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삿갓

추색(秋색)에 잠긴 황해도

깊은산속 2010. 8. 10. 09:55

곡산 지경을 벗어난 김삿갓은 구월산을 향해 서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 지
방은 어딜 가나 첩첩산중이었다. 얼마를 가자니 날아갈 듯한 필체로 ‘夜夢’이
라는 옥호의 간판을 내건 객점이 나타났다. 산중 객점에 어울리지 않는 명필이
었다.
  “저 야몽이라는 간판은 어느 분이 써준 것인가?”
  “저게 야몽이란 글자유? 장사를 시작한 첫날 첫손님이 판때기를 하나 달라
기에 줬더니 그렇게 써서 걸어놓고는, 다음날 아침 외상을 하고 갔답니다.”
  “저런 고약한 사람이 있나. 첫날 첫손님이 외상을 하면 쓰나.”
  “당신이 첫손님인 줄 알고 그랬겠어요? 알았더라도 수중에 돈이 없으면 하
는 수 없는 일이지요.”
  주모는 남의 말 하듯 천하태평이었다.
  “그래, 외상을 했으면 나중에 와서 술값은 갚았는가?”
  “아직 안 갚았는뎁쇼. 때가 되면 와서 갚겠지요.”
  점입가경이었다. 김삿갓은 자신도 한 태평 한다고 자부해왔으나 산골의 일개
주모에게도 까마득히 못 미친다는 생각에 큰 깨우침을 얻었다. 김삿갓이 다섯
되 째 술을 시켰을 때였다.
  “손님은 머리도 허옇게 쇠신 분이 웬 술을 그리 많이 드세요?”
  “뭐? 내 머리가 허옇게 쇘다고?”
  “어머나, 아직 모르고 계셨어요?”
  아마도 천동마을에 사는 몇 달 사이에 갑자기 머리가 쇤 모양인데, 늘 함께
지내는 동무들로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 아무도 얘기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도 이제 늙었단 말인가? 나이 사십 줄에 이루어놓은 일도 없이 세월만
축내고 소일했단 말인가?’
  “참, 손님. 그 외상손님이 저쪽 객방 벽에 뭘 하나 써 붙여놓고 갔다우. 떠
나신 뒤에야 보았는데, 글을 아시거든 한번 보시우.”
  김삿갓은 주모가 건네준 등잔불을 들고 벽에 붙은 글을 읽어보았다.

  鄕路千里長     고향 길은 천리 밖 멀고도 먼데
  秋夜長於路     가을밤은 그 길보다 더 길구나.
  家山十往來     꿈속에선 고향에 다녀왔건만
  詹鷄猶未呼     깨어 보니 상굿도 새벽닭이 울기 전이네.

  타향을 떠돌며 향수(鄕愁)에 젖어 하룻밤 자고 가면서 그 심경을 읊은 시인
데, 놀랍게도 ‘山雲’이라는 낙관이 찍혀 있었다. 야몽이란 바로 이 시의 제
목이었다.
  “여보게 주모. 이 어른이 언제 여길 다녀가셨는가?”
  “아시는 사람이우? 내가 객점을 시작한 날이니 한 7, 8년은 됐겠네요.”
  “이 어른으로 말할라 치면 조선 제일의 시인이시네. 아마도 지금쯤은 돌아
가셨을지도 모르겠구먼. 저 간판과 시 잘 간직하시게. 술값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이상의 값어치가 있는 귀한 글일세.”
  산운 이양연. 김삿갓이 흠모해 마지않는 풍류시인이었다. 수많은 인연이 그
렇게 세월의 거리를 두고 엇갈리는 게 인생 아니던가.

