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훈장이 된 김삿갓
점심때가 지나자 아이들이 몰려왔다. 김삿갓은 무봉이 마련해준 유관 차림
으로 학동들을 맞았다. 어제 본 일곱 명의 코흘리개 외에 나이 든 아이들 열
두 명이 더 왔다. 그 중에는 마을입구에서 처음 만났던 소년도 끼어 있었다.
나이 든 아이들은 각자 집에서 공부하고 있던 「소학」 「중용」 「사략」 등
을 들고 왔다. 김삿갓은 아이들의 기초를 확인해보기 위해 「중용」을 들고
있는 소년에게 물었다.
“너 天地玄黃이 무슨 뜻인지 아느냐?”
“예. 하늘천 따지 검을현 누를황입니다.”
“그건 한자의 소리고, 그 뜻이 뭔지 아느냐고 물은 것이다.”
아이는 입을 열지 못했다. 이어 다른 아이에게 다른 구절을 물었으나 이하동
문이었다. 김삿갓은 「천자문」을 배우는 아이들과 새로 온 소년들을 한데 모
아 첫 강의를 시작했다. 뒤편에서는 무봉도 귀를 쫑긋 세우고 김삿갓의 강의를
경청하고 있었다.
“너희들이 서당에 나와 공부를 하는 것은 글자를 익히기 위함이 아니라 그
뜻을 알아 천지의 이치를 깨닫기 위함이다. 天地玄黃을 예로 들자면 각 글자는
하늘천 따지 검을현 누를황이 맞지만 이는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는 이
치를 깨우쳐주기 위해 만든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寒來署往은 ‘추위가 오
면 더위가 간다’, 秋收冬藏은 ‘가을에 거둬들여 겨울에 갈무리한다’, 雲勝
致雨는 ‘구름이 올라가 비가 된다’, 露結爲霜은 ‘이슬이 맺혀 서리가 된다’
는 천지의 이치를 설명하는 구절이다. 글자만 알고 뜻을 모르는 경우를 일러
감투글이라고 하는데, 머리에 감투를 쓰고 있으되 스스로 보지 못한다는 뜻이
다. 너희들은 오늘부터 열심히 사물의 이치를 깨우쳐 감투글이 되지 않도록 노
력해야 한다.”
아이들은 숙연해졌다. 처음 듣는 말이었던 것이다. 훈장이랍시고 지금까지
아이들에게 뜻이 아니라 소리만 가르쳤던 무봉도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한 미소
를 짓고 있었다.
“「천자문」 속에는 농사꾼인 너희 부모님들의 얘기도 들어 있다. 治本於農
이란 말은 ‘농사가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라는 뜻이고, 務玆稼穡은 ‘모두
들 심고 거두는 일에 힘쓴다’는 뜻이다. 그러니 부모님들이 하시는 농사일을
소중히 여기고 열심히 도와드려야 한다. 알겠느냐?”
“예!”
대답소리에 천정이 무너질 듯했다. 아이들은 첫날부터 흥미를 가지고 김삿갓
의 설명을 귀담아 듣기 시작했다. 다음날부터는 도무지 공부라곤 싫어하여 서
당에 올 생각도 않던 아이들까지 하나둘 서당에 나오기 시작했다. 기왕지사 발
을 들여놓은 일, 김삿갓은 각자의 수준에 맞도록 과정을 정하여 엄격하게 가르
쳐나갔다. 그러나 대부분 아둔하여 진도는 지지부진했다.
훈장생활이 6개월을 넘어서자 김삿갓은 슬슬 좀이 쑤시기 시작했다. 한자리
에 안주하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았다. 다른 일 같았으면 벌써 줄행랑을 놨겠지
만, 20여 명의 학동들과 정이 들고 책임감이 생겨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김삿갓은 무봉에게 후임자를 구하라고 몇 번이나 요청했지만 무봉은
그때마다 온갖 핑계를 대며 후임자 구하기가 어렵다고 김삿갓을 눌러 앉히곤
했다. 김삿갓은 따분한 심경을 달래기 위해 틈만 나면 뒷산에 올라가곤 했는데,
덕분에 다리에 근육이 생기면서 몸이 많이 가벼워졌다. 뒷산 중턱에는 해월정
이라는 오래된 정자가 하나 있었다. 해월정 난간에 서면 산 사이로 동해가 내
려다보였다. 특히 달이 뜰 때는 바다에 비치는 달빛이 장관을 이뤄 해월정이라
는 이름을 실감나게 했다.
