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삿갓

백락촌에도 세월은 가고(1)

깊은산속 2010. 8. 10. 10:54
① 돌팔이 훈장
  노자는 떨어진 지 이미 오래요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행색도 봉두난
발에 옷은 다 헤져 밥이라도 한 끼 얻어먹으려면 거지취급 받기 십상이었다. 
인가는 아득하고 날은 저물어오는데, 종일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걸어온 탓에 
허기와 갈증이 자심했다. 김삿갓은 야산의 솔잎을 따서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동해가 가까운 강원도 산촌이라 때마침 불어온 시원한 해풍이 이마의 땀을 식
혀주었다. 이런 때일수록 집 생각이 간절하여 몇 번이고 돌아가고 싶은 유혹에 
빠지곤 했다. 그때 늙수레한 나무꾼이 다가왔다.
  “하룻밤 쉬어갈까 해서 그러는데, 이 근방에 혹 서당이나 절간이 없을까요?”
  “저기 보이는 고개를 넘어가면 백락촌이라는 제법 큰 마을이 있는데, 그 마
을에 서당이 하나 있소.”
  “어르신, 고맙습니다. 부디 만수무강하십시오.”
  김삿갓의 공손한 인사에 감복하여 나무꾼이 한마디 덧붙였다.
  “서당의 훈장은 스스로 무봉이라 하는데 약국도 겸하고 있다 합디다.”
  백락촌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김삿갓은 괴이쩍은 생각이 들었다. 훈장이 약국
을 겸하고 있다는 얘기는 전대미문이었다. 무봉이란 이름도 천의무봉(天衣無縫. 
완벽하다는 뜻)에서 따왔을 터이니 학문을 좀 알기는 아는 모양이지만 허풍이 
너무 심하지 않은가.
  고개를 넘어서니 저만치 백락촌인 듯싶은 마을이 보였다. 심심산골에 그처럼 
큰 마을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마침 한 아이가 마주 오고 있었다.
  “얘야, 이 마을에 서당이 어디 있는지 아느냐?”
  “저 언덕 위에 큰 기와집이 보이지요? 저 집은 우리 마을에서 제일 부자인 
향수어른의 집이고요, 그 바로 아래 보이는 집이 서당입니다.”  
  향수(鄕首)란 요즘으로 치면 동네이장을 말하는데, 돈도 많고 인심도 후한 
마을 어른을 존중하여 일컫는 호칭이었다.
  “고맙구나. 그런데, 너도 서당에 다니느냐?”
  열두어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은 김삿갓의 행색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심드
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웬걸요. 저는 한번 나갔다가 그만두었어요.”
  “아니, 글공부를 하려면 진득해야지 어째서 한번 나갔다가 그만둔게냐?”
  “서당 훈장이 실력이 꽝이거든요.”
  김삿갓은 호기심이 동했다. 백락촌을 알려주던 나무꾼도 무봉 얘기를 할 때 
뭔가 마뜩찮은 표정이더니, 이 아이는 노골적으로 ‘실력이 꽝’이라 하지 않
는가.
  “아니, 글공부를 하러 갔으면 훈장을 받들어 모시고 열심히 해야지 스승을 
그처럼 헐뜯는 법이 어디 있느냐!”
  “에이, 모르시고 하시는 말씀이세요. 저는 무봉선생이 오기 전에 이미 「천
자문」을 뗐거든요. 그런데 「동몽선습」을 배우려고 물었더니 화를 내며 가르
쳐주지 않는거예요. 밑천이 딸리는거지요.”
  소년이 가리켜준 대로 고래등같은 기와집 아래 서당이 있었는데, 그 옆에는 
‘百中局’이라는 약국간판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김삿갓은 안으로 들어가 훈
장을 찾았다. 유관(儒冠)을 정제하고 나타난 40줄의 사나이는 한눈에 봐도 훈
장과 의원을 겸할 만한 실력은 없어 보였다.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소?”
  “저는 양주고을에 사는 김삿갓이라 합니다. 지나는 길에 하룻밤 신세를 질
까 하고 찾아왔소이다.”
  무봉은 김삿갓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여기가 객점도 아닌데 어찌 하룻밤 신세를 지겠다는게요?”
