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삿갓

살꽃이 보다 깊은 추정(秋情)

깊은산속 2010. 8. 10. 10:03

장단을 거쳐 개풍 땅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봄이 깊어 있었다. 개풍에는 진
작부터 가보고 싶어 하던 진봉산이 있었다. 조선천지에서 철쭉이 가장 아름답
기로 유명한 산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멀리서 봐도 온 산에 만개해 있는 철쭉
은 불이라도 타오르듯 화사하기 그지없었다. 산세는 매우 험준했지만 김삿갓은
차오르는 숨길을 고르며 위로, 위로 올라갔다. 철쭉꽃은 남정네의 손길을 기다
리는 농염한 처녀처럼 물오른 꽃송이를 하늘거리고 있었다. 그때 벼랑 위에 피
어 있는 철쭉 한 그루가 김삿갓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너무나 탐스러워 도저히
지나칠 수 없었다. 김삿갓은 그 탐스러운 철쭉꽃을 꺾기 위해 벼랑을 오르다가
세 길이나 되는 절벽에서 떨어져 정신을 잃었다.

  두런거리는 소리에 정신이 든 것은 다음날 아침이었다. 지게를 짊어진 두 젊
은이가 걱정스런 눈길로 김삿갓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그가 눈을 뜨자 반색을
했다.
  “이 사람이 살아 있네그려.”
  “어서 업고 약국으로 데려가세. 많이 다친 모양이니 조심해야 하네.”
  한 사람은 김삿갓을 업고 한 사람은 뒤에서 받친 채 약국에 당도했다. 60줄
의 의원은 환부를 구석구석 살펴보더니 증상을 설명했다.
  “왼쪽 다리와 오른쪽 팔이 부러졌네. 그보다 떨어지는 충격으로 전신이 짓
이겨져서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되었네. 머리를 안 다친 게 그나마 요행일세.”
  “의원님께서 이리 보살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완쾌되는 데 얼마나 시
일이 걸리겠습니까?”
  “아직 생사도 장담할 수 없으니 조급해하지 말고 기다리게. 살아난대도 완
쾌되자면 반년은 실히 걸릴게야.”
  반년이라면 약값이 만만찮을 터, 김삿갓은 생각 끝에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의원님. 실은 제가 정처 없이 떠도는 걸객이라 수중에 돈이 없습니다. 약
값이 수월찮을 터인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이 사람아. 생사여부도 장담하기 어려운 판국에 돈 걱정부터 하는가? 그건
완쾌되고 난 뒤에 생각하기로 하세.”

  그날부터 의원의 치료가 시작되었다. 온 몸의 상처에 꼼꼼히 약을 붙인 뒤
부러진 팔다리에 부목을 대어 동여맸다. 움직임이 매우 불편했지만 통증이 한
결 줄어들어 견딜 만했다. 김삿갓이 억지로 몸을 일으켜 의원과 겸상으로 식사
를 하고 있을 때였다.
  “여보게 송당, 여기 낙상환자가 왔다던데 아직 안에 계신가?”
  방안으로 들어선 사람은 의원과 비슷한 연배의 스님이었다. 김삿갓은 생면부
지의 스님이 자신을 찾자 의아하여 바라보고 있었다. 스님은 의원과 절친한 사
이인 듯 반갑게 수인사를 나눈 뒤 김삿갓을 향해 합장을 하며 인사했다.
  “소승 천석사 주지 범어라고 합니다. 혹 시선 김삿갓 선생이 아니신지요?”
  “예. 시선은 아니지만 김삿갓은 맞습니다. 어떻게 저 같은 걸객을 아시는지
요?”
  김삿갓은 평생 처음 발을 들여놓은 개풍 땅에 자신을 아는 사람이 있어 깜짝
놀랐다. 의원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니 나도 삿갓선생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는데, 이렇게 만나다니 반
갑구료.”
  의원의 말투가 단번에 ‘하오’ 조로 바뀌었다. 범어스님이 내력을 설명했다.
  “오늘 마을에 내려왔다가 낙상한 선생을 업고 왔던 두 젊은이를 만났지요.
그 사람들 말이, 선생을 업고 산을 내려오려는데 선생이 ‘저기 떨어져 있는
삿갓을 좀 가져다주시오’ 하더랍디다. 그래서 한 젊은이가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데 까짓 삿갓이 문제요?’ 했더니 선생이 왈, ‘저 삿갓은 내 목숨보
다 중한 것이니 꼭 주어다주시오’ 하더라는 것이었소. 그 얘기를 듣고 단번에
삿갓선생인 줄 짐작하고 달려오는 길입니다.”
  “예, 그런 일이 있었지요. 그런데 그 이전에는 어떻게 저를 알고 계셨습니까?”
  “연전에 금강산에 갔다가 장안사 공허스님으로부터 자세한 얘기를 들었지요.
시 짓기 내기를 했다가 코가 납작해졌다던데, 졌다는 얘기를 그리 유쾌하게 하
는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금강산에서는 만나는 스님마다 삿갓선생을 알고 있
더이다.”
  “아, 그러셨군요. 그런데 공허스님께서는 제게 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게
많은 깨우침을 주셨습니다. 그 분은 유불선에 두루 통달하신 분이니 저 같은
걸객이 어찌 감히 이겼다 할 수 있겠습니까?”
  “겸양의 말씀. 그런데 여기보다는 아무래도 절이 지내시기 편할 것 같으니
우리 절로 가시지요. 송당, 괜찮겠지?”
  송당은 의원의 호였다. 의원은 응급조치를 충분히 취했으니 그래도 탈은 없
을 것이라 했다. 김삿갓은 감사의 표시로 진봉산 철쭉꽃을 보고 느꼈던 감회를
시로 지어 의원에게 건네주고는, 그 길로 들것에 실려 천석사로 갔다.

