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사(野史)

조선조 500년의 권력투쟁

깊은산속 2010. 8. 6. 11:16

 

 

세종 대에 이르러 안정을 찾은 조선 정계는 수양대군의 왕위찬탈로 진탕이 되었다.
최영, 정몽주를 죽인 뒤 고려를 거꾸러뜨리고 
잇단 왕자의 난으로 조선천지를 피바다로 만든 정안대군(태종)의 망령이 되살아난 것이다.
고려에 반역한 무리, 
정안대군의 살상극에 뇌동한 무리, 
수양대군의 칼부림에 앞장선 무리를 통틀어 훈구파라 이른다.
국가발전에 기여한 공훈은커녕 명분조차 없는 포악무도한 간신배들이다.
우리는 정인지, 신숙주 등 세종의 총애를 받던 석학들이 
단지 견해차로 수양대군 편에 섰다가 높은 벼슬에 올라 나름대로 통치에 업적을 남겼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정인지는 사육신이자 절친이었던 박팽년의 아내를,
신숙주는 단종 복위를 꾀하다 처형당한 조완규의 아내와 딸을 노비로 들여 性노리개로 삼았다.
한때 동료였던 고결한 선비의 처와 딸 모녀를 섹스 파트너로 삼은 희대의 패륜아 신숙주,
그는 뻔뻔스럽게도 단종의 왕비 송씨까지 노리개로 요청했다가 수양대군으로부터 거절당하기도 했다.
오죽하면 금새 맛이 가는 녹두나물을 숙주나물이라 명명했을까.
수양대군이 왕권찬탈에 협조한 대가로 공신첩지를 내린 역도는 무려 2300여 명이었으며,
공신은 대를 이어 부와 권력과 노비를 승계했다.
뿐만 아니라 공신들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어도 모두 면죄되었다.
일례로 홍윤성은 자신을 길러준 큰아버지가 벼슬자리를 청하자 논 20마지기를 뇌물로 요구했다가 거절당하자
큰집으로 찾아가 큰아버지를 때려죽였지만 묵과되었다.
이후 연산군과 광해대왕을 쫓아낸 역도들도 공신에 올라 조선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이처럼 썩어빠진 훈구파에 맞서 청렴한 정치를 도모하려던 무리가 사림파였다.
조광조에서 정약용을 거쳐 김옥균에 이르기까지 사림파의 공적은 혁혁했지만
훈구파의 반격 또한 만만찮은데다 
자리를 보전하기 위한 임금의 양다리 걸치기까지 겹쳐 義보다는 利가 앞서는 경우가 많았다.
무엇보다 치명적인 일은 선조 이후 권력을 잡은 사림파간의 이전투구였다.
사림을 피로 물들인 4대 士禍에 이어
끝내 조선을 망국으로 이끈 당파싸움은 모두 사림파 사이에서 일어난 비극이었다.
당파싸움의 발단은 을해당론이었다.
선조 8년(1575년) 3사의 인사권을 가진 이조 전랑 자리를 두고
사림은 김효원을 지지하는 동인과 심의겸을 지지하는 서인으로 갈렸다.
김효원의 집이 한양 동쪽 건천동에, 심의겸의 집이 서쪽 정동에 있기 때문에 붙여진 당명이었다.
선조는 김효원과 심의겸을 지방관으로 좌천시킴으로써 당쟁을 무마하려 했지만,
권력과 이권에 맛을 들인 사림의 암투는 이미 브레이크가 듣지 않고 있었다.
               ※ 이조 전랑 ; 이조의 정랑(정5품)과 좌랑(정6품)을 함께 이르던 말
당파싸움의 백미는 선조 24년(1591년) 일본에 다녀온 통신사의 보고였다.
서인인 정사 황윤길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것 같다 했고
동인인 부사 김성일은 침략 기미가 없다고 보고했다.
보고에 차이가 있을 때는 정사의 말을 따라야 하지만
정권을 잡고 있던 동인들은 황윤길의 보고를 철저히 무시했다.