  거만하고 매정한 태도가 메스꺼웠으나 워낙 고단하던 터라 역정을 눌러 참고 
힘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무봉선생의 명성을 듣고 일부러 찾아왔으니 내치지 마시고 하룻밤 온정을 
베풀어주시지요.”
  명성을 듣고 찾아왔다는 말에 무봉은 표정이 누그러지며 김삿갓을 서당으로 
들였다. 서당에는 일곱명의 학동이 「천자문」을 펼쳐놓고 읽고 있었다. 하나
같이 코흘리개 조무래기들뿐이었다. 지루한 표정으로 「천자문」을 들여다보고 
있던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김삿갓에게 쏠렸다. 무봉은 학동들 앞에 앉자 위
엄을 갖추고 김삿갓에게 물었다.
  “그래, 귀공은 글공부를 얼마나 했소?”
  “많이는 못했고 사서삼경을 조금 읽었을 뿐입니다.”
  무봉은 놀란 표정으로 흠칫했으나 김삿갓의 행색을 다시 살피더니 말을 이었
다.
  “그러면 내가 운(韻)을 놓을테니 시를 한수 지어보겠소? 시가 운율에 맞으
면 선비로 대접하고 맞지 않으면 서당손님으로서는 적격이 아니니 다른 잠자리
를 찾아보도록 하오.”
  초대면인 내방객을 테스트해보겠다는 수작이 아니꼽기 그지없었지만, 학동들 
앞이라 김삿갓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배운 건 없지만 선생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도록 성심껏 지어보겠소이다.”
  무봉은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첫 번째 운을 뗐다.
  “멱.”
  멱(覓)이라는 글자는 시에는 잘 쓰지 않는 벽자(僻字. 흔히 쓰지 않는 까다
로운 글자)로 공부를 좀 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상대를 얕보고 골려줄 때 
가끔 사용하고 있었다. 김삿갓은 태연한 표정으로 운이 떨어지자마자 시를 읊
었다.
  “許多韻字何呼覓 하고많은 운자 가운데 왜 하필 멱자인가.”
  무봉도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두 번째 운을 뗐다.
  “멱.”
  운이란 같은 글자를 반복하는 게 아니지만 한두번 써먹은 수법이 아닌 듯했
다. 김삿갓은 망설이지 않고 운을 받았다.
  “彼覓有難況此覓  저번 멱도 어려웠는데 또 멱자란 말인가.”
  김삿갓의 막힘없는 대거리에 당황하는 기색이 드러나기 시작한 무봉은 틈을 
주지 않고 세 번째 운을 뗐다. 원래 운은 두번까지만 제시하고 세번째 운은 시
를 짓는 사람에게 맡기기 마련이지만, 처음부터 골탕을 먹이기로 작정한 훈장
은 거침없이 운을 놓았다. 
  “멱.”
  “一夜宿寢懸於覓  하룻밤 잠자리가 마캉 멱자에 달렸구나.”
  “멱.”
  “山村訓長但知覓  시골 훈장은 멱자밖에 모르느냐!”
  무봉은 아이들이 보는 앞인데도 불구하고 무릎걸음으로 김삿갓에게 다가앉으
며 고개 숙여 사과했다.
  “아이구 선생! 내가 사람을 잘못 보고 큰 결례를 했소이다. 이제부터 삿갓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겠소.”
  아이들을 보내고 나자 무봉은 김삿갓 앞에 정좌하고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내가 어찌어찌하다가 서당을 차려 훈장을 맡게 되었지만, 실은 「명심보감」
까지밖에 공부를 하지 못했소. 조금 전 삿갓선생이 ‘시골 훈장은 멱자밖에 모
르느냐’ 하고 호통을 치실 때, 지금까지 마을 주민들을 얕보고 잘난 체하던 
오만한 자부심이 벼락을 맞은 듯 사라지며 큰 깨우침을 얻었소.”
  “무슨 겸양의 말씀을요. 저는 다만 운에 따라 시를 지었을 뿐 무봉선생을 
질책할 의도는 추호도 없었습니다.”
  “굳이 변명하지 마시구려. 이미 제 본색을 다 파악하고 계실 줄 아오.”