그날 밤도 해월정을 다녀오는 길에 서당 앞에서 봉녀와 마주쳤다. 봉녀는 남
의 이목도 아랑곳 않고 반색을 했다.
“아이구, 삿갓선생님. 이게 얼마만입니까? 그 동안 평안하셨습니까?”
“예, 덕분에…”
“안 그래도 삿갓선생님을 한 번 뵙고싶었습니다.”
“예? 저를요? 무슨 일로…”
“긴히 드릴 말씀도 있고, 또…”
봉녀는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시간을 좀 내주실 수 없겠는지요?”
“야밤이라 남의 눈에 띄면 피차 좋을 게 없으니 꼭 하실 말씀이 있으면 밝
은 날 오시지요.”
“실은 그 동안 삿갓선생님을 흠모하여 조용히 한번 뵙고싶었습니다.”
“엄연히 향수어른의 부인이신데 농이 지나치십니다. 방금 하신 말씀은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말은 못 들은 걸로 하겠다고 했지만 김삿갓도 이십대 중반의 뜨거운 남자,
봉녀의 노골적인 유혹에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봉녀가 아주 싫지는 않
았던 것이다. 봉녀는 다시 한번 긴 한숨을 내쉬더니 휙 돌아서 집으로 올라갔
다. 김삿갓도 여자를 품은 지 오래 되어 회가 동하지 않는 바는 아니었으나 봉
녀는 너무 위험한 여자였다. 향수의 첩실을 건드렸다고 소문이라도 났다가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김삿갓은 헛기침을 하고 약국으로 들어섰다.
“삿갓선생 어서 오시오.”
무봉은 마침 환자를 보고 있었다. 무봉은 돌팔이진맥으로 약을 지어 환자를
돌려보낸 뒤 안방에 대고 술상을 차려오라 일렀다.
“혹 오다가 봉녀를 만나지 않았소?”
“예, 바로 앞에서 만났습니다만…”
“무슨 말 없던가요?”
김삿갓은 봉녀에게 들은 말이 있어 뜨끔했으나 태연하게 대답했다.
“뭐 매씨와 저 사이에 나눌 얘기가 있겠습니까?”
“실은 조금 전에 들려서 삿갓선생의 옷을 한 벌 지어 드려야겠다더군요.”
이번에는 무봉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 옷을요? 제 옷을 매씨께서 왜요?”
“지금 입고 계신 옷이 너무 오래되어 보기가 민망하다면서…”
마침 술상이 들어와 한동안 대화가 끊겼다. 김삿갓의 잔에 술을 가득 채운
무봉이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짐작은 하고 계시겠지만 봉녀가 삿갓선생을 사모하고 있는 것 같소이다.
집안이 궁핍하여 향수어른의 첩실로 들여보내기는 했지만, 젊디젊은 것이 팔자
에 없는 독수공방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됐습니다.”
김삿갓은 잠자코 술잔만 비웠다.
“그래서 부탁인데, 우리 봉녀를 좀 위로해줄 수 없겠소?”
“위로의 말씀이라면 얼마든지…”
“내 말은 그게 아니라, 희유~”
무봉은 차마 동생과 잠자리를 같이해달라는 말은 못하고 한숨만 쉬고 있었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술자리는 일찍 끝났다.
백락촌에 겨울이 깊어가고 있었다. 동해안 산중이라 눈이 한번 내리면 허리
까지 차오르기 일쑤였다. 그 동안에도 김삿갓은 여기저기 부탁하여 후임자 물
색에 여념이 없었다. 원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 동안 노자도 얼추 모아두었다.
