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삿갓

시선을 또 다른 시선이라 이르니

깊은산속 2010. 8. 10. 10:00

 이윽고 개성에 도착한 김삿갓은 먼저 송악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천석사에서
안산댁과 눈물의 이별을 한 지 보름 만이었다. 중턱에 이르러 내려다보니 개성
시가 낙조를 받아 아늑하게 엎드려 있었다. 어디서 청아한 목탁소리가 들려왔
다. 가까운 곳에 절이 있나보다 여기며 소리를 향에 발길을 재촉하자니 팔순이
넘어 보이는 노승이 목탁을 두드리며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김삿갓은 걸음
을 빨리하여 노승을 따라잡은 뒤 합장배례하여 인사를 드렸다.
  “지나가는 과객이올시다. 하룻밤 묵어가도록 적선을 베풀어주십시오.”
  “이르다 뿐이겠소. 한 달이고 일 년이고 편히 쉬다 가시지요.”

  노승을 따라간 곳은 금종사였다. 저녁을 얻어먹고 잠자리에 드니 왼쪽 다리
에 자지러질 듯한 통증이 왔다. 안산댁을 잊기 위해 밤잠도 자지 않고 무리하
게 걷는 바람에 아물었던 상처에 동티가 난 것이다. 김삿갓은 하릴없이 금종사
에 발이 묶인 채 내상(內傷)을 다스린 뒤 열흘 만에 자리를 털고 있어났다.
  “아직 다리가 성하지 않은 것 같은데 며칠이라도 더 묵었다 가시지요.”
  노승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만류했다.
  “스님의 보살핌 덕분에 이제 다 나은 것 같습니다. 읍내를 좀 둘러볼까 싶
어 내려가 봐야겠습니다. 그 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원, 신세랄 것까지야. 읍내는 인심이 사나워 잠자리 얻기가 마땅찮을게요.
그럴 땐 연복사나 송화사를 찾아가시구려.”

  개성은 한양에 비해 거리가 매우 한산했다. 40줄의 한 선비에게 선죽교가 어
디냐고 물으니 마침 거기를 가는 길이라 하여 함께 걸었다. 가는 동안 선비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정몽주의 충성심을 기렸다. 절대로 ‘한양에 올라간다’고
하지 않고 ‘한양에 내려간다’고 표현하는 개성사람들, 그들은 나라가 망한
지 450여 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고려백성이었다. 이방원의 하수인 조영규에게
철퇴를 맞아 죽은 정몽주의 시대를 뛰어넘는 충절은 죽은 지 397년 만인 1789
년에 와서야 정조의 명에 의해 비각이 건립되면서 조선백성들에게도 추앙받기
시작했다. 전해오는 소문대로 선죽교에는 정몽주의 원한 맺힌 선혈 흔적이 여
기저기 남아 있는 듯했다. 그러나 기휘(忌諱. 나라에서 엄히 금한 법령)가 두
려워 그때까지 헌시(獻詩)를 남긴 선비가 아무도 없었다. 김삿갓은 바랑에서
지필묵을 꺼내 즉석에서 시를 지어 안내해준 선비에게 선물로 건네주었다.

  石拘年深難轉舌     돌짐승은 오래 되어 말이 없고
  銅臺覆滅但垂頭     구리대는 쓰러져 머리를 숙였구나.
  周觀別有傷心處     둘러보니 유난히 가슴 아픈 곳
  善竹橋川因不流     선죽교 아래 개울은 흐르지도 못하고 흐느끼네.

  “선생께서 이처럼 훌륭한 시인인 줄 미처 몰라 뵈었습니다. 마침 날도 저물
었고 하니 읍내에 들어가 술이라도 한잔 대접할까 합니다. 사양치 마시고 따르
시지요.”
  선비를 따라 찾아든 술집은 개성에만 있는 ‘앉힘술집’이었다. 조선이 개국
하여 권력과 함께 모든 경제권이 한양으로 넘어가자 개성사람들은 장사에 호구
를 의존하게 되었는데, 남편이 장사를 떠난 사이에 부인이 집에서 술을 파는
곳이었다. 간판도 내걸지 않고 입소문으로만 장사를 하는 ‘앉힘술집’은 일반
술집보다 맛깔스런 안주가 푸짐하게 나왔는데, 정해진 값은 없고 손님이 알아
서 돈을 내는 관행이 특이했다.