  범어스님은 지극정성으로 김삿갓을 보살폈다. 신도들의 집을 샅샅이 찾아다
니며 산골을 구해다 갈아 먹여 뼈도 신속하게 아물어 붙었다. 무엇보다 바깥출
입을 할 수 없는 김삿갓의 처지를 배려하여 무시로 드나들며 손수 요강을 비워
다주는 정성은 참으로 황송했다. 어느 정도 거동이 편해지자 범어스님은 느닷
없이 시 짓기 내기를 제안했다. 자신이 먼저 지으면 김삿갓이 대구를 받치는
방식이었다.
  “안 그래도 심심하던 차에 잘 되었군요.”
  김삿갓의 명성을 익히 안다면서 시 짓기 내기를 걸어올 땐 범어스님도 상당
한 수준이리라. 김삿갓은 범어스님의 운을 기다렸다.

  春雲萬里魚鱗白     봄 구름 만 리에 걸쳐 비늘처럼 흰데,(범어)
  古木千年鹿角高     천년 고목이 사슴뿔처럼 높고도 높다.(김삿갓)
  假僧木折月影軒     가죽나무 가지에 달그림자 걸려 있고(범어)
  眞婦采美山姙春     참며느리나물 맛을 보니 산은 봄을 뱄나보구나.(김삿갓)

  참며느리나물을 뜻하는 ‘眞婦采’는 가죽나무를 뜻하는 범어 스님의 ‘假僧
木’에 대한 대구였다. 내기를 마친 두 사람은 유쾌하게 웃으며 서로 상대방의
시재를 칭송했다.
  며칠 뒤였다. 범어 스님은 시를 한 수 지어 와서는 스승으로서 잘못된 곳을
바로잡아 달라 청했다.

  山欲渡江江入口     산은 물을 건너고자 강가에 서 있고
  水將穿石石頭廻     물은 돌을 뚫고자 돌머리를 돌아간다.

  “참으로 호방한 성품이 잘 나타난 시로군요. 허나, 시는 저마다 개성에 따
라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는 수단인데 어찌 감히 남의 시에 손을 대겠습니까?”
  “정 그러시다면 삿갓선생께서는 그런 광경을 보셨다면 어떻게 표현하시겠
습니까?”
  그 말이 그 말이었지만 더는 거절하지 못하고 같은 주제로 시를 지었다.

  山不渡江江入口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해 강가에 서 있고
  水難穿石石頭廻     물은 돌을 뚫기 어려워 돌머리를 돌아간다.

  한 구절에서 한 글자씩만 바꿔 완전히 반대되는 생각을 담은 시였다.
  “생각하시는 깊이나 시적 감각이 역시 시선이십니다. 저는 아직 자연을 대
하는 마음이 순리를 따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범어스님은 취향은 다양했으나 하나같이 깊이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이후
김삿갓은 성심을 다해 그의 시를 살펴주었다. 어느 날은 종이를 가져다가 뚫어
진 창문을 발라주고는 시 한 수를 청했다. 김삿갓은 즉석에서 시를 써서 건네
주었다.

