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삿갓

꿈에도 그리든 고향,천둥마을

깊은산속 2010. 8. 10. 09:57

 김삿갓이 살던 천동마을은 곡산읍에서도 산속으로 60여리를 더 들어간 첩첩
산중에 있었다. 험준한 산길은 가도가도 끝이 없었지만 힘들다는 생각은 추호
도 없이 가슴이 설레기만 했다. 어릴 때 동무들의 얼굴이 하나씩 떠올랐다. 동
무들과 어울려 왕복 120리도 넘는 산길을 걸어 읍내 장거리에 다녀오던 기억도
선명했다. 천동마을을 지척에 둔 계곡으로 접어드니 동네 뒤 감둔산 위에는 벌
써 눈이 하얗게 쌓여 있었다. 눈을 보니 갑자기 추위가 엄습했다. 김삿갓은 그
때까지 여름옷을 입고 있었다. 얼마를 더 가니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눈
을 무섭게 부릅뜨고 김삿갓을 맞이했다. 천동마을 입구였다. 눈에 익은 장승은
아니었으나 30여 년 전 김삿갓이 살 때도 동구에는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외에 여러 장승들이 어울려 서 있었다.

  때마침 오른쪽 산길에서 나무를 한 짐 진 장년이 내려오더니 장승 옆에 지개
를 받쳐놓고 땀을 닦았다.
  “저, 천동마을을 찾아왔는데 아직도 10여 호가 그대로 살고 있는지요?”
  “지금은 인총이 불어나서 20여 호가 산답니다. 노형은 누군데 이 마을에 10
여 호가 살고 있는지를 묻소?”
  “예전에 이 마을에 살았던 적이 있어서요.”
  “예전에 살았다면 어릴 적에 뭐라고 불렀는지, 나는 어릴 적에 웃담에 사는
코흘리개라고 불렸는데요.”
  “아, 조조! 내가 그 이름 지어줬다가 네 아버지한테 뺨을 맞은 적이 있잖아.
나 감나무집 둘째야.” 
  “네가 바로 감나무집 둘째로구나! 너 아직도 그 일을 기억하고 있네. 아니,
어디서 뭐하다가 이제야 고향을 찾누? 그나저나 먼 길 오느라 시장할텐데 어서
가자.”

  집에 들어서자 조조는 큰아들을 시켜 친구들을 동네집으로 모이도록 심부름
을 시켰다. 동네집은 상조회에서 마련해놓고 필요할 때 쓰는 공동주택이었다.
  “집이 좁아 잘 데가 없으니 잠은 동네집에서 자도록 해.”
  저녁을 먹고 나가보니 10여명의 어릴적 친구들이 모여 있었다. 얼굴이 기억
나는 친구도 있고 생경한 친구도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김삿갓을 기억하고 있
었다. 김삿갓은 동네에서 유일한 양반출신으로 글공부만 하고 농사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회장을 맡고 있는 조조는 상조회 기금으로 술과 안주를 시
켜 성대한 환영회를 베풀어주었다. 환영회는 밤이 이슥해서야 마무리가 되었다.
돌아가기 위해 방문을 여니 어느새 온 천지가 흰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얼마
뒤 함께 밖으로 나갔던 조조가 되돌아왔다.
  “너 여기 아주 살러 온거지?”
  “아니야. 나는 정처 없이 떠다니는 몸이라 내일이라도 가봐야 해.”
  “30여 년 만에 고향에 와서 그게 무슨 소리야? 정 그렇다면 이번 겨울이라
도 나고 가. 이대로 보낼 수는 없어. 얼굴만 비치고 떠날거면 뭣 하러 왔어?”
  “동무들에게 너무 폐를…”
  “그런 말이 어디 있어? 모두들 반가워하는 거 봤잖아. 다들 네가 동네에 뿌
리를 내리고 살기를 원해. 너 내일 떠나면 나 친구들한테 맞아 죽어. 그러니
아무 소리 말고 이번 겨울 나고 봄이나 되거든 가든지 말든지 해. 그리고 삼시
세끼는 우리 집에서 먹도록 해.”
  “알았어. 참으로 고맙구나. 그런데 너한테 폐가 너무 커서 어떡하지?”
  “상조회 기금으로 네 밥값을 치르기로 했으니까 그건 염려하지 마. 그리고
자네가 아직 여름옷 차림인 걸 보고 마누라가 솜옷을 한 벌 지어주기로 했으니
사양 말고 입도록 해. 내 다 짓는 대로 가져다줌세.”
  동무는 역시 어릴적 동무였다. 눈은 밤새 쉬지 않고 내렸다.