  주인 아낙은 선비를 정중하게 맞이하여 안방으로 모셨다. 쪽진머리에 은비녀
를 단정하게 꽂은 30대 중반의 아낙은 매우 기품이 있어 보였다. 아낙은 술을
마시는 동안 계속해서 색다른 안주를 만들어 하나씩 내왔는데, 10여년을 떠돌
아다니며 온갖 음식을 다 먹어봤지만 그렇게 맛이 오묘한 음식은 처음이었다.
  “아주머니. 제가 술값을 두 배로 쳐 드릴테니 다음에 이 손님이 오시거든
한 번 더 대접해드리세요. 선생. 혹 다시 지나시는 기회 있으시면 이 집에 들
러 목을 축이고 가시지요.”
  매일 선죽교에 나가 포은의 충절을 기린다는 통성명도 하지 않은 선비, 그러
나 그는 끝내 김삿갓을 알아보지 못했다.

  박연폭포는 입구에서부터 단풍이 휘황하여 마음이 들떴다. 며칠 전에 내린
비로 물이 불어 멀리서부터 폭포의 굉음이 귀를 먹먹하게 했다. 행락 인파는
읍내 거리보다 많았다. 단풍물이 들어서인지 표정들도 상기되어 있고 왁자지껄
활기가 넘쳤다. 폭포는 천마산과 성거산 사이의 계곡 중간쯤에 자리 잡고 있는
데, 병풍처럼 둘러서 있는 절벽 아래 깎아지른 벼랑을 시원스럽게 쏟아져 내리
고 있었다. 금강산의 구룡폭포, 설악산의 대승폭포와 함께 ‘조선 3대 폭포'인
폭박연폭포는 서화담 황진이와 함께 ‘송도3절’로도 불리고 있다. 폭포 한쪽
벼랑에는 황진이가 쓴 시가 솜씨 좋은 조각가에 의해 음각되어 있었다. 절색에
절시문과 음악에까지 조예가 뛰어났던 300여년 저쪽의 기녀 황진이, 그녀의 날
아갈 듯한 필체 위에서 함흥 기녀 소연의 얼굴이 간절한 표정으로 김삿갓을 손
짓하고 있었다.

  금종사의 노승이 일러준 대로 송화사를 찾아가 며칠 동안 머물며 명승지를
두루 둘러본 김삿갓은 곡산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예성강을 따라 이틀을 걸으
니 사람들의 생김새와 억양이 경기도와는 확연히 다른 황해도 남천현에 다다랐
다. 곡산군을 2백여리 남겨둔 고장이었다. 황해도는 서쪽지방은 바다와 맞닿으
면서 연백평야 재령평야 같은 넓은 들이 많지만, 동쪽지방은 멸악산맥 언진산
맥 마식령산맥에 둘러싸여 험준한 산악지대를 이루고 있다. 조부 김익순이 홍
경래에게 항복한 죄로 참수되자 어머니가 아들 3형제를 데리고 곡산으로 숨어
든 것도 곡산군이 이처럼 심심산중이기 때문이었다. 그때 김삿갓의 나이는 네
살이었는데, 이후 누가 고향을 물으면 자연스럽게 ‘황해도 곡산’이라 대답하
게 되었다.

  날이 저물어 김삿갓은 서당을 찾아들었는데, 나그네를 반가이 맞는 훈장은
신선처럼 풍채도 좋고 인품도 훌륭했다.
  “보아하니 선생은 학문이 깊은 분 같은데 이런 심심산골엔 어인 일로 들리
시었소?”
  “학문이 깊다니 과분하신 말씀입니다. 저는 명산대천을 떠돌아다니는 걸객
이온데, 곡산이 고향이라 떠난 지 30여년 만에 찾아가는 길입니다.”
  “내 집을 찾아온 귀한 손님이니 내 술 한잔 대접하리다.”
  “잠만 재워주셔도 고마운 일인데 이리 후하게 대접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
르겠습니다. 선생께서는 이런 벽촌에 어울리지 않는데 어찌 남천에서 훈장을
하고 계시는지요?”
  “허허허허. 그렇게 보입니까? 나는 본시 한양 태생인데 조부께서 귀양 오시
는 길에 따라 왔다가 산수에 마음을 빼앗겨 조부께서 돌아가신 뒤에도 눌러 살
게 되었습니다.”
  김삿갓은 오랜만에 말이 통하는 선비를 만나 밤새 술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
었다.