  風失古行路     바람은 다니던 옛길을 잃었고
  月得新照處     달은 새로 비칠 곳을 얻었도다.

  “창구멍 하나 막은 걸 두고 어이 이처럼 명쾌하게 자연의 변화를 그려낸단
말입니까?”
  범어스님의 찬탄은  끝이 없었다.

  상처가 거의 아물어 겨우 해우소 출입을 할 수 있게 된 어느 날이었다. 범어
스님은 김삿갓과 연배가 비슷한 여신도를 한 사람 데려왔다.
  “아랫마을에 사는 안산댁이라는 분인데 우리 절의 살림을 맡고 있는 보살님
입니다. 어려서 부친이 서당 훈장을 하셨기 때문에 글도 잘합니다. 앞으로 삿
갓선생께서 보행연습을 많이 하셔야 할텐데, 며칠에 한 번씩 오셔서 부축도 해
드리고 말동무도 해드리면 아무래도 회복이 빠를 것 같아 부탁했더니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오늘부터라도 함께 연습을 하시지요.”
  “이런 고마울 데가 있나. 스님, 고맙습니다. 그리고 보살님도 힘든 부탁을
들어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그러나 며칠에 한 번씩 오리라던 범어스님의 말과 달리 안산댁은 하루도 거
르지 않고 김삿갓을 찾아왔다. 보행을 할 때 부축해주는 건 기본이고, 방안 청
소와 함께 김삿갓이 입고 있는 옷가지까지 벗겨 깨끗하게 빨아주곤 했다. 미안
하여 몇 번이나 말렸지만 웃기만 할 뿐 듣지 않았다.
  “보살님 덕분에 보행이 하나도 힘들지 않구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할
지…”
  “은혜라니요, 선생님 같이 훌륭한 분을 가까이서 모실 수 있는 것만 해도
과분한 영광인걸요. 좋은 시나 자주 들려주십시오. 아둔해서 지을 줄은 모르지
만 들을 줄은 안답니다.”
  안산댁과 함께 걸으니 눈에 띄는 모든 사물이 정겹게 다가왔다. 김삿갓은 북
받쳐 오르는 희열을 큰 소리로 읊조리거나 선지(宣紙)에 써서 안산댁에게 선사
했다. 안산댁은 성품이 조용하고 대화수준도 높아 김삿갓의 말동무로는 제격이
었다.
  “보살님은 천석사와 어떤 인연으로 살림까지 맡게 됐나요?”
  “어릴 때부터 부모님을 따라 다니기 시작했으니 30년이 넘는 인연이지요.
절의 살림을 맡고 있다는 말씀은 주지 스님의 두둔이시고요, 남편이 오래 병석
에 누워 있다 보니 살림이 궁핍하여 제가 천석사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는 처지
랍니다.”
  오래 인연을 맺어온 사이도 아닌데 숨기고 싶을 집안일까지 밝히는 안산댁이
새삼 고마웠다. 
  “남편이 병석에 누워 있는데 이렇게 매일 폐를 끼쳐도 되는지…”
  “누워 있으니까 아침저녁으로 보살펴드리면 됩니다. 집에는 어머님도 계시
고요.”

  몇 달이 지났다. 그날따라 안산댁은 김삿갓을 부축하지 않고 곁에서 따라 걷
기만 했다. 그새 두터워진 친분을 빌미로 김삿갓이 농을 걸었다.
  “오래 부축하다 보니 이젠 귀찮아진 모양이지요?”
  “아니, 그런 게 아닙니다. 이제는 선생님 혼자서 걷는 게 오히려 회복에 도
움이 될 것 같아 오늘부터 부축을 그만둔 것입니다. 서운하시면 다시 해드릴까
요?”
  “아니, 농담이오. 내가 보살님의 깊은 뜻을 왜 모르겠소.”
  “아이 짓궂으셔라. 난 또 선생님이 정말 오해하시는 줄 알고 당황했잖아요.”
  배시시 웃는 양쪽 볼에 보조개가 앙증스러웠다. 
  “보살님 덕분에 하루도 빼놓지 않고 보행연습을 해서 혼자 걸어도 무리가
없소. 이제 보살님과 작별할 때가 된 것 같군요.”
  작별이라는 말에 안산댁이 화들짝 놀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김삿갓도 말을
해놓고 보니 비감한 생각이 들어 시 한 수를 읊조렸다.

