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사(野史)

조선을 발칵 뒤집어놓은 스캔들 - 12

깊은산속 2010. 8. 10. 13:25

12. 영남 유림을 갈라놓은 추악한 무고 성문제에 관한 한 조선의 사대부 여인들은 가혹한 굴레를 뒤집어쓰고 살았다. 이혼이란 제도는 아예 없었으며, 남편이 죽은 뒤에도 개가는커녕 엄한 계율에 따라 수절을 강요받았다. 간통한 여자는 자자(刺字)라 하여 얼굴에 그 사실을 문신한 채 평생 굴욕을 견디며 살아가야 했다. 과부로서 음행을 하다가 발각되 면 사형, 유배 또는 노비신세로 전락했다. 과부는 외간남자는 말할 것도 없고 집에서 부리는 남자종과도 직접 대면하여 이야기할 수 없었다. 고을마다 한두 군데씩 서 있던 열녀문이나 열녀비는 이처럼 모두가 여인의 한과 눈물로 세워 진 잔혹한 징표다. 남편이 죽으면 따라서 죽는 부인도 많았는데, 차라리 바늘 로 넓적다리 찌르면서 욕정을 인고하는 고통보다 편한 선택이었는지도 모를 일 이다. 선조 때 진주의 명문인 하종악이 상처(喪妻)하여 대사헌을 지낸 이인형의 손 녀 이씨를 후처로 맞아들였다. 대사헌의 손녀가 후처로 들어간 것을 보면 그녀 의 어머니 역시 후처인 듯하다. 이씨가 한창나이인 스물여덟 살에 남편 하종악 이 죽자 그녀는 모범적인 수절을 시작했다. 그녀는 노비들에게 덕을 베풀며 훌 륭하게 가계를 이끌어갔다. 그러나 집안의 평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하종악의 전처소생으로 출가외인인 딸 하씨가 이씨를 모함하고 나선 것이다. “계모가 음행을 일삼고 있다. 우리 하씨 집안이 어떤 가문인데 음행을 한단 말인가.” 재산을 노린 무고(誣告)였다. 전처소생의 딸 외에 후사가 없는 집안이라 이 씨만 내치면 재산은 하씨 차지였다. 음행을 가장 부도덕하다 여기던 시절이었다. 이씨는 진주목사로부터 혹독한 심문을 받기 시작했다. 노비 열두 명도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하나같 이 사실을 부인했다. 당사자야 그렇다 치더라도, 열두 명의 노비는 곤장을 맞 아가면서도 한사코 이씨의 음행을 부인했다. 노비들은 입을 모아 마님은 절대 로 그런 분이 아니라고 진술했다. 목사는 마을사람들도 차례로 불러 조사했지 만 그녀에 대한 칭송만 자자할 뿐 아무도 하씨의 고변을 믿지 않았다. 목사는 사건을 종결하고 이씨와 노비들을 풀어주었다. 사건은 엉뚱한 데서 터져 산불처럼 번져나갔다. 하종악의 인척인 하항이 스 승 조식에게 이 일을 고했다. 기록에는 없지만, 하항이 재산에 눈이 먼 하씨로 부터 사주를 받은 게 아닐까 추정되는 대목이다. 조식은 이씨를 단죄해야 된다 며 길길이 뛰었다. 평생 벼슬도 마다하고 향리에서 후학을 양성한 남명 조식의 불같은 성격이 유림과 조정을 뒤흔드는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것이다. 조식의 제 자인 이희만 정인홍 하항 등이 스승의 뜻에 따라 공론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경상감사에게 압력을 넣어 이씨를 엄벌하라고 요구했다. 경상감영에 때 아닌 옥사가 일어났다. 심문방법은 매질이 고작이던 시절이었다. 심문 도중 이씨의 종 하나가 죽었는데, 그는 숨이 넘어가는 순간에도 마님은 절대 그런 분이 아 니라고 호소했다. 죽으면서도 마님의 무죄를 주장하는 종들을 보자 경상감사도 더는 방법이 없어 이씨와 종들을 풀어주었다. 조식의 제자인 이희만과 하항은 후배 유림들을 이끌고 이씨의 집으로 쳐들어 가 집과 가재도구를 마구 부수는 난동을 부렸다. 