아무리 거절해도 가세가 넉넉한 집에서 한사코 사례금을 놓고 갔기 때문이었다.
무봉은 무봉대로 김삿갓을 잡아둘 궁리를 거듭하고 있었다. 장차 향수어른이
돌아가신 뒤 동민들을 장악하자면 김삿갓의 지혜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자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불쌍한 봉녀와 잠자리를 마련하여 미끼로 삼아야 하겠는데,
도무지 그 꾀가 떠오르지 않아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 사이 봉녀가 지어온
솜옷을 억지로 김삿갓에게 입혔지만, 진정 고맙다는 인사뿐 그 정도 일로 마음
을 열 위인은 아니었다.
그날도 허리까지 차오르는 눈을 헤치며 김삿갓은 해월정을 다녀오는 길이었
다. 그 즈음에는 계절에 관계없이 거의 매일 해월정을 찾았다. 서당 어귀에 다
다랐을 때였다.
“저, 지나가는 과객인데 혹 하룻밤 묵어갈 데가 없겠는지요. 길을 잘못 들
어 아직 잠자리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아, 그러십니까? 제가 마침 이 서당 훈장인데, 누추하지만 괜찮으시다면
하룻밤 묵어가시지요.”
김삿갓은 반갑게 길손을 맞았다. 의관을 정제한 사나이는 40대로 보였다. 방
에 들어 식사를 마친 뒤 김삿갓은 주안상을 차려 길손을 대접하며 본론을 꺼냈
다. 사나이는 한양에 사는데, 고향 안변에 계시는 어머니가 편찮으시다는 기별
을 받고 문병 가는 길이라 했다.
“어려운 부탁이지만 이 서당을 좀 맡아주실 수 없겠는지요? 제가 부득이한
사정으로 훈장자리를 내놓고 어디를 좀 가야하는데 후임자가 없어 미뤄오고 있
습니다.”
“고마운 제안이지만 어머니 문병을 가는 길이라 받아들일 수 없겠습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그래도 김삿갓은 아쉬운 마음에 종이를 꺼내 시 한 수를 써내려갔다.
飛來片片三月蝶 흩날리는 눈송이는 춘삼월 나비 같고
踏去聲聲六月蛙 밟으면 발밑에서 개구리 소리가 나네.
寒將不去多言雪 주인장은 추워서 못 간다고 눈을 핑계 대며
醉惑以留更進盃 혹시나 취해서라도 머무를까 다시 술잔을 권하네.
유명한 「雪景」이라는 시다. 기막힌 비유와 기승전결의 조화로, 특히 ‘눈
을 밟으면 개구리소리가 난다’는 표현은 현대 문장에서도 왕왕 모방된다. 읽
기를 마친 나그네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참으로 절묘한 시로군요. 어머님 병환만 아니라면 솔깃할 법도 합니다그려.
요즘 영월 땅 김삿갓이라는 사람이 여기저기 다니며 써준 시가 온 나라에 회자
되어 나도 읽어본 적이 있소이다만, 김삿갓도 이 정도 경지에까지는 이르지 못
한 것 같더이다.”
이튿날 이른 아침, 사나이는 부득부득 길을 떠났다.
산속이라 유난히 긴 겨울이 가고 수목이 파릇파릇 움트는 봄이 왔다. 김삿갓
은 연일 금강산이 아른거려 더는 배길 수가 없었다. 마침 훈장자리를 맡겠다는
선비가 하나 나타났다. 인터뷰를 해보니 한참 모자라는 얼치기였지만 최소한
무봉 수준은 넘는 듯하여 자리를 맡기기로 언약을 해두었다. 그 길로 김삿갓은
술을 한 병 사들고 무봉을 찾아갔다. 술이 몇 순배 돈 뒤 김삿갓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무봉선생. 적임자를 하나 찾아 훈장자리를 인계하기로 했으니 이제 떠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뭐라구요?”
