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삿갓

명판관 김삿갓

깊은산속 2010. 8. 10. 10:50

 김삿갓은 금강산을 2백리 앞둔 강원도 회양땅에 이르렀다. 회양군은 1952년
북한이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금강군으로 이름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는 참인데, 저만치 동헌 안이 떠들썩했다. 안으로 들어서니
몇 가지 송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뒷전에서 지켜보고 있자니 군수의 판단이 제
법 명석하고 공정했다. 어지러운 세상에 저 정도 판관이면 이 고을 사람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겠구나 여기며 동헌을 나설 때였다.
  “여보시오, 선생. 잠시 나 좀 봅시다.”
  돌아보니 놀랍게도 군수가 직접 나와 김삿갓을 불러 세운 것이었다.
  “사또께서 어인 일이십니까?”
  “드릴 말씀이 있으니 시간을 좀 내어줄 수 있겠는지요?”
  김삿갓은 군수를 따라 동헌 옆 관사로 들어갔다. 군수는 관비(官婢)를 시켜
주안상을 들였다. 촛불 아래서 보니 용모도 매우 준수했다.
  “소관은 회양군수 이범호라 하오. 선생은 영월에 사시던 김병연 선비가 아
니신지요?”
  김삿갓은 깜짝 놀랐다.
  “사또께서는 한낱 걸객을 어이 그리 정확하게 알고 계신지요?”
  “선생이 장원하신 영월백일장에서 소관이 차석을 했었소이다. 이후 한양으로
올라가 과거에 급제하여 지난해 회양군수로 제수되어 내려왔지요. 선생이 삿갓
을 쓴 채 금강산을 향하고 있다는 풍문을 들은 적이 있는 터라, 송사를 지켜보
고 서 계시는 모습에 혹시나 해서 모셔온 것이오. 이리 다시 만나게 되다니 참
으로 반갑기 그지없소이다.”
  “백일장에 동참했던 분이 과거에 급제하여 군수가 되셨다니 저로서도 기쁘
기 한량없소이다. 늦었지만 감축 드리오. 미천한 나그네를 이리 반겨주시니 그
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치하말씀 고맙소이다. 회양땅에 발을 들여놓은 김에 며칠 노독이라도 풀며
소관에게 좋은 말씀 들려주고 가시지요.”
  “말씀은 고마우나 나 같은 떠돌이가 사또께 무슨 말씀을 드리겠소이까. 하
룻밤만 신세지고 떠났으면 하오.”
  “아닙니다, 풍문을 통해 선생의 기지와 학문을 익히 들은 바 있소이다. 실
은 송사 가운데 쉬 해결할 수도, 그렇다고 시일을 끌 수도 없는 사안이 있어
속앓이를 하고 있던 중이라 선생의 조언을 듣고자 하오.”
  “동헌에서 송사를 다루시는 솜씨를 보며 감탄을 했었는데, 사또같이 영민하
신 분이 처결하지 못한 송사를 나처럼 아둔한 떠돌이가 어찌 도움을 줄 수 있
겠소.”
  “겸사의 말씀. 내막을 한번 들어보시고 고견을 부탁드립니다.”
 
  민가에 불이 나서 40대 가장이 타 죽었다. 그러나 부모와 형제들은 이구동성
으로 부인이 남편을 살해한 뒤 고의로 집에 불을 질러 소사(燒死)로 위장했다
고 주장하며, 장례도 치르지 않고 시신을 보관해둔 채 부인을 고발했다. 형리
들을 밀파하여 탐문조사를 벌인 결과 부부는 평소에 사이가 무척 나빠 싸움이
잦았으며, 불이 나기 직전에도 이웃에 들릴 만큼 큰 소리로 다투었다는 것이었
다. 게다가 부인은 성질이 몹시 포악하여 이웃간에도 크고 작은 분쟁이 끊이질
않았다.
  “사또의 판단은 어느 쪽이오?”
  “살해한 뒤 소사를 위장한 것으로 확신하지만 증거를 찾을 길이 없어 애를
태우고 있소이다. 그렇다고 오래 끌어서도 안 되는 것이, 시신이 썩어가고 있
질 않소이까.”
  “의외로 쉽게 증거를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군수는 김삿갓의 제의에 따라 시신을 보관하고 있는 민가로 미행(迷行)했다.
군수는 가족들에게 엄히 보안을 명하고 김삿갓과 함께 시신을 살폈다. 김삿갓
이 예측한 대로 망자(亡者)의 입 속은 깨끗했다.