  笑仰蒼穹坐可迢     웃으며 우러러보니 하늘은 아득한데
  回思世路更迢迢     지나온 길 돌아보니 더욱 아득하구나.
  也應身業斯而己     지나간 나의 인생 이미 그러했거늘
  漸覺靑雲分外遙     청운의 뜻 아득함을 이제 깨달았노라.

  “흑!”
  김삿갓이 읊조리는 시를 다 들은 안산댁이 숨을 급박하게 들이키며 그예 눈
물을 주르륵 흘렸다. 김삿갓도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먼 데 하늘
을 올려다보았다.
  “선생님의 시는 너무나 허망합니다. 엉 엉 엉.”
  부처님 뒤뜰이고 내외가 지엄했으나 김삿갓은 살며시 그녀를 품에 안았다.
안산댁은 더욱 큰 소리로 흐느끼며 김삿갓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김삿갓도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가을로 접어들면서 김삿갓은 낙상을 당하기 전의 건강 상태를 회복했다. 걸
음걸이도 예전처럼 자연스러워졌다. 떠날 조건이 다 갖춰졌지만 단 한 가지,
안산댁을 생각하면 영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러나 가슴 밑바닥에서 솟구
쳐 올라오는 방랑벽을 더는 억누를 수가 없었다.
  “스님, 그 동안 폐 많이 끼쳤습니다. 내일은 그만 떠날까 합니다.”
  “아니, 오래 머무시면서 소승의 시눈[詩眼]도 좀 틔어주시고 세상 얘기도
들려주실 것이지 쾌차하자마자 떠나시겠다니 어인 말씀이시오? 제가 혹 불편하
게 해드린 일이라도 있는게요?”
  “불편하다니요, 당치않습니다. 제가 원체 역마살이 심해 오래 전부터 좀이
쑤시기 시작했습니다. 스님의 온정을 생각하면 오래 머물고도 싶지만, 오라는
데는 없어도 갈 데가 워낙 많다 보니…”
  “기어이 떠나시겠다면 어쩔 수 없기는 합니다만… 안산댁에게도 말씀드렸겠
지요?”
  “안산댁에게는 아직…”

  오래지 않아 안산댁이 찾아와 김삿갓의 방 앞에서 헛기침을 했다. 평소 찾아
오던 시각이 아니어서 김삿갓이 놀라 밖으로 나왔다.
  “선생님, 내일 떠나신다는 말씀이 사실입니까?”
  안산댁은 벌써 눈물자국이 낭자했다. 그 모습이 너무 짠하여 김삿갓도 눈시
울이 뜨거워졌다. 김삿갓은 늘 함께 걷던 숲길로 앞서 걸어갔다. 안산댁이 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범어스님께나 보살님에게 너무나 폐를 많이 끼쳤구려. 아무래도 신세를 갚
을 길이 없으니 내내 미안하오.”
  “섭섭하게 그런 말씀 마세요. 내일 떠나시면 어디로 가십니까?”
  “원체가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걸객이라…”
  숲길로 접어든 두 사람은 달이 떠오를 때까지 긴긴 이별의 포옹을 나누었다.
그러나 차마 그 이상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이 더 간곡
했던 것이다. 밤이 깊어지자 두 사람은 발길을 돌려 천석사 앞에 이르렀다. 안
산댁은 말없이 합장배례하고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 산을 내려갔다.

  이튿날 아침, 김삿갓은 범어 스님에게 하직인사를 하고 천석사를 떠났다. 절
뒤로 돌아 고개를 올라가는데 행자 하나가 김삿갓을 부르며 헐레벌떡 달려왔다.
행자는 보자기에 싼 술병 하나와 편지 한 장을 전해주고는 부리나케 오던 길로
되돌아갔다.

  ‘전송조차 못해드리는 제 처연한 마음을 헤아려주실 줄 믿습니다. 시 한 수
를 빌어 저의 심정을 대신할까 합니다.’

  欹枕寒窓睡思遲     베개 베고 누워도 잠은 안 오고
  一燈明滅照雙眉     등잔불만 너울너울 눈에 비치네요.
  眞緣不必陽臺夢     참다운 인연이라면 살꽂이가 무슨 소용,
  錦帶留着學士詩     임이 남겨주신 시를 외고 또 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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