무봉은 놀라 술잔을 떨어뜨렸다. 떠나겠다는 김삿갓과 가서는 안 된다는 무
봉의 논의가 길었지만 아무도 상대방을 설득하지는 못했다. 김삿갓을 잡기 위
해 무봉은 집에 있는 술을 다 내놓으며 밤이 이슥하도록 대작했다.
“누구요?”
향긋한 지분 냄새와 함께 품속을 파고드는 기척에 놀라 잠이 깬 김삿갓은 사
태를 파악하지 못해 얼떨떨하게 물었다.
“선생님, 놀라지 마셔요. 저 봉녀예요.”
놀라지 말란다고 놀라지 않고 배기겠는가. 더구나 그녀는 실오라기 한 올 걸
치지 않은 채 김삿갓이 자고 있는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온 것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목소리를 줄이셔요. 정 거절하시면 소리를 지르겠어요.”
참으로 난감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아랫도리는 주책없이 부풀어 오르고 있
었다. 20대 중반의 건장한 청년, 보드라운 살결이 품속으로 파고드는데 부풀어
오르지 않으면 외려 문제 아닌가. 동네사람들에게 들켜 몰매를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더는 견디기 어려운 판에, 오랜 세월 굶주려온 봉녀는 제 손으로 허
둥지둥 김삿갓의 바지를 벗기고 있었다. 김삿갓도 1년 이상 참아온 터라 더는
참지 멋하고 욕정을 폭발시켰다. 두 남녀는 새벽이 가까워올 때까지 한숨도 자
지 않고 잊을 만하면 또 엉키기를 계속했다. 첫닭이 울자 김삿갓은 유도심문에
들어갔다.
“이렇게 시작을 했으니 이제는 단 하루도 봉녀를 안지 않고는 잠을 잘 수가
없겠구료. 남의 이목에 띄지 않게 자주 만날 수 있겠소?”
“저야 삿갓선생님을 흠모하고 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선생님만 좋
으시다면 매일 밤이라도 찾아오겠습니다.”
“고맙소, 봉녀. 그럼 오늘 밤에도 찾아오시겠소?”
“이르다 뿐이겠습니까. 하루도 빼놓지 않고 찾아오겠습니다.”
“이 일은 무봉선생에게도 알리면 안 됩니다.”
봉녀는 한동안 김삿갓의 양물을 주물럭거리며 뜸을 들이더니 어렵게 입을 열
었다.
“실은 어젯밤에 오라버니가 저를 불러내더니,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밤에
는 선생님과 잠자리를 해야 한다기에…”
‘옳거니, 나를 옭아매려는 수작이렷다.’
“그러다가 향수어른이 눈치라도 채는 날에는 어쩌려고?”
“오라버니가 그 점은 염려 말라고 하셨습니다. 향수어른은 사흘 내로 돌아
가실거라고…”
“예? 무봉선생이 그걸 어떻게 아신답디까?”
“어렵게 약을 구해 매일 먹이는데, 사흘 내로 표나지 않게 돌아가시도록 조
제를 했답디다.”
더 우물거렸다간 독살의 공범이 될 올가미였다. 하루도 더 지체할 수 없는
위기였다.
“그건 무봉선생이 알아서 하실 일이고, 봉녀는 오늘 밤에도 꼭 오셔야 해요.”
“이미 말씀드렸잖아요. 선생님께서 끝까지 거절하시면 어쩌나 했는데, 이
렇게 미천한 저를 받아주셔서 정말로 고맙습니다. 실은 지금까지 향수어른과는
한이불 속에 누워 자기만 했지 한번도 교접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선생님이
제 첫 남자인 셈입니다. 이 인연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
겠습니다. 오늘 밤에도 꼭 오겠습니다.”
봉녀가 옷을 챙겨 입고 돌아가자마자 김삿갓도 행장을 챙겨 줄행랑을 놓았다.
이른 봄의 새벽공기가 상쾌하게 온 몸을 감쌌다. 그 동안 등산으로 단련된 다
리는 가볍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