왜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국서에도 침략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명나라를 칠테니 길을 터주고 지원군을 내놓으라는 오만방자한 내용이었다.
통신사 일행을 따라온 일본사신도 내년에 침략한다고 공언했지만 외면당했다.
권력의 마력에 빠져든 동인들에게 국가 안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천안함 침몰을 두고 북에는 함구한 채 이명박 정부만 공격하는 민주당은 동인들의 판박이다.
집권당인 동인은 임진왜란이 끝나자마자 온건한 퇴계학파인 남인과 강경한 남명학파인 북인으로 갈렸다.
간교한 선조가 이순신 장군에 대한 시기로 그를 천거한 유성룡을 제거하려 하자
남명 조식의 제자로 의병을 일으켰던 정인홍을 앞세워 유성룡을 주화파(主和派)로 몰면서 분당된 것이다.    
권력을 잡은 북인은 다시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으로 나뉘었다.
광해군 즉위와 함께 권력을 잡은 대북의 전횡에 반발하여 남인과 서인이 연합하여 일으킨 반란이 인조반정이다.    
권력욕이 임금에 대한 충성심을 능가한 것이다.    
광해대왕을 몰아내고 인조를 앞세워 권력을 잡은 남인과 서인은 
이후 100년 가까이 공존했으나 숙종 대에 이르러 사이가 벌어졌다.
효종, 효종 비, 인조의 계비가 죽은 뒤 상복을 입는 기간을 놓고 난투극을 벌인 것이다.
세 번에 걸친 환국(換局)으로 서인과 남인은 서로 상대를 죽이는 이른바 제로섬 게임을 벌였다. 
권력을 장악한 남인은 다시 온건개혁파인 청남과 강경개혁파인 탁남으로 갈렸다.
인현왕후를 폐하고 장희빈을 왕비로 들어앉힌 것도 당파싸움의 산물이었다.
인현왕후와 함께 축출된 서인은 이 과정에서 송시열의 노론과 박세체의 소론으로 분당되었다.  
절치부심하던 노론과 소론은 장희빈을 내치고 인현왕후를 복위시키면서 다시 권력을 잡았다.
영조의 탕평책 덕분에 이전과 같은 피바람은 일지 않았지만 노론은 사도세자를 죽이는 파천황을 저질렀다.
이후 노론은 정조의 즉위를 반대한 벽파와 찬성한 시파로 나뉘었다.
두 사람 다 사도세자 살해에 앞장섰던 홍인한은 벽파, 홍봉한은 시파였는데, 
홍봉한은 정조의 외조부이고 홍인한은 홍봉한의 친동생이었으니
권력욕에 사로잡혀 사위인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냉혈한 들이었다.
정조가 죽자 정조 독살에 앞장섰던 영조 비 정순왕후가 권력을 쥐고 있던 시파를 몰아냈으며,
이후 순조의 장인 김조순에게 권력이 돌아가면서 안동김씨 세도정치 시대가 열렸다.
이로 말미암아 조선은 미미한 국력마저 소진되어 블랙홀 같은 왜국의 마수로 빨려 들어갔다.  
여당인 한나라당이 친이와 친박으로 갈려 세종시를 두고 막말대치를 하는가 하면,
친박 소속이던 김무성 의원은 한명숙을 두고 야당과 뒷거래를 한 듯한 발언을 했다.
민주당, 민노당, 선진당도 궤를 달리하는 인사들이 보따리를 싸들고 분당을 했다.
이 밖에도 창조한국당을 비롯하여 국회의원 하나 없는 미니정당들이 부지기수다.
역사는 후세에 교훈을 준다지만
이 나라 정치인들은 조선 500년 역사를 한 번도 돌이켜보지 않은 인사들로만 채워진 듯,
하는 꼬라지가 저 지긋지긋한 조선조 당쟁정국에서 한 발짝도 못 벗어났다.
천안함사태를 두고 강경 일변도로 나오는 중공을 보노라면 필경 섬찟한 흑심을 품고 있는 듯한데
백척간두에 선 국운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치판은 연일 한심한 작태로 알관하고 있다.
오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