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을 거쳐 옥구에 이르렀을 때는 가을이 깊어 있었다. 그해에는 하필 전라도에
심한 흉년이 들어 밥을 얻어먹기가 억수로 힘들었다. 스무 집을 더터야 겨우 한술
얻어먹을까말까 했다. 강계를 떠날 때 추월이 바랑에 몰래 넣어놓은 노자는 바닥이
난 지 이미 오래였고, 추월이 지어준 봄옷도 헤져 쌀쌀한 가을바람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해질녘에 어느 마을에 당도하여 집집마다 하룻밤 잠자리를 청했으나
하나같이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밥은 안 주셔도 되니 잠만 좀 잡시다.”
“아무리 흉년이라도 잠만 재우고 밥을 안 줄 수는 없는 법, 이 동네는 특히 흉년이
심해 어느 집을 가도 마찬가지일게요. 저쪽 고개를 넘어가면 큰 마을 한가운데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있는데, 그 집이 김 진사 댁이오. 가근방에서는 가장 택택한 집이니
거기 가서 한번 부탁해보시오.”
김삿갓은 고단한 다리를 움직여 고개를 넘었다. 노구에 몸살기운까지 겹쳐 다리는
천근만근이었다. 김삿갓은 힘없는 손길로 김 진사 댁 대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이오?”
“지나가는 나그네인데 하룻밤 신세를 질까 하고 찾아왔습니다.”
“지금은 손님을 맞을 형편이 못되니 다른 집을 찾아보시오.”
김 진사인 듯한 주인은 김삿갓의 손에 엽전 두 냥을 쥐어주고는 돌아서 대문을
닫아걸었다. 김삿갓은 비감에 잠겨 손바닥에 놓인 엽전 두 닢을 물끄러미 들여다
보다가 시를 한 수 써서 대문에 붙여놓고 발길을 돌렸다.
沃溝金進士 옥구에 사는 김 진사
與我二分錢 내게 엽전 두 푼을 주네.
一死都無事 죽으면 이런 괄시는 안 당할 터,
平生恨有身 살아 있는 게 한이로다.
몸이 약해져서인지 이즈음엔 죽음이라는 명제가 김삿갓의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동구를 벗어나니 산 밑에 움막이 하나 있었다. 상여집이었다. 아무려면,
김삿갓은 안으로 들어가 상여 위에 몸을 눕혔다. 김삿갓은 몸살로 인한 신열에
금새 잠이 들었다.
“여보시오. 좀 일어나보시오.”
누군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김삿갓은 눈을 떴다. 문전박대를 하던 김 진사였다.
뒤에는 초롱불을 든 하인이 서 있었다. 동네 사정이 뻔하니 상여집 아니면 잘 곳이
없으리라 짐작하고 쉬 찾은 모양이었다.
“선생이 써 붙여놓은 시를 보고 부랴부랴 찾아왔소이다. 나는 이 동네에 사는
김 진사라고 하오. 요즘 거지가 하도 많다보니 내가 사람을 잘못 보고 큰 결례를
했소. 누추하지만 내 집으로 모시겠소이다.”
김삿갓은 목이 멘 채 김 진사를 따라갔다.
늦은 밥상은 진수성찬이었다. 온 고을이 흉년인 가운데도 가세가 넉넉한 집인지라
가양주(家釀酒)도 별미였다.
“선생의 시를 보고 특별히 부탁드릴 일이 떠올라 종놈을 데리고 찾아 나섰소.
다름이 아니라 내 직접 아홉 살 먹은 손자 녀석을 가르치고 있는데, 아무래도
한계가 있어 선생에게 좀 부탁할까 하오. 초대면에 무리한 부탁일지 모르나 제발
청을 받아주기 바라오. 내 사례는 넉넉히 하리다.”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었지만 거절할 처지가 못 되었다.
“내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체질이나 몇 달 동안이라도 맡도록 하겠소.
그러나 봄이 되면 언제 떠날지 나 자신도 모르니 그 점은 양해하기 바라오.”
겨울 한 철, 김삿갓은 성심을 다해 아이를 가르쳤다. 김 진사도 이따금 김삿갓의
강의를 들으며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
봄이 왔다. 아이를 가르치며 겨울을 나는 동안 몸살도 완치되고 근력도 붙었다.
김삿갓은 아침 일찍부터 관내의 명승지를 찾아다니며 잠들어 있던 시심을 일깨우기
시작했다. 옥구는 삼한시대 때 막로국의 도읍으로 김삿갓의 발길을 붙잡는 오래된
고적지가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김삿갓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바랑을 메고 김
진사 집을 나오는 길로 영 발길을 돌렸다. 김 진사가 약속한 넉넉한 사례는 마음에만
담아두었다.
마음은 가벼운데 몸은 전 같지 않았다. 길을 걷노라니 옆구리도 결리기 시작했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자연경관보다는 지나온 일에 생각이 집중되는 심리도 생경했다.
