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삿갓

한양의 두 인심

깊은산속 2010. 8. 10. 10:05

                    <서울의 성문. 남대문이 사라진 게 이채롭다>

  김삿갓은 원주에 있는 치악산을 향해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서도로 행선
지를 정해놨지만 길목에 있는 명승고찰 또한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저물녘
에 한 동네에 이르니 고대광실 기와집에 동네사람들이 한마당 모여서 웅성거리
고 있었다. 문간에는 그 집 노비로 보이는 장정 몇이 서 있었다.
  “이보시오, 이 댁에 무슨 큰일이 있소?”
  “내일이 우리 진사어른 회갑이라 잔치준비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럼 하룻밤 신세를 져도 되겠구려.”
  “글쎄요, 집에 큰 우환이 있어서 진사어른께서 받아주실는지…”
  “그게 무슨 말이오? 내일이 회갑인데 큰 우환이라니요?”
  “회갑잔치를 벌이기 위해 황소 한 마리에 돼지 다섯 마리를 잡고 사또를 초
대했는데, 막상 사또가 오실지 아니 오실지를 몰라 걱정이 태산이라오.”
  “아니, 초대를 했는데 사또가 답장을 안 보냈단 말이오?”
  “답장을 받아오기는 했는데, 열흘이 지나도록 그 내용을 알 수 없어 진사어
른께서 골머리를 앓고 있다오. 아무리 궁리해도 몰라서 온 마을의 선비들을 다
불러다 물어봐도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으니…”
  “내가 그 편지를 한번 보고 내용을 알려드리리다.”
  “글쎄요.”
  장정들은 김삿갓의 행색을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영 미덥잖은 표정을 짓고 있
었다.
  “아, 진사어른이 걱정이 태산이라는데 뭘 망설이시오? 어서 가서 고하지 않
고.”
  한 장정이 아주 못마땅한 걸음걸이로 느릿느릿 걸어가더니, 갈 때와는 달리
유관(儒冠)을 쓴 노인과 함께 달려 나왔다. 답답하던 중이라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주인공인 오 진사가 직접 나온 것이었다. 김삿갓은 끌리다시피 사랑으로
들어갔다. 사랑에는 유관을 쓴 10여 명의 선비들이 둘러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
는데, 답장을 해독하지 못해 민망하던 참이라 하나같이 뚱한 표정들이었다. 김
삿갓은 선참자가 따라주는 술부터 몇 잔 들이켜고는 오 진사가 내민 군수의 답
장을 읽어봤다.

  來不往
  來不往

  단 여섯 글자였다. 김삿갓은 군수의 재치가 썩 마음에 들었다.
  “진사어른께서는 사또와 꽤나 친분이 두터운 모양이지요?”
  “이르다 뿐이겠소. 사또와 나는 동문수학한 사이로 진사시(進士試)에 나란
히 입격했다오. 그러나 관운이 없는지 나는 대과에 떨어지고 사또는 합격하여
오늘날에는 관과 민으로 신분이 갈라졌소이다.”
  그 정도 친하니 남의 집 경사를 앞두고 짐짓 친구를 희롱했을 터였다. 그러
나 진사 입장에서는 난감할 만도 했다. 군수가 참석한다면 동구까지 나가 맞아
들이는 게 예의지만, 참석하지 않는다는 답장인데도 공연히 동구에서 기다렸다
가는 웃음거리 되기 십상일테니 말이다.
  “사또께서는 잔치에 참석하겠다고 답장을 보내신 것이니 그에 맞춰 준비를
하시지요.”
  “예? 그 여섯 자 속에 그런 뜻이 담겨 있단 말이오?”
  “예, 그렇습니다.”
  방안으로 들어서는 김삿갓의 행색을 보고 지금까지 백안시하며 자기들끼리
대화를 주고받던 선비들이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첫 번째 來不往은‘來不, 往', 즉‘오지 말라고 해도 갈텐데’라는 뜻이고,
두 번째 來不往은‘來, 不往?', 즉‘오라고 하는데 왜 안 가겠소’하는 뜻입니
다. 사또께서 어지간히 장난끼가 많은 모양입니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선생. 참으로 난감한 처지를 잘 해결해주셨소이다. 이런 고마울 데가 어디
에 또 있겠소.”
  새로 내온 술상은 회갑상을 방불케 하는 진수성찬이었다. 김삿갓은 푸짐한
잔치음식을 곁들여 밤새 술을 얻어 마시고는, 날이 밝아오자 군수를 맞이하기
위해 분주한 틈을 타 주인장 몰래 길을 나섰다.