  다음날 , 김삿갓은 조조를 따라 온 마을을 돌아다니며 어른들께 일일이 인사
를 드렸다. 밤새 내린 눈은 무릎까지 차올랐다. 친구들은 저녁마다 동네집으로
모여들어 김삿갓의 이야기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귀를 기울였다. 10년이 넘게
세상을 돌아다닌 김삿갓의 경험담은 대대로 첩첩산중에서만 살아오고 있는 농
사꾼들의 혼을 쏙 빼놨다. 동무들의 음담패설도 김삿갓에게 신선한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술추렴은 사흘로 끝나고, 동네집은 다시 새끼를 꼬고 짚신을 삼는
원래의 기능으로 돌아갔다. 며칠 뒤 뗍떪?마누라가 만든 솜옷을 가져다주었
다. 얼굴은 투박하게 생겼어도 바느질 솜씨는 그만이었다. 동네사람들과 안면
이 트이면서 김삿갓은 노인들이 모이는 집으로 찾아가 장기와 바둑을 배우기도
했다.
 
  한 달쯤 지난 어느 날이었다. 조조의 생일잔치를 벌인 뒤 술이 샌 몇몇 친구
들끼리 어울려 산 아래 주막으로 2차를 갔다. 천동마을에서 10리가 넘는 길이
었다. 30대 초반인 주인 수안댁은 결혼한 지 5년 만에 후사 없이 남편이 죽자
혼자서 술장사를 하고 있었다. 남편이 술독으로 죽었기 때문에 수안댁은 어떻
게든 좋은 술을 만들기 위해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비법을 배워 왔는데, 계절에
따라 빚어낸 두견주와 국화주는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을 만큼 맛이 뛰어났다.
그러나 막걸리만 마시던 촌사람들이라 솜씨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크~ 아니, 우리 고을에 이렇게 좋은 술이 있었다니 진작에 찾아올걸 그랬
네.”
  초대면인 손님의 칭찬에 수안댁은 귀가 번쩍 띄었다. 처음으로 술맛을 알아
주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모두들 이미 취한 채 온 참이라 직접 얘기를 나눠
볼 기회는 없었지만, 수안댁은 그날로 김삿갓을 마음에 담아두게 되었다.

  그날도 바둑을 배우러 노인들이 모이는 집으로 가려던 참이었다. 조조가 큰
아들에게 술상을 들려 동네집으로 왔다.
  “수안댁이 특별히 자네 대접하라고 보낸 술일세. 지난번에 자네가 술맛을
칭찬한 뒤로 은근히 자네를 기다리는 모양일세. 지금까지 아무도 수안댁의 술
맛을 알아준 사람이 없었거든.”
  김삿갓은 조조가 따라주는 술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한 모금 마셨다. 입안에
향기가 알싸하게 번지면서 목구멍을 넘어가는 술맛이 참으로 일품이었다. 저번
에 마셨던 술맛보다 월등했다. 잠시 개풍 천석사를 떠날 때 안산댁이 작별의
선물로 전해주었던 비주(秘酒)의 향취가 코끝을 스쳐갔다.
  “참으로 대단한 솜씨로구먼. 내 관동 관북 경기 일대를 다니면서 좋다는 술
은 다 얻어마셔봤지만, 이처럼 맛있는 술은 작년 경기도 개풍 땅에서 딱 한 번
마셔본 뒤 처음일세.”
  “자네나 하니 수안댁의 솜씨를 알아보지 평생 막걸리만 마시며 살아온 우리
네야 어디 술맛이나 제대로 아는가. 언제 시간 내서 수안댁의 주막에 다시 한
번 가보세나.”
  김삿갓은 모처럼 마셔보는 가주(佳酒)에 기분이 한껏 고조되어 시를 몇 수
지었다. 술을 보내준 수안댁의 호의가 새삼 갸륵했다.

  조조는 김삿갓과 수안댁을 엮어주기 위해 비밀리에 몇몇 동무들과 모의작당
을 거듭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김삿갓을 붙잡아두기 위해서였다. 김삿갓만 정
착한다면 아이들에게 글공부도 가르치고 동네에 문제가 발생할 때도 원만하게
해결해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수안댁의 의향은 이미 다짐을 받아둔 뒤였다. 며
칠 뒤 몇몇 친구들이 돈을 모아 김삿갓을 주막으로 데려갔다.
  “아주머니. 여기 귀한 손님을 모시고 왔소.”
  수안댁은 반색을 하며 달려 나왔다.
  “아이구 삿갓선생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어서 들어가세요.”
  “요전에는 가주를 보내줘서 고맙게 잘 마셨네. 어디 내놔도 안 빠질 훌륭한
솜씨더군.”
  “과찬의 말씀입니다. 어서 드세요, 선생님.”
  동무들은 죽은 동무의 부인이니 존댓말을, 김삿갓은 주막의 주모이니 관습대
로 하대를 했지만 친구들이나 수안댁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수안댁은 한
번도 손님을 받은 적이 없는 안방으로 김삿갓과 친구 일행을 모셨다.
  “안방으로 모시는 걸 보니 자넬 어지간히 좋아하는 모양일세.”
  친구들이 이구동성으로 놀려댔지만 김삿갓은 덤덤하니 술상을 기다렸다.

