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삿갓

관북의 땅끝에서 들리는 쓸쓸한 발길

깊은산속 2010. 8. 10. 10:15

 

 

소연의 집을 나온 김삿갓은 오래도록 그리움에 가슴이 찢어질 듯했다. 여직
한 여인에게 그토록 마음을 빼앗겨본 적이 없었다. 관북의 겨울은 혹독했다.
김삿갓은 소연의 아름다운 자태와 비단결 같은 마음씨, 특히 정신을 홀리는 살
꽂이 맛을 떨치기 위해 걷고 또 걸었다. 허리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은 걸음을
무겁게 했다. 눈은 내리고 또 내렸다. 김삿갓은 눈과 관련된 옛 시인들의 시를
읊조리기도 하고 손수 시를 짓기도 하면서 함관령 아래 이르렀다. 날이 저물어
갈 무렵 저만치 산기슭에 객점이 하나 나타났다.
  “아니 이 눈 속에 어인 일로 예까지 오셨수?”
  머리가 희끗한 노파가 방문을 열어젖히고 김삿갓을 맞았다.
  “하룻밤만 신세를 지고 함관령을 넘어갈까 하오.”
  “어림도 없는 소리. 이미 보름 전부터 길이 끊겨 봄이 오기 전까지는 함관
령을 넘어갈 수 없소. 꼭대기에는 아마 스무 자도 넘게 눈이 쌓였을게요.”
  김삿갓은 바랑을 내려놓고 노파와 마주 앉았다.
  “실은 노자 없이 유리걸식하는 신센데 예서 겨울을 나자면 어이하면 좋겠소?”
  “노자가 없으면 굶으면 되지 무슨 걱정이우?”
  말은 그렇게 해놓고도 이후 삼월이 올 때까지 노파는 하루 세 끼 더운밥을
지어 김삿갓을 극진히 대접했다. 간혹 인근에서 영감들이 술추렴을 올 때면 김
삿갓도 불러내어 술대접을 하기도 했다. 이윽고 봄이 되어 김삿갓은 행장을 챙
겨 길을 나섰다.
  “할머니, 너무 오랫동안 신세를 졌으니 이 은혜를 어이 갚아야 할지 모르겠
습니다. 그 동안 잘 보살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극락 갈려고 부처님께 시주한 것이니 너무 고마워할 거 없수. 돌아올 때
꼭 다시 들리기나 하시우. 그때도 내 며칠이고 식사공양을 하리다.”

  함관령 꼭대기에는 아직도 눈이 덜 녹아 빙판을 이루고 있었다. 김삿갓은 함
관령 주변의 절경을 감상하며 조심조심 고개를 넘었다. 흥원에 도착한 것은 그
날 석양 무렵이었다. 마침 가까운 산기슭에 있는 암자에 들어 하룻밤 신세를
지고, 다음날부터 흥원팔경을 구경하러 다녔다. 조상들은 명승지를 참 좋아하
여 조선팔경부터 시작해서 각 지방마다 고을마다 팔경을 정해두지 않은 곳이
없었다. 흥원팔경 가운데는 절부암의 전설이 가장 가련했다. 절부암은 명태잡
이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남편의 삼년상을 지낸 뒤 바다로 뛰어내?스스로
목숨을 끊은 절부(絶婦) 우아를 기리기 위해 붙인 명칭이었다.

  김삿갓은 북청 단천을 거쳐 학성까지 왔다. 북으로 올수록 산세(山勢)도 점
점 험해졌고 인심도 점점 사나워졌다. 계절은 어느덧 여름이었다. 인심이 사나
워 며칠씩 굶기가 일쑤라 몸이 점점 쇄약해지기 시작한데다, 모기떼의 극성으
로 삼복중에 학질까지 걸리고 말았다. 다행히 인심 좋은 서당 훈장을 만나 침
식은 해결되었으나 학질로 인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가을로 접어들어
서야 학질이 떨어졌을 때는 피골이 상접하여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건강을 회
복하려면 제대로 보신을 해야 할텐데 수중무일푼이니 그게 걱정이었다. 때마침
산 너머 마을에 사는 한 부자가 김삿갓을 찾아왔다.
  “내 원척(遠戚)이 상을 당했기로 귀공의 명성을 듣고 제문을 좀 얻어갈까
해서 찾아왔소이다.”
  정중한 부탁이라 김삿갓은 공을 들여 제문을 써주었다.
  “참으로 명문이로소이다. 조상에게 면목이 서겠소. 내 찾아오기를 참으로
잘했구려.”
  그는 백배 사례한 뒤 30냥을 내놓고 돌아갔다. 거금이었다. 김삿갓은 절반을
그 동안 잘 보살펴준 훈장에게 사례금으로 내놓고 나머지로 몸보신을 했다. 기
력을 완전히 회복했을 때는 어느덧 초겨울이었다. 김삿갓은 길주를 향해 길을
나섰다. 그러나 길주는 관북지방 가운데서도 가장 인심이 사나워 명천을 거쳐
종성으로 발길을 돌렸다. 오랑캐의 침입에 시달리다 보니 그러려니 했지만, 사
람을 숫제 도둑놈 취급을 하는 데야 돌아볼 마음이 없어졌던 것이다.