  김삿갓이 구월산이 있는 은률 땅으로 접어들었을 때는 이듬해 가을이었다.
워낙 산자수명한 고을들이라 가는 곳마다 발길이 쉬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백두산 금강산 묘향산과 함께 조선의 4대 명산 중 하나인 구월산은 여덟 고을
에 둘러싸여 있는 황해도의 중심이요 상징이었다. 「삼국유사」에 겨레의 시조
인 환인 환웅 단군 3대가 모두 구월산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을 뒷받침이라도 하
듯, 구월산에는 단군대 어천석(御天石) 사왕봉(思王峰) 등의 신적(神籍)과 함
께 거석문화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그 인연으로 구월산은 아사달산 궁홀 백악
증산 삼위 서진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김삿갓은 꼭대기에 있는 천재단에 올라
참배한 뒤 구월산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단풍으로 불타는 울창한 숲에도 역사
의 숨결이 배어 있는 듯하여 방랑의 피로가 말끔히 가셨다.

  산을 내려오는 길로 해주로 향했다. 해주는 황해도의 소재지로 억수로 번성
한 도회지였다. 문득 이율곡의 로맨스가 생각났다.

  天姿綽約一仙娥     타고난 그 자태 선녀처럼 아름다운데
  十載相知意態多     사귄 지 10년에 사연도 많았구나.
  不是吾兒腸木石     너도 나도 목석이 아니건만
  只緣哀弱謝芬華     몸이 약한 탓에 따먹을 수 없으니 아쉽기만 하구나.

  아홉 번의 과거에 모두 장원을 차지한 조선조 최고의 천재 이율곡은 말년에
황해도 감사로 재직했는데, 열세 살 먹은 동기 유지에게 첫눈에 홀딱 반해버렸
다. 끝내주는 미색에 다양한 재능까지 갖추었으니, 병약한 율곡으로서는 환장
할 노릇이었다. 하여 매일 알몸으로 껴안고 자면서도 양물이 동하질 않아 품지
못한 안타까운 심경을 시로 달랬던 것이다.

  김삿갓은 고향동무들이 넣어준 전별금으로 수양매월(首陽梅月) 두 장을 샀다.
오래 전부터 욕심을 내오던 물건이었다. 장인(匠人)으로부터 직접 산 수양매월
은 조선 최고의 먹으로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었다. 수양매월은 소나무를
태워 가장 높이 올라가는 그을음인 초연(超煙)을 모아 만든 것으로, 조선의 선
비들이라면 누구나 탐을 냈지만 워낙 비싸 손에 넣기가 어려웠다. 장인은 옹진
에서 나는 돌로 손수 만든 매화연(梅花硯)을 선사하여 수양매월을 알아주는 김
삿갓의 안목에 답례했다. 조선 선비에게 벼루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황주를 거쳐 평안도로 넘어가기 직전, 김삿갓은 양도 접경에 걸쳐 있는 희환
산에 올랐다. 희환산에는 환희정(歡喜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는데, 그 아래로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오열탄(嗚咽灘)이라는 여울이 휘돌아가고 있었다. 옛날 황주
고을 선위사가 안악기생 명월과 뜨겁게 사랑하던 중 내직으로 발령을 받아 한
양으로 떠나던 날, 두 남녀가 여울 가에서 부둥켜안은 채 하염없이 흐느껴 울
었다 하여 붙인 이름이었다. 기암괴석 사이로 도도하게 흘러내리는 여울물은
스스로도 오열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계수(溪水)가 바위에 부딪히며 일으킨
물보라는 쏟아져 내리는 햇빛을 받아 오색영롱한 무지개를 이루었는데, 계곡의
절경에 걸린 무지개는 영락없이 천상으로 올라가는 다리였다.

  김삿갓은 황홀경에 취해 계곡을 거슬러 계속 올라갔다. 깎아지른 절벽이 백
척이 넘는 문성대(文星臺)에 이르자 때마침 보름달이 두둥실 떠올랐다. 문성대
아래는 3백 평은 족히 될 너럭바위가 펼쳐져 있었다. 오색단풍과 맑은 계수에
달빛이 쏟아지니 바로 선경이었다. 김삿갓은 북받쳐 오르는 감흥을 누를 길 없
어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고금을 막론하고 중국이나 조선의 선비들은
달을 특히 좋아했으니, 이태백은 취중에 달을 쫓다가 채석강에 빠져 죽지 않았
던가. 오열탄 계곡은 금강산 옥류동 계곡에 못지않은 추색(秋色)으로 물들어
있어 김삿갓의 발목을 이틀이나 더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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