  이윽고 수안댁이 주안상을 들여오더니 김삿갓한테 먼저 잔을 올렸다.
  “주모, 고맙네. 그런데 저번에 보내준 술은 무얼 어떻게 담았기에 그리 맛
이 일품인가? 내 여러 곳을 다녀봤지만 그만한 술맛은 처음이었다네.”
  “그리 칭찬해주시니 고맙기 한량없습니다. 가을에 3천자가 넘는 높은 산에
서 자생하는 황국(黃鞠)을 따서 그늘에 1년 이상 말렸다가 담은 술입니다. 술
이름은 추로백(秋露白)이라고 한답니다. 이슬을 모은 물로 담그느라 딱 한 병
밖에 만들지 못했습니다. 어느 스님한테서 배운 비법으로 빚었는데, 귀한 분이
나타나면 대접하려고 오래 갈무리해왔습니다.”
  “수안댁 말하는 것 좀 봐. 이제 신방만 차리면 되겠네.”
  “안 그래도 삿갓선생이 수안댁과 하룻밤 자고싶다고 보채기에 이리 모셔왔
어요. 잘됐네 뭐.”
  동무들의 농담에 수안댁은 얼굴을 붉히며 밖으로 달려 나갔다.

  수안댁이 나가자 친구들은 본격적으로 김삿갓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어떤가, 이사람. 수안댁이 저리 자네를 좋아하는데, 그만 결혼해서 우리와
함께 살기로 하세. 자네가 있어야 우리도 아이들에게 글공부를 시켜서 까막눈
이라도 면하게 해주지. 자네가 외면하면 우리는 대를 물려 이런 무지랭이 생활
을 해야 하지 않는가.”
  “우리를 봐서 그렇게 좀 해주게. 마을에 글을 깨우친 사람이 없으니 관에
무슨 일이 생기거나 이웃마을과 다툼이 일어났을 때도 말주변이 없어 늘 손해
만 보고 살아왔네.”
  김삿갓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결혼을 할 수 없는 처지를 진지하게 설명했다.
  “내 사생활 얘기는 안 하려고 했는데 자네들의 권고가 하도 간곡하니 설명
을 해야겠네. 자네들 말은 전적으로 알아들었네. 그러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정처 없이 떠도는 신세가 되었지만, 내게는 영월에 처자식이 있다네. 내 사정
이 이러하니 자네들이 양해해주기 바라네.”
  동무들도 더는 강요하지 못하고 말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부엌문을 통해 흘
러나오는 김삿갓의 얘기를 들으면서 옷고름으로 눈물을 찍어내고 있던 수안댁
이 방으로 들어왔다.
“선생님 말씀 다 들었습니다. 더 붙잡지는 않을테니 오늘 하룻밤이라도 주무
시고 가세요. 평생 선생님을 가슴속에 묻고 살겠습니다.”
  수안댁은 체면불구하고 하룻밤 동침을 애원했다. 동무들과 어울려 주막을 찾
아와 처음으로 술맛을 칭찬해준 김삿갓을 깊이 사모해왔던 것이다. 그 간곡한
요청에 친구들이 말없이 하나둘 자리를 떴다. 수안댁은 곧 술상을 치우고 비단
금침을 깔았다. 동무들이 김삿갓과 수안댁을 엮어주기 위해 주막을 다녀간 이
후 오늘을 대비하여 마련해둔 이부자리였다. 김삿갓은 10년 수절과부를 위해
온 정성을 기울여 운우지정을 쏟아부었다.

  이듬해 봄, 김삿갓은 당초 예정했던 대로 정든 천동마을을 떠났다. 그 동안
수안댁의 주막에도 자주 갔었다. 수안댁은 여전히 김삿갓을 깍듯이 받들어 모
셨지만 더는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았다. 조조의 마누라는 봄옷을 한 벌 지어
떠나는 신랑의 동무에게 선물했다. 동무들은 김삿갓의 완강한 사양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두둑한 전별금을 바랑에 넣어줬다. 수안댁이 비밀을 지켜줄 것을 당
부하며 전해준 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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