  무봉은 나이를 떠나 지기를 만난 듯 자신의 내력을 털어놨다. 무봉의 본명은 
이진수로 강원도 양양에서 건달생활을 하다가 이 마을로 왔었다. 어릴 때는 가
세(家勢)가 넉넉하여 서당에서 글도 배웠지만, 아버지가 노름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면서 팔자가 오그라들었던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그마저 여의치 않자 
우연히 소개받아 알게 된 이 마을의 향수에게 열여섯살 먹은 누이를 첩실로 바
치고, 집을 한 채 얻어 서당과 약국을 차리게 된 것이었다.
  “「명심보감」까지밖에 공부하지 못한 분이 어이해서 서당을 차릴 생각을 
하셨소?”
  “손쉬운 호구지책으로 그만한 일이 어디 또 있소?”
  “그런데 약국까지 여신 걸 보면 그쪽으로도 공부를 좀 한게지요?”
  “어릴 때 이웃에 의원이 있어 들락거리며 귀동냥, 눈대중으로 배운 돌팔이
지요.”
  “아니, 그 정도 실력으로 어떻게 병을 고친답니까?”
  “아 배앓이 환자가 오면 익모초 환약을, 감기 환자가 오면 패독산을, 방사
(房事)가 과도해서 온 젊은이에게는 가미쌍화탕을, 산모에게는 불수산을, 몸이 
허약한 노인에게는 육미탕을 지어주면 되지 의원이 뭐 별거요?”
  건달생활에서 얻은 배짱인 모양이었다. 김삿갓은 실소를 흘렸다.
  “그러다가 제때 낫지 않으면 가만히들 있지 않을텐데요?”
  “아, 병이야 때가 되면 저절로 낫는 것이지 약 먹어서 낫는답디까?”
  하긴, 병이란 게 다 인체의 자연치유력에 의해 때가 되면 절로 낫는 것이지 
의원이 낫게 해주는 건 아니잖은가.
  “무봉선생께서는 혹 「동의보감」을 읽어보셨는지요?”
  “「동의보감」이 뭐요?”
  “지금부터 260여 년 전에 허준이라는 어의가 쓴 의약서입니다. 허준은 조선 
제일의 명의였으며, 「동의보감」은 조선에서 으뜸가는 의약서지요.”
  “아하, 명색이 약국을 열어놓고 입때까지 그런 훌륭한 의약서를 모르고 있
었다니 부끄럽기 그지없구려. 내 시간을 내어 「동의보감」을 구해올테니 부디 
내용을 좀 가르쳐주시구려.”
  “아니, 내일아침이면 떠나갈 과객한테 어인 말씀이오?”
  무봉은 자세를 바로하여 솔직하게 말했다.
  “나는 애당초 훈장그릇이 못되는 사람이었으니 삿갓선생께서 이 서당을 맡
아 아이들을 좀 훈도해주십시오.”
  깍듯한 존대였다. 그러나 김삿갓은 시골마을 훈장자리 같은 것에 얽매일 생
각은 추호도 없었다.
  “무봉선생은 어디서 무엇을 하다 굴러온 지도 모르는 생면부지의 걸객에게 
그 어인 과분한 부탁이시오?”
  “내 사람을 몰라보고 운자로 희롱을 하다가 혼이 났지만, 삿갓선생의 언행
으로 보아 학문이 깊은 줄 알게 되었소. 백락촌은 120여 호나 되는 큰 마을인
데, 몇 년 전에 서당을 하던 훈장이 죽은 뒤로 이어갈 사람이 없어 나 같은 엉
터리 훈장이 떠맡게 된 것이라오. 어려운 부탁인 줄 알지만, 자라는 아이들을 
생각해서 얼마간이라도 좀 맡아주구려. 그러잖아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가 아
이들의 학문에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걸 깨우쳤다오.”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 가능하면 며칠간 쉬어갈 수 있도록 부탁할 요량이었
지만, 한 동네에 장기적으로 눌러앉아 있는 건 김삿갓의 기질에 맞지 않았다.
  그때 인기척이 들리더니 한 여인이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오라버니, 올케랑 아이들은 다 어딜 갔습니까?”
  스무 살 전후로 보이는 아낙이었다. 보아하니 향수의 첩실로 보냈다는 무봉
의 누이 같았다. 자색은 그런 대로 흠잡을 데가 없었으나 표정이 좀 어두워 보
였다.
