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삿갓

밤송이는 벌이 쏘지 않아도 절로 벌어지고

깊은산속 2010. 8. 10. 10:59

   나무 한 그루 새소리 하나에도 일일이 탄성을 내뱉고 시를 지으며, 김삿갓은
금강산을 향해 걷고 있었다. 해질녘이 되자 지쳐 유숙할 곳을 찾으니, 한 촌로
(村老)가 저쪽으로 20리쯤 가면 서당이 있다고 일러주었다. 그러나 서당은 50리
나 가서야 나타났다. 시골사람들의 거리인식은 매양 이 모양이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한두 번 당하는 것도 아닌데다 20리면 어떻고 50리면 무슨 상관이랴.
덕분에 서당에 당도한 것은 밤이 이슥해서였다. 서당의 구조를 보니 부엌을 가
운데 두고 공부방과 살림방이 갈라져 있었다. 살림방에는 아직까지 불이 켜져
있었다. 훈장을 찾으니 과년한 처녀가 나왔다. 허리까지 치렁치렁한 댕기머리
가 탐스러웠다.
  “지나가는 과객인데 날이 저물어 하룻밤 묵어갔으면 합니다만, 훈장님은 안
계신지요?”
  “예. 부모님께서는 일갓집 대사에 가셔서 집에는 저 혼자뿐입니다.”
  “처녀 혼자 있는데 염치없는 부탁이오만, 서당에서 하룻밤 자고 가도 될는
지요?”
  “예. 그리하시지요. 밤이 늦어 시장하실텐데 곧 진지를 지어 올리겠습니다.”
  처녀의 선선한 응대가 고맙기 그지없었다. 처녀는 황의홍상(黃衣紅裳) 차림
인 매무새도 단정했고 얼굴도 제법 미색이었다. 김삿갓은 서당으로 들어가 바
랑을 벗고 길게 누웠다. 여독으로 전신이 나른하여 깜빡 잠이 들었던 김삿갓은
처녀의 인기척에 놀라 몸을 일으켰다. 저녁상에는 구수한 청국장찌개가 올라
있어 오랜만에 맛있게 밥그릇을 비웠다.
  저녁상을 물리고 자리에 누웠으나 몸은 피곤한데 정신은 말똥말똥했다. 집을
떠난 뒤 한 번도 떠오른 적이 없던 음심(淫心)이 동한 것이다. 외진 산골에서
부엌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저쪽 살림방에서 어여쁜 처녀가 홀로 잠자는 장면을
떠올리면, 황진이의 온갖 유혹에도 끄떡하지 않았던 서화담 선생도 일단은 춘
정(春情)이 동했으리라. 그렇다고 무턱대고 문지방을 넘을 수도 없는 일, 김삿
갓은 전전반측하다 못해 밖으로 나왔다. 때마침 두둥실 보름달이 중천에 걸려
있었다. 김삿갓은 달빛을 등에 업고 오솔길을 따라 뒷산으로 올라갔다. 저만치
자그마한 정자가 나타났다. 가까이 다가가니 누각에는 어인 여인이 서성이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서당처녀였다. 김삿갓의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
했다. 그는 떨리는 걸음으로 정자로 올라섰다.
  “낭자도 잠이 안 오는 모양이구려.”
  그러나 처녀는 수줍어하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는 금강산을 찾아가는 김삿갓이라 하오. 실례지만 낭자의 이름이 무엇인
지요?”
  “소녀 홍련이라고 하옵니다.”
  “이름도 외모처럼 매우 예쁘구려. 나이는 몇 살이나 되었소?”
  그러나 나이는 밝히지 않았다. 사람 그림자도 없는 산골의 한밤중. 교교한
달빛 아래 정자에 마주 서 있는 청춘남녀. 김삿갓은 와락 껴안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칠언절구를 한 수 읊었다.
 
  樓上相逢視目明     정자 위에서 만나보니 눈이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데
  有情無語似無情     정은 있어도 말이 없으니 정이 없는 듯하구나.

  김삿갓은 홍련이 한시(漢詩)까지 알아들을 줄은 모르고 자신의 간절한 마음
을 표현했던 것이다. 그러나 홍련은 사뿐사뿐 난간으로 나가더니 달을 바라보
며 대구를 지어 불렀다.