평생 남의 신세만 지며 살아왔지만 마음먹고 못할 짓을 한 적은 없어 마음은 가벼웠다.
의협심에 역경에 처한 사람을 도와준 적도 노상 없지만은 않았다. 짐짓 조정에서
밀령을 띠고 내려온 어사 행세를 하며 권세만 믿고 민가에 패도를 행하고 재산을
갈취한 지방수령들을 혼내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발길은 어느새 전주에 이르렀다. 견훤이 일으킨 백제(후백제라는 용어는 후세
사가들이 온조의 백제와 구분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고, 견훤의 치세에는 그냥
백제로 불렀다.)의 수도 전주는 넓은 들을 끼고 있는데다, 조선조에 와서는 이성계의
본향이라 경기전이라는 이궁(離宮)을 축조해놓아 볼거리도 많았다. 김삿갓은
며칠에 걸쳐 고덕산 만경대, 모악산 귀신사와 보광사, 감영 동헌 후원의 진남루,
북촌에 있는 덕진호와 풍월정 등을 둘러보고 남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남원은 지리산 기슭에 있어 전주에서 남원까지 가는 길에는 인가가 드물었다.
김삿갓은 노숙에 솔잎도 따 먹고 풀뿌리도 캐 먹으면서 고된 행보를 계속했다.
몸은 탈진을 거듭하여 날이 갈수록 무거워졌다. 아무데나 주저앉으면 이내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잠이 들곤 했다. 예로부터 살아 있다는 것은 남의 세계에 잠시 빌붙어
있는 것이라 했다. 그러나 삶과 죽음 가운데 어느 것이 내 것이고 어느 것이
남의 것인지 굳이 구분할 건 뭐란 말인가? 죽으면 모든 게 다 無로 돌아간다지만,
살아 있다고 有한 것은 또 무엇인가? 풍찬노숙하며 김삿갓이 남원에 이른 것은
전주를 떠난 지 보름 만이었다. 김삿갓은 무거운 다리를 끌고 광한루원으로 갔다.
광한루원은 호남팔경 중 으뜸이었다. 광한루에 올라 오작교를 굽어보며 춘향과
이몽룡의 로맨스를 상기하고 있자니 여기저기서 행락객들의 흥타령이 분분했다.
김삿갓은 감흥에 겨워 고단한 신세도 잊은 채 시를 한 수 읊었다.
千里筑鞋孤客到 머나먼 천리길을 외로이 찾아드니
四時笳鼓衆仙遊 신선들은 사시장철 장구 치며 노는구나.
銀河一脈連蓬島 은하는 선경에 잇닿아 있으니
未必靈區入海求 굳이 바다 속 용궁은 찾아 무엇 하리.
김삿갓이 시를 읊는 소리를 듣고 한 팀에서 술잔을 권했다. 몸이 쇄약한 데다
빈속에 술이 들어가니 일찌감치 취기가 올랐다. 김삿갓은 행락객들의 요청에
사양도 않고 잇따라 즉흥시를 읊조렸다. 더러 알아듣고 감탄하는 사람도 있고
무슨 소린지 몰라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자도 있었다. 며칠 잇달아 광한루원엘
오다 보니 일부러 초대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김삿갓은 광한루원에서 많은
시를 남겼다. 한번은 노인들의 시회에 초대받아 술을 얻어마시던 중 계화라는
노기(老妓)의 시를 듣고 그 애절함에 깜짝 놀랐다.
緻罷氷紗獨上樓 고운 비단 짜다 말고 누각에 오르니
水晶簾外桂花秋 수정 발 저편에 계수나무 꽃 피었네.
牛郞一去無消息 정든 임 떠나신 후 소식조차 끊어지니
烏鵲橋邊夜愁愁 밤마다 오작교 주변을 거닐며 수심에 잠기네.
“아니, 연인이 언제 떠났기에 그리도 애절한 노래를 부르는가?”
노기는 소녀처럼 얼굴을 붉히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떠난 지는 30년이 넘었지만 마치 어제인 듯하옵니다.”
“어허, 그 순정이 참으로 고운지고.”
문득 강계기생 추월이 떠올라 가슴이 저릿해졌다. 여러 사람이 어우러져 있는
주석에서도 내 가슴이 이리 애절할진데, 홀로 있는 추월은 얼마나 애가 탈까!
김삿갓이 광한루원을 벗어나 지리산으로 행보를 잡은 것은 가을로 접어들어서였다.
봄에서부터 한여름을 광한루에 나와 매일 이 술판 저 시회를 기웃거리며 행락객들과
어울려 소일했던 것이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500쌍의 동남동녀를 보냈다는
동방의 삼신산, 그 삼신산 가운데 하나가 바로 지리산이다. 그러나 지리산을 오르기에는
체력이 달려 김삿갓은 언저리를 돌아 진주를 향해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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