  김삿갓은 산 중턱에 있는 한 절에 여장을 풀고 열흘 동안 치악산을 둘러본
뒤 한양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때는 이미 초겨울이라 길에는 인적이 뜸했다.
여주에 접어드니 한양으로 가는 길이 두 갈래였는데, 하나는 남한강 줄기를 따
라 양평을 거쳐 가는 길이요 하나는 산악지대인 이천 광주를 지나는 길이었다.
물길을 따르자니 산길이 아깝고, 산길을 따르자니 물길이 아쉬워 김삿갓은 지
팡이점을 쳤다. 언제나처럼 지팡이를 던져 그 끝이 가리키는 쪽을 택하니, 이
번에는 이천 방향이었다. 김삿갓이 쉬엄쉬엄 이천 광주를 거쳐 한양에 당도한
것은 이듬해 초봄이었다. 겨울이라 하나 이천 광주고을 또한 볼 곳이 많았던
것이다. 동쪽에서 한양으로 들어가는 길은 흥인문과 광희문이 있었다. 광희문
은 시구문(屍口門)이라 하여 한양 백성들의 송장을 밖으로 내보내는 문이었다.
  ‘그렇다면 송장이 나오는 문으로 거슬러 들어가 보자.’
  김삿갓의 행적은 매양 이러했다.

  김삿갓의 첫 한양 나들이는 놀라움으로 시작되었다. 성문을 사이에 두고 그
바깥과 안이 지옥과 극락처럼 판이했다. 집들은 번듯번듯했고 길에는 인적이
붐벼 어깨를 맞부딪치며 걸어야 했다. 거리마다 시장이요 시장마다 값진 물건
들이 지천으로 쌓여 있었다. 김삿갓은 한양을 한눈에 내려다보기 위해 남산으
로 올라갔다. 남산 팔각정에는 예로부터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올라 예찬의 시
를 남겼다. 한양의 좌향(坐向)은 과연 헛소문이 아니었다. 북으로는 삼각산과
북악산이 병풍처럼 둘러서 한양을 감싸고 있고 남으로는 사시사철 수량이 풍부
한 한강이 흐르며 젖줄 역할을 하고 있었다. 강 건너에는 넓디넓은 마천들 송
파들 양천들이 한양의 물산을 풍요롭게 해주고, 우람한 관악산이 파수꾼인 듯
지켜서 있었다.

  그러나 감흥은 오래가지 못했다. 날이 저물어 하룻밤 신세를 지기 위해 대문
을 두드렸으나, 집집마다 굳게 잠긴 대문 안에서는 박대하는 욕지거리만 낭자
했다. 김삿갓은 인정(人定. 밤 10시에 통행금지를 알리려 28번을 치는 종소리)
이 울린 뒤에도 거리를 돌아다니며 대문을 두드리다가 순라꾼들에게 걸렸다.
심문 결과 한양이 초행인 시골사람임을 알고 순라꾼 중 하나가 김삿갓을 광교
밑에 있는 한 움막으로 데려다주었다. 어린 땅꾼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땅
꾼은 천민 중의 천민이었으나 원체 귀천을 개의치 않는 김삿갓에게는 그저 다
같은 사람일 뿐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살림살이는 풍족해 보였다. 김삿갓이
인정 때까지 문전박대당한 얘기를 하자 대장인 듯한 아이가 저녁상을 차려 내
왔는데, 반찬은 대갓집 못잖았다.
  “초면인데 이리 대접해주니 고맙기 그지없네.”
  “무슨 말씀을요, 우리 집에 오신 손님인데요. 마음껏 드시고 편히 쉬시다
가세요. 그리고 이것은 뱀술인데 한번 드셔보세요.”
  김삿갓은 평생 처음 뱀술까지 얻어마셨다.
  “뱀을 잡아 팔면서 살다보면 장사가 잘 안될 때는 더러 곤란을 겪기도 하겠
구나.”
  “천만에요. 뱀 장사는 안 될 때가 없는걸입쇼. 돈이 넘쳐나는 사람일수록
계집을 더 찾게 마련이고, 그러다보면 아랫도리 힘이 부치잖아요. 한양에는 그
런 사람이 늘려 있어 늘 뱀이 모자란답니다요. 참구렁이 같은 건 부르는 게 값
인뎁쇼.”
  “뱀이 정말로 정력에 효험이 있느냐?”
  “저희들이야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으니 모르지요. 그러나 먹어본 양반네
들이 더 자주 찾는 걸 보면 효험이 있길래 그러는 거 아니겠습니까?”

  다음날 아침이 밝기가 무섭게 아이들은 갈퀴와 망태 하나씩을 챙겨서 뱀 사
냥을 나갔다.
  “어르신. 한양구경 실컷 하시고 밤에는 또 우리 집에 와서 주무세요.”
  “말은 고맙지만 갈 곳이 따로 있어 또 올 수는 없겠구나. 고맙게 하룻밤 신
세 잘 지고 간다. 다들 열심히 잘 살거라.”
  대장인 듯한 아이는 부득부득 김삿갓의 소매 속에 노자 열 냥을 넣어주었다.
자신들을 천민취급하지 않은 데 대한 보답이었다.
  한양 거리는 대낮인데도 하나같이 대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다. 집들은 한 번
도 본 적이 없는 화려하고 큰 고대광실이었지만 그 인색한 인정머리에 정나미
가 떨어졌다. 김삿갓은 서둘러 무악재를 넘어 한양과 작별했다. 평생 다시는
오고싶지 않은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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