  “안방에 없으면 어디 마실이라도 간 모양이지. 참 봉녀야, 이 어른께 인사 
여쭙거라. 앞으로 서당을 맡아 아이들을 가르치실 훈장선생이시다.”
  김삿갓의 동의도 없이 무봉은 아예 못을 박을 심산인 모양이었다. 그리고는 
김삿갓에게 봉녀를 소개했다.
  “삿갓선생, 이 아이가 바로 향수어른의 안댁인 내 누이 봉녀요. 앞으로 잘 
좀 지도해주시구려.”
  봉녀는 민망할 정도로 김삿갓을 빤히 쳐다보며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그런데 봉녀야. 며칠째 향수어른이 안 보이던데 별고 없으시냐?”
  “별고가 없기는요, 맨날 골골하는 거 오라버니도 잘 아시면서.”
  봉녀의 대답에 짜증이 묻어 있었다.
  “하긴 고희를 넘긴 연세니…”
  김삿갓은 깜짝 놀랐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첩실로 주었다는 얘기를 듣고
도 향수가 그토록 늙은 줄은 짐작도 못했었다. 
  “참 봉녀야. 귀한 어른이 오셨으니 오늘은 네가 저녁상을 좀 차려서 내오너
라. 향수어른께 말씀드려서 특별히 잘 차려내야 한다.”
  “예, 오라버니.”
  대답을 한 봉녀는 김삿갓을 향해 쌩긋 웃으며 목례를 하고는 방을 나갔다. 
김삿갓은 내내 궁금해 하던 걸 물었다.
  “무봉선생. 이 깊은 산중에 어찌 이리 큰 동네가 생겼소?”
  “외지사람에겐 한 번도 발설한 적이 없지만, 이제 한식구나 다름없으니까 
삿갓선생한테만 믿고 말씀드리겠소. 이 마을은 향수어른이 개척했는데, 젊은 
시절 도적떼를 이끌고 큰돈을 모은 분이오. 나이가 들면서 나쁜 일에서 일체 
손을 떼고 무리를 이끌고 여기에 터를 잡은 것이지요. 소문을 듣고 전국에서 
못된 짓을 하던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는데, 모두들 개과천선하여 지금은 
이웃간에 화목하게들 지내고 있답니다.”
  여러 곳을 떠돌아 왔지만 참으로 희한한 동네였다.
  오랜만에 맛보는 진수성찬에 반주까지 실컷 얻어걸친 김삿갓은 아침 일찌감
치 일어났다. 저녁식사 자리에서 마지못해 승낙의 대답은 하기는 했지만, 훈장
자리를 맡을 의사는 눈곱만치도 없었다. 무봉이 깨기 전에 줄행랑을 놓는 게 
상책이었다. 그런데 머리맡에 놔뒀던 삿갓과 바랑이 온데간데없었다. 그때 마
침 무봉이 들어섰다.
  “삿갓선생, 편히 주무시었소?”
  “아, 예. 무봉선생도 편히 주무셨는지요?”
  김삿갓은 뜨끔하여 마주 인사를 나누었다.
  “예. 그런데 무얼 찾고 있는 중이오?”
  “아니 저, 삿갓과 바랑이 없어서…”
  “당분간은 쓰일 데가 없을 것 같아 잘 보관해두었으니 걱정 마시오. 무엇이
든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말씀하시는 즉시 구해드리리다.”
  김삿갓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때 마당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봉이 문을 여니 마을사람들이 몰려와 있었다.
  “어허, 일찍들 오셨습니다그려. 들어들 오시지요.”
  70대로 보이는 노인 둘에 사오십대 장년이 여섯 명이었다. 그들은 허리를 숙
여 김삿갓에게 인사를 올렸다.
  “새로 훈장님이 부임하셨다기에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앞으로 우리 아이들
을 잘 좀 가르쳐주십시오.”
  무봉이 선수를 친 것이다. 마을사람들은 한 가지씩 들고 온 선물을 내밀었다. 
한 노인은 씨암탉을 새끼로 묶어 가져오기도 했다. 김삿갓은 각중에 빼도 박도 
못할 처지가 된 것이다.
  “배운 것은 없지만 성심껏 가르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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