이씨는 난동을 부린 무뢰배들 을 경상감영에 고발했다. 감사는 즉각 이들을 모조리 구속하고 경과를 자세히 적어 장계를 올렸다. 재산을 노린 한 미거한 여인의 무고가 조정으로 옮겨간 것이다. 조정도 음란한 여인을 처벌해야 한다는 쪽과 난동을 부린 선비들을 처 벌해야 한다는 쪽으로 갈라져 치열한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수백 년 동안 당파싸움에 이골이 난 사대부들은 신이 났다. 논쟁 끝에 이씨를 벌하지 않은 진주목사와 경상감사가 파직되고 난동을 부린 선비들은 모두 풀려났다. 하종악의 미망인 이씨의 인척 가운데 이정의 첩이 있었다. 이씨는 이정의 첩 에게 억울한 사정을 호소했고, 첩은 남편 이정에게 베갯머리송사를 했다. 이정 은 청주목사와 경주부윤을 지낸 뒤 은퇴하여 향리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있는 인물로, 그의 집안은 영남 유림의 명문이었다. 그는 조식은 물론 퇴계 이황과 도 두루 교분이 두터웠다. 이정은 친구 조식을 찾아가 확실하지도 않은 일에 유림이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유림의 영수라는 허울이 조식의 인품을 휘어놓고 있었다. “그대가 음행한 여인을 비호하니 당장 의절하겠다.” 이정도 그처럼 옹졸한 조식과 의절하는 게 아쉬울 건 없었다. 이정은 자세한 내용을 적어 이황에게 알렸다. 이황은 즉각 답장을 보내왔다. ‘친구 사이에 사소한 일로 서로 외면하고 화해하지 못하는 옹졸함을 나로서 는 이해할 수 없다.’ 은근히 조식을 나무라는 내용이었다. 서신이 공개되자 조식의 제자 정인홍은 이황을 맹렬하게 비난했다. 이에 이황의 문인들도 일제히 조식을 비난하기 시 작했다. 영남학맥이 분당되는 순간이었다. 이후 두 계파는 철저하게 상대방을 배척하여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화해하지 않았다. 조정에서 논쟁이 분분하자 이황과 조식의 26년 후배인 대사성 기대승이 선조 를 알현하여 아뢰었다. “정확하지 않은 일로 전년과 금년에 연달아 옥사를 일으키고 곤장을 치고 있으니 억울한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심문한 자들이 한둘이 아니나 단 하나의 단서도 잡지 못했습니다. 젊은 사람이 조식에게 말하니 조식이 감사에게 일러 여러 사람을 잡아 가두었다가 단서가 없어 석방했습니다. 그 후 조사관으로서 파직된 자는 모두 조식이 떠벌여 그리 된 것입니다. 고을의 경망한 사람들이 소문을 낸 것도 모두가 조식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조식도 사심이 있어 그리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유생들이 한 일도 유자(儒者)의 일 이 아니라 무뢰배들이나 할 짓입니다. 우연한 일이 큰 사건이 되었으니 위에서 살펴보심이 옳을까 하옵니다.” 기대승은 조식의 제자 이희만이 하종악의 종을 협박하여 미망인 이씨를 무고 하려 한 내용도 상주했다. 옆에 있던 대사헌 박응남도 거들었다. “지금 치죄하지 않으면 앞으로 또 이런 폐단이 계속될 것입니다. 무고한 백 성의 집안에 들어가 난동을 부린 이희만 하옹 하항 등 3인은 죄를 주어야 합니 다.” 선조는 이씨가 무죄이니 더는 거론치 말라는 어명으로 사건을 종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