  “30여년 만에 들리신다니 곡산에 가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을겝니다. 그러
니 오늘은 나랑 학소산 구경이나 하며 여독을 푸신 뒤에 천천히 떠나도록 하시
지요.”
  김삿갓이 아침 일찍 나서려는 기미를 보이자 훈장이 선수를 쳤다.
  “저야 오라는 이도 없고 서두를 일도 없지만 초대면에 폐가 너무 많은 것
같아서…”
  “폐라니요, 이 산중에서 선생 같은 분을 만나 오랜만에 좋은 말씀을 나누었
는데요.”
  김삿갓은 흔쾌히 훈장을 따라나섰다. 서당에서 일하는 사동(使童)이 술통과
안주를 지게에 지고 뒤를 따랐다. 산을 중간쯤 오르니 학소산(鶴巢山)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학들이 무리지어 날아다니고 있었다.
  “예로부터 학은 영물이라더니, 진객이 오신 걸 알고 환영무를 추나봅니다.”
  “옛날 서화담이 거문고를 타면 학들이 윤무를 추며 상공을 선회했다더니,
훈장님 같은 훌륭한 분이 오시니까 반기는게지요.”

  두 사람은 오랜 지기처럼 동서고금을 논하며 학소산의 단풍을 완상한 뒤 이
요정(二樂亭)으로 향했다. 이요정은 학소산 중턱의 천애절벽 위에 걸린 듯 자
리 잡고 있었고, 절벽 아래로는 남천강의 푸른 물줄기가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
다. 「논어」에 나오는 ‘지자(智者)는 요수(樂水)요 현자는 요산(樂山)’이라
는 말을 줄여 요산요수(樂山樂水)라 했는데, 이요정에서 남천강을 내려다보자
니 요산요수의 두 요 자를 따서 이요정이라는 이름을 지은 선현의 호기가 가슴
으로 전해왔다. 이요정은 예로부터 시인묵객들이 많이 찾아들었던 듯, 세조 6
년 황해도관찰사를 지냈던 강희안을 비롯하여 여러 선비들의 현판시가 걸려 있
었다. 두 사람은 사동이 지고 온 동이를 내려 술을 마시며, 걸려 있는 현판시
도 읊고 직접 시를 지어 읊기도 하다가 밤이 이슥해서야 산을 내려왔다.

  다음날도 두 사람은 아침 일찍 서당을 나섰다. 뒤에는 역시 사동이 술짐을
지고 따라왔다. 두 사람이 오른 곳은 학소산 동쪽에 있는 수림정(秀林亭)이었
는데, 역시 이름에 걸맞게 단풍이 짙게 물든 주변의 수림(樹林)이 빼어난[秀]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이요정 아래를 흐르던 남천강은 학소산을 휘돌아 수림
정 천인절벽(千仞絶壁) 아래를 굽이굽이 흘러 내려가고 있었다. 이요정은 규모
가 웅장한 데 반해 수림정은 오밀조밀한 여성미를 띠고 있었다. 두 사람은 대
낮부터 술판을 벌이며(꼴깍!) 고금의 학문을 희롱했다. 주기가 시흥을 일으켜
훈장이 먼저 시를 읊조렸다.

  浩浩乾坤思無窮     하늘땅 넓고 넓어 생각은 만 갈랜데
  一亭高趣水雲中     정자는 추연하게 구름 위로 솟아 있네.
  登臨幾憶桃源客     무릉도원 사시는 임 사무치게 그리운데
  欲問仙家興異同     묻노니 신선이 우리와 무슨 차이런고.

  “훈장님은 이미 신선이 되신 듯합니다.”
  “귀공도 한 수 읊어보시지요.”
  “훈장님의 명시에 흠을 낼까 두렵습니다.”

  山吐孤輪月     산은 한 떨기 달을 토해내고
  江含萬里風     강은 만리바람을 머금었도다.
  寒鴻何處去     쌀쌀한 하늘을 기러기는 어디로 날아가는지,
  聲斷暮雲中     울음소리 구름 속에 아득하구나.

  “오호! 귀공의 시재를 이제야 알아보다니, 산중에 오래 살아서 안목이 무뎌
진 모양이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아니올시다. 내 시를 잘 짓지는 못해도 수많은 시를 읽어봤지만, 이처럼
자연을 살아 있는 생물로 승화시켜 그려낸 시는 보지를 못했소이다. 뉘신지 모
르겠으나 귀공은 과히 시선이시오.”
  그러나 훈장은 앞에 앉아 있는 나그네가 진짜 시선인 줄은 모르고 있었다.
김삿갓이 훈장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서당을 떠난 것은 남천 땅에 접어든
지 여드레 만이었다. 그 동안 두 사람은 하루에 한 군데씩 남천팔경을 찾아다
니며 술에 취하고 시에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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