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삿갓

人生이란 원래 夢中夢이 아니드가

깊은산속 2010. 8. 10. 09:38

김삿갓은 밤잠을 줄이고 길을 재촉하여 보름 만에 홍성에 닿았다. 여정을
줄이기 위해 때를 거르기 일쑤였다. 두 끼를 굶은 채 홍성에 당도한 김삿갓은
어느 객점에 들러 이른 저녁을 시켰다. 70줄의 노인이 밥을 내왔다.
  “주인장. 여기서 고암리를 가자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김삿갓은 어릴 때 한 번 어머니와 함께 외가를 다녀간지라 길이 설었다.
  “왼쪽으로 가서 고개를 하나 넘으면 삼십 리 지경에 있소만, 뉘 댁을 찾아
오셨소?”
  “이길원이라는 분의 댁을 찾아가는 길입니다만…”
  “저런! 어디서 오시는지 소식이 닿지 않은 모양이구려. 그 분은 돌아가신
지 벌써 20년도 넘었다오. 게다가 보름 전에는 그 분이 돌아가셨을 때부터
그 댁에 와 계시던 매씨 되시는 분도 돌아가셨다던데…”
  김삿갓은 하마터면 밥숟갈을 떨어뜨릴 뻔했다. 보름 전이라면 소복을 입고
꿈에 나타나 김삿갓을 부르던 바로 그날 아닌가! 그러나 애써 격정을 억눌렀다.
  “손님은 그 댁과 가까운 친척이시오?”
  “아, 아닙니다. 그저 먼 친척으로 인사차 한번 들릴까 했는데…”
  “쯧쯧, 안됐구려.”

  김삿갓은 그길로 정처 없이 길을 나섰다. 어머니와는 30여 년 전 집을 나설
때가 인연의 끝인 모양이었다. 외숙모는 외삼촌보다 먼저 세상을 뜨셨으니,
외삼촌이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내처 외가에 머물며 외사촌들을 돌보다 거기서
돌아가신 모양이었다. 새삼 찾아가 성묘를 하고 재를 지낸들 번거롭기만 할 뿐
모두가 부질없는 일 아니겠는가. 더욱이 외사촌들과 마음에도 없는 언사를
섞기가 영 내키지 않아 발길을 거둔 것이었다.

  30여년을 유리걸식하며 한 번도 어머니를 모신 적이 없었지만, 어디엔가 살아
계신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을 기댈 언덕이 되었었다. 김삿갓은 어머니가 돌아
가신 충격으로 낮과 밤을 따로 구분하지 않았으며, 얻어먹는 신세일망정 끼니도
제때 챙기지 않았다. 이윽고 부여에 당도했을 때는 무덤에서 걸어나온 해골처럼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김삿갓은 봄비를 맞으며 부소산으로 올라갔다. 어머니를
잃은 처연한 심경에 백제 멸망과 삼천궁녀의 전설이 어우러져 더욱 스산했다.
김삿갓은 삼천궁녀가 뛰어들었다는 낙화암 위 백마정에 올라 유유히 흘러가는
백마강을 내려다보며 어머니를 잃은 한을 달랬다.

  김삿갓은 부소산을 내려와 객점에 들었다. 몽중몽(夢中夢)이란 이름을 가진
객점은 규모는 작았으나 밖에는 복숭아나무 밭 복판에 작은 연못을 조성해놓아
제법 운치가 있었다. 술을 시키자 서글서글하게 생긴 40대 주모가 스스로 술을
한 잔 따르며 농을 걸었다.
  “못난 색시가 달밤에 갓을 쓰고 다닌다더니, 노인장께서는 늙수막에 왜 삿갓을
쓰고 다니시우?”
  “이 사람아. 비도 피하고 햇빛도 피하고 꼴 보기 싫은 사람도 피하는 데는
삿갓만한 물건이 없다네. 특히나 술을 마시다 돈이 없을 때 도망가는 데는 가장
요긴한 물건이지. 삿갓만 벗으면 주모가 내 얼굴을 알아볼 턱이 없지 않은가.”
  객쩍은 농담에 사람 좋은 주모가 허리를 꺾으며 웃는 바람에 김삿갓도 모처럼
온갖 시름을 잊고 파안대소했다.
  “그런데 객점이름을 어째서 ‘몽중몽’이라 지었는가?”
  “쇤네도 한잔 주셔야지 공으로 들으시려우?”
  “이런, 미안허이. 내 술 인심이 야박하지 않은 편인데 오늘은 자네 미색에
정신이 혼미해진 듯하이.”
  “오호호호호. 이 나이에 미색이라니요, 농담이라도 술맛이 절로 나겠수.”

