안타까운 일화를 모조리 들려주
었다. 주흘관의 역사적 의미조차 모르고 있던 검사원은 내 얘기에 혹하여
각중에 존경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문경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평범한 얘기에 말이다. 아마도 상초리 고치 등급이 한두 등은 더 
올라가지 않았나 싶다. 
그때 술에 취해 관문 중앙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왜놈들을 향하여 총 
공격하라!'고 외치던 객기가 조금은 열쩍게 떠오른다. 이 天險의 요새를 버
리고 死地인 달천으로 도망간 신립 장군을 원망하는 마음이 가득했으니 말
이다.
존경하는 한 出鄕인사가 <주간문경>에 '관문을 볼 때마다 신립 장군이 야
속하고 원망스럽다'는 칼럼을 실었다. 문경사람으로서 누구나 가지는 일
종의 애향심이라 할 수 있으니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런 생각마저 없다면
史跡을 보는 안목이 의심스러울 일 아닌가. 
그러나 면서기 시절 객기를 부리던 나도 그 출향인사도 신립 장군을 원망
하는 마음은 오해에서 비롯되었다. 지금처럼 견고한 관문과 함께 성이 축
조된 건 임진왜란은 물론 병자호란까지 끝난 숙종 34년(1708년)이었으니 
말이다. 더구나 3관문인 조령관은 남쪽에서 성문을 잠그도록 축성되어 있
다. 즉, 북쪽에서 침공하는 적을 막기 위한 성곽이란 뜻이다. 주흘관과
조곡관 같은 훌륭한 요새가 있었다면 백전노장인 신립 장군이 왜 이를 버
리고 아무런 방어조건도 갖추지 못한 달천에 배수진을 쳤겠는가.
기마에 통달한 신립 장군은 왜군을 드넓은 평지에서 기병전으로 박살내려 했
다. 함경도 온산부사로 있을 때는 여진족 니탕개가 침범해오자 이를 무찌른
것으로도 모자라 본거지인 만주까지 쳐들어가 소굴을 초토화하고 돌아왔을 
정도로 기병전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그러나 신립 장군은 조총의 위력을 미쳐 
몰랐다. 8천 병력으로 달천에서 고니시의 1만 5천 정예병과 맞선 신립은 분전
했다. 수적으로나 무기로나 절대적 열세였지만, 조선의 병사들은 하나같이 목
숨을 걸고 용맹스럽게 맞섰다. 결과는 전멸이라는 뻔한 귀결이었지만, 고니시
가 본국에 '7만 조선 정예병과 맞서 고전 끝에 물리쳤다'는 장계를 올린 데서
도 엿볼 수 있듯이 신립 장군의 배수진은 조선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결단이었
던 셈이다. 하긴 현재와 같은 견고한 성곽이 있었다 한들 며칠이나 더 버틸 수 
있었겠는가.
이제는 주흘관과 조곡관을 볼 때마다 과거보러 한양 가던 젊은 신립과 처자
의 지조 높은 전설을 우러르며, 신립 장군의 원혼을 정중하게 가슴에 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