  종성은 조선의 북쪽 끝이었다. 고구려가 망하면서 여진족이 내려와 살던 땅
을 세종 때 탈환한 뒤 종성도호부를 설치하여 다스려오고 있었다. 이 먼 땅끝
까지 온 데는 어렴풋한 사연이 하나 있었다. 김삿갓이 금강산을 내려와 함흥을
향해 북행을 시작했을 때였다. 산중의 허름한 객점에 들려 하룻밤 잠을 청하려
니, 어울리지 않게도 아리따운 기생이 술상을 받쳐 들고 김삿갓의 방으로 들어
왔다.
  “소녀 매화라 하옵니다. 혹 김삿갓 선생님이 아니신지요?”
  “네가 나를 어떻게 아느냐?”
  “며칠 전 어느 노승께서 하룻밤 묵어 가셨는데, 저녁진지를 드시면서 수발
하는 제게 선생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언젠가 이리로 지나갈 것이라고도 하
셨습지요. 오늘은 제가 대접하겠으니 마음껏 드십시오. 실은 오늘이 이 집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거든요.”
  “이런 고마울 데가 있나. 그런데 마지막이란 말은 무슨 뜻인가?”
  “내일 아침이면 고향인 종성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나중에 혹 종성에 들리
시거든 이 매화를 꼭 한번 찾아주십시오.”
  그날 밤 매화는 스스로 김삿갓의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왔다.
  “선생님. 이제 헤어지면 언제 다시 뵐지 모르는 몸, 내치지 마시고 한 번만
안아주셔요.”
  얼굴은 수수했으나 매화의 살결은 구름보다 부드러웠다. 그녀의 폭신한 가슴
에 얼굴을 묻자 김삿갓은 차가운 겨울바람으로 거칠어진 몸과 마음이 이른 봄
잔설처럼 스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노승의 말을 듣고 오랫동안 기다려온
방랑시인 김삿갓, 매화는 온갖 정성과 쌓아온 기교를 총동원하여 흠모하던 정
인의 심신을 위무했다.

  김삿갓은 한 객점에 들려 술을 마시다 말고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주모. 혹 매화라는 기생을 모르는가?”
  “손바닥만 한 종성 땅에서 매화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저기 보이
는 향교 뒤 초가집이 매화네 집입니다.”
  그러나 매화의 집에서는 기막힌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홉 식구의 호구
지책으로 매화는 몇 달 전 청국의 한 부호에게 후취로 팔려가고, 가족들은 이
집을 내놓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는 것이었다. 김삿갓은 다리에 힘이 빠져
봉당에 주저앉았다. 사연을 들려준 노파는 측은한 듯 김삿갓을 바라보며 조심
스럽게 물었다.
  “혹 삿갓선생이 아니신지요?”
  “예, 맞습니다만…”
  “아이고, 왜 이제야 오십니까? 매화가 얼마나 기다렸다구요.”
  “다 운명이겠지요. 매화는 청국 어디쯤 살고 있는지 혹 아십니까?
  “뒷산에 올라가면 빤히 보이는 두만강 건너 마을에 살고 있답니다. 이사 가
기 전 동생들이 가끔 올라가 강 건너 누이가 사는 동네를 내려다보며 눈물짓곤
했답니다.”
  김삿갓은 그 길로 뒷산으로 올라가 종일 강 건너 매화가 산다는 동네를 내려
다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밤길을 걷다가 아늑한 토굴을 찾아들어 잠을 잘 때였다. 집을 나선 뒤 처음
으로 상복을 입은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 김삿갓을 나무랐다.
  “병연아. 너는 집을 떠난 지 10년이 넘었건만 어이 한 번도 들리지 않는단
말이냐.”
  잠을 깬 김삿갓은 혹 어머니가 돌아가신 건 아닐까 싶어 황망히 귀가 길에
올랐다. 할아버지를 매도한 기구한 팔자를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다시는 찾지
않겠다고 뛰쳐나온 집이언만, 김삿갓은 꿈에 나타난 어머니의 일갈에 마음을
바꾸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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