  주모는 대참에 한 잔을 죽 비우더니 간략하게 ‘몽중몽’의 유래를 설명했다.
읍내 기생으로 한창 잘나갈 때 그녀를 짝사랑하는 70객이 있었는데, 하루도
빠짐없이 기방으로 찾아와 그녀만 찾았다. 그녀가 다른 손님을 받을 때면
술좌석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며 술을 마시곤 했다. 그러나 술자리에서는
모셔도 잠자리를 같이하자는 노인의 청은 한사코 거절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 노인과 방사를 치르는 꿈을 꿨다. 그녀는 다음날로
노인을 찾아가 자진해서 몸을 허락했다. 필시 하늘의 뜻이라 여겨서였다.
그날부터 술자리가 끝나면 매일 노인의 품에 안겨 잠을 자곤 했는데, 어쩐
일인지 이후에는 노인의 양물이 서질 않았다. 그러다가 그녀가 20대 후반에
접어들어 기녀를 그만두자 노인은 이 술집을 차려주고 계속 뒤를 돌봐주었다.
‘몽중몽’은 꿈속의 인연을 생각해서 지은 이름이었다.

  “그 어른은 아직 생존해계신가?”
  “웬걸요. 5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어른이 돌아가시자 술장사를 중단하고
본댁과 별도로 삼년상을 치러드린 뒤 지금까지 수절하고 지낸답니다.”
  “어허, 열녀로고. 이 이악한 세상에 자네처럼 신의를 존중하는 사람은 처음
이로세. 내 이 고장은 처음이지만 자네 같은 사람을 만나 참으로 감격했네.”
  김삿갓은 한 잔 그득 술을 따라 주모에게 권했다.
  술이 떨어지자 주모는 술상을 내가더니 새로 한 상 차려 내왔다.
  “오랜만에 다 늙은 퇴기를 알아보시는 선비님을 만났으니 지금부터는 쇤네가
대접하리다. 지금부터 쇤네를 연월이라 불러주시우. 제 기명이었답니다.” 
  연월은 주량도 만만찮았다.
  “내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며 숱한 기녀들과 술을 마셔봤지만, 자네처럼 주량이
센 여인은 처음일세그려.”
  “주량이란 상대방에 따라 달라지는 거 아니겠습니까?”

  마침 유장한 백마강을 배경으로 풀을 뜯던 송아지가 ‘음매~’하고 울었다.
김삿갓은 취기가 몽롱한 가운데 시심이 일어 혼잣말로 그 정경을 읊조렸다.

  白馬江頭黃犢鳴     백마강 가에서 누른 송아지가 울고 있네.

  연월이 제꺽 대구를 놓았다.

  老人山下少年行     노인산 아래로 소년이 걸어가네.

  김삿갓은 깜짝 놀랐다. 연월이 대구를 놓을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더구나 김삿갓이 白과 黃을 대조적으로 배치한 데 대해, 연월은 老와 少로
화답하지 않는가! 김삿갓은 뒤를 이어 한 구절 더 읊었다.

  澤裡芙蓉深不見     연못 속의 부용꽃은 물이 깊어 보이지 않네.
  園中桃李笑無聲     뜰에 있는 복사꽃은 웃어도 소리가 나지 않네.(연월)

  이번에는 부용꽃을 복사꽃으로, 不見을 無聲으로 받은 것이다. 아득히
강계기생 추월의 모습이 떠올라 잠시 김삿갓의 심사를 어지럽혔다.
  “자네 솜씨는 가히 진랑(眞嫏. =황진이)을 능가하이.”
  “점잖은 선비들의 주석에서 들은풍월로 익힌 재주이오니 너무 놀리지 마세요.”

  이윽고 주석을 파하고 자리에 눕자 살며시 문이 열리며 연월이 들어섰다.
그녀는 선 채 사그락거리며 옷을 벗더니 이불을 들추고 김삿갓 옆으로 파고들었다.
  “쇤네 퇴기라 하나 밤일은 잊지 않았습니다. 허물치 마시고 고단한 여독이나
푸셔요.”
  연월은 비록 40줄이라 하나 조이는 맛은 10대를 방불케 했으며, 뭇 남정네들의
발길을 끌던 테크닉은 그예 동이 훤히 틀 때까지 한숨도 잠을 재우지 않았다. 퇴기
연월의 기막힌 기교와 환대에 끌려 몽중몽에서 닷새 동안 운우를 즐긴 김삿갓은
그녀가 장을 보러 간 사이에 술값을 셈하여 남겨두고 행장을 꾸려 길을 나섰다.
구두레나루에 오니 마침 강경 가는 배가 있어 선장의 허락을 받고 배에 올랐다.
김삿갓은 사흘 만에 강경에 도착하여 선장에게 백배 사례하고 남행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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