  이틀 뒤의 이른 아침, 동헌에서 공개재판이 열렸다. 온 고을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라 동헌 앞마당에는 방을 보고 몰려든 주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
다. 동헌 한복판에는 회양군수가 앉아 있고, 그 옆에는 회양군수의 통지를 받
고 금성군수가 달려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의 규
정에 따라 살인사건이 일어나면 관할군수가 초검(初檢)을 한 연후에 이웃 군수
가 시신을 복검(覆檢)하여 장계를 올리도록 되어 있었다. 김삿갓도 군수의 청
에 따라 동헌 한쪽에 앉아 재판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라에 묶여 꿇어앉아 있
는 망자의 부인은 고개를 빳빳하게 든 채 동헌을 노려보고 있었다. 부인으로부
터 조금 거리를 두고 무명으로 감싼 시신이 놓여 있었고, 그 곁을 분개한 가족
들이 지켜서 있었다. 마당 구석 소각장에는 두 무더기의 장작이 쌓여 있고, 그
아래는 중돼지 두 마리가 밧줄에 묶여 요란하게 꽥꽥거리며 발버둥치고 있었다.
회양군수의 준엄한 논고가 시작되었다.
  “죄인은 듣거라. 너는 남편을 살해한 뒤 집에 불을 질러 시신까지 훼손하고
도 아직까지 뉘우침이 없으니, 네 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냐?”
  “사또께서는 어이하여 남편을 잃은 불쌍한 년을 이리도 모욕하십니까? 잠시
이웃마을에 다녀왔더니 집에 불이 나서 남편이 타 죽은 것을, 무슨 원한이 있
어 이년에게 뒤집어씌운단 말입니까?”
  부인은 오열했다. 둘러서 있던 주민들이 술렁거렸다. 평소 사이가 나쁘기는
했지만 설마 남편을 죽이기까지야 했겠느냐는 동정론이 우세하던 참이었다. 군
수도 주민들의 동향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며칠째 고심하고 있던 중이었다.
  “닥치지 못하겠느냐! 지금이라도 이실직고하면 형을 감해줄 것이로되, 끝까
지 발뺌을 하다가 증거가 드러나면 참형을 면치 못하리라.”
  “증거가 있었으면 진작에 내세워서 쇤네를 죽일 것이지 어이 이리 기일을
끌며 피를 말려 죽이려 하십니까?”
  “이웃사람들이 불이 나기 직전에 부부싸움 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증언을 하
는데도 끝까지 잡아떼겠단 말이냐?”
  “이웃사람들이야 평소에도 쇤네를 시기해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으니 불
리한 증언을 할 밖에요.”
  “좋다. 네년이 정 그렇게 독하게 나온다면 지금부터 증거를 보여주겠다.”
  군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운집한 주민들이 일시에 잠잠해지며 군수를 주시
했다.
  “여러분, 지금부터 여러분이 지켜보는 가운데 증거를 공개하겠습니다. 먼저
사람이나 짐승이나 불에 타 죽으면 입안에 그을음이 끼어 있습니다. 산 채로
불에 타면 숨을 쉬느라 연기를 들이마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은 뒤에 불에
타면 입안이 깨끗합니다. 지금부터 저쪽에 있는 돼지 두 마리 가운데 한 마리
는 산 채로, 한 마리는 죽인 뒤에 각각 불에 태운 뒤 입안을 검사해보도록 하
겠습니다. 그런 연후에 시신의 입안을 검사하여 사실을 확인하겠으니 눈여겨보
시고 본관의 판결에 승복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곤장으로 입을 열게 하던 몽매한 시절, 군수
의 증거재판은 그 자체만으로도 화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곧이어 돼지 화형이 진행되었다. 주민들은 소각장으로 몰려가 한 마리는 산
채, 한 마리는 죽인 뒤 불에 그을려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형리들은 돼지가
적당하게 타자 불을 끈 뒤, 높은 탁자 위에 먼저 산 채 그을린 돼지를 올려놓
고 입을 벌렸다. 군수의 얘기대로 입안에 그을음이 가득했다. 주민들이 웅성거
렸다. 죽인 뒤에 태운 돼지의 입안은 신기할 정도로 깨끗했다. 탄성이 터져나
왔다.
  군수는 그때까지 시신을 지키며 비감에 잠겨 있던 가족 앞으로 갔다.
  “재판을 위해 부득이 시신의 입안을 좀 검안해야겠소. 허락해주시겠는지요?”
  군수의 공손한 태도에 가족들은 황송해하며 조심스럽게 백포(白布)를 벗겼다.
보기에도 흉측한 시신의 모습에 주민들은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찌푸렸다. 형
리를 시켜 시신의 입을 열게 했다.
  “우~”
  시커멓게 그을린 외관과 달리 입안은 깨끗했다. 두 군수는 차례로 시신을 자
세히 검안(檢案)한 뒤 동헌으로 올랐다. 회양군수가 선고를 내렸다.
  “지금까지 탐문과 실험을 통해 조사해본 결과 망자 이기수는 부인에 의해
살해된 뒤 그 시신이 다시 불에 탄 것으로 확인되었다. 범인인 이기수의 처를
살인, 방화 및 사체훼손 혐의로 관동감영으로 압송한다. 저년을 당장 압송하라!”
  금성군수는 관동감사에게 올리는 장계를 적어 형리에게 넘겨준 뒤 회양군수
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서둘러 임지(任地)로 돌아갔다.

  “참으로 명판결이었소이다. 수고가 많으시었소.”
  “모두가 선생의 지혜 덕분이었지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술자리는 화기애애했다. 당시에는 서로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스쳐 지나갔지
만, 두 사람은 마치 영월백일장 이후 지금까지 교분을 지속해온 것처럼 우애
가 깊어져 있었다.
  김삿갓은 군수의 간곡한 청을 뿌리치지 못해 낮에는 인근 절경을 찾아 감상
하고 저녁에는 주안상을 사이에 두고 군수와 마주 앉아 정담을 나누며 계속 관
사에 머물고 있었다. 며칠 뒤였다.
  “참으로 아리송한 송사가 있어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있소. 한 번 더 선생
의 도움을 받아야겠소.”
  황소 한 마리를 두고 두 촌부가 서로 제 소라고 우기는데, 양쪽의 주장이 팽
팽하여 어느 편 손을 들어주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외딴집에 사는
촌부는 소의 생김새에 대한 진술에 신빙성이 있고, 큰마을에 사는 촌부는 증인
이 여럿 있어 부인하기 어려웠다. 형리들을 밀파하여 조사해봤지만 결론은 동
일했다.
  “간단한 일이군요. 소에게 판결을 위임하시구려.”
  “예? 소에게 판결을 위임하다니요?”
  “고삐를 풀어주고 뒤를 따라가면 소가 알아서 제 집을 찾아갈 게 아니겠습
니까?”
  “옛?”
  군수는 경악했다. 왜 그처럼 간단한 일을 생각지 못했을까? 김삿갓의 지혜가
새삼 경이로웠다.
  “선정에 몰두하다보면 너무 긴장하여 쉬운 방도도 눈에 띄지 않을 때가 있
는 법이지요. 손에 든 물건을 찾느라 두리번거릴 때가 있듯이 말이오. 나는 한
발 물러나 있는 사람이니 쉬 눈에 띄었을 뿐 사또의 자비로움과 형안에 비하겠
소이까.”
  “무슨 말씀인지 새겨듣겠소. 여러 가지로 깨닫는 바가 많소이다.”
  황소의 주인은 외딴집에 사는 촌부로 밝혀졌다. 거짓 주장을 한 큰마을 촌부
와 그를 거짓 도운 증인들은 죄질에 따라 장형(杖刑)을 가한 뒤 방면했다. 주
민들은 군수를 명관이라 칭송했다.

  군수의 간곡한 만류에 못 이겨 달포를 관사에 머문 김삿갓은 도저히 좀이 쑤
셔 견딜 수 없었다. 그날도 동헌에서 재판을 지켜보고 있던 중 속이 좋지 않다
는 핑계를 둘러대고 관사로 돌아온 김삿갓은 행장을 챙겨 줄행랑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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