  花無一語多情密     꽃은 말이 없어도 꿀을 많이 간직하고 있으며
  月不踰墻問深房     달은 담장을 넘지 않고도 깊은 방에 찾아들 수 있다오.

  화답을 마친 홍련은 부끄러운 듯 집을 향해 내달았다. 김삿갓은 심장이 터질
듯했다. 산골처녀 홍련이 완벽한 운율로 대구를 지어 부른 것도 놀라운 일이었
지만, 꿀이 많으니 문지방을 넘어와 따먹으라는 노골적인 유혹 아닌가. 김삿갓
은 참을 수 없는 욕정의 노예가 되어 홍련을 따라 내려가 살림방 댓돌 위에 올
라섰다. 하지만 차마 그대로 방문을 열어젖히기에는 무언가 미진했다. 한동안
가쁜 숨을 가라앉힌 김삿갓은 마지막 유혹의 시를 한 수 읊조렸다.
 
  探花狂蝶半夜行    꽃을 탐내는 미친 나비가 밤중을 헤매는데
  百花深處摠無情    백화는 깊이 무르익었으나 내게는 무정하도다.
  欲接紅蓮南浦去    홍련을 따먹을 수 있을까 하여 멀리까지 왔으니
  洞庭秋波驚小舟    가을 물결이 크게 일더라도 조각배여 놀라지 마소.

  ‘조각배[小舟]’, 정선 광탄나루에서 ‘내가 당신 배[腹]를 탔으니 내 마누
라 아니고 무엇이겠소’ 하며 사공에게 농을 던지던 장면이 생각나는 구절이다.
눈[雪. 眼], 밤[夜. 栗]처럼 같은 말이로되 뜻이 다른 우리말의 특성을 이용한
김삿갓 특유의 고농도 언어유희다. 안에서 또 다시 생각지도 않던 대구가 이어
졌다.

今宵狂蝶花裡宿     오늘밤 미친 나비가 꽃 속에서 자고
明日忽飛向誰怨     내일 홀연히 날아간들 누구에게 원망하리.

비록 오늘 보고 나면 끝인 줄은 알지만 그래도 원망하지 않고 한번 주겠다는
화답이었다. 김삿갓은 더 지체하지 않고 문을 열고 방안으로 뛰어들었다.
  ‘흑!’
  반대편 벽에 기대 서 있던 홍련도 극도의 흥분을 가누지 못해 콧바람을 내뱉
었다. 그 소리가 결정적으로 정염(情炎)의 뇌관을 터뜨렸다. 김삿갓은 와락 달
려들어 홍련을 안고 입술을 붙였다. 홍련도 김삿갓을 마주 안으며 불같이 뜨거
운 입술을 열어 김삿갓의 불덩이를 받아들였다. 홍련의 전신은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서는 남정네의 정념을 부추기는 진한 신
음소리가 끊임없이 울려나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내 하나가 되어 켜켜이 쌓
여 있던 정염의 봇물을 터뜨렸다. 이윽고 불길이 잦아든 뒤 알몸을 껴안고 마
주보고 누워 있던 홍련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한번 교접에 말투가 극존칭에서
하오체로 바뀌어 있었다.
  “자기 김병연 선생님 맞지요?”
  “예?”
  김삿갓은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걸 어떻게 아셨소?”
  “자기 소문은 이미 여러 곳에 퍼져 있어요. 첫눈에 알아봤어요. 아버님을
통해 자기가 영월백일장에서 장원 먹었던 시도 읽어보았어요. 아버님께서는 시
문을 좋아하시는데, 자기 시를 건네주시며 ‘이제야 조선에도 시선이 한 분 태
어났구나’ 하시며 기뻐하셨어요.”
  정자에서 자신의 시에 즉각 화답하던 시작(詩作) 솜씨가 비로소 이해가 되었
다. 산골 처녀로서 그만한 시재(詩才)를 가진 인물이 흔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시를 읽은 뒤부터 자기를 흠모해왔는데, 이렇게 직접 안기게 되다니 꿈
만 같아요. 전생에 특별한 인연이라도 있었나봐.”
  홍련은 수줍은 듯 김삿갓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김삿갓도 즉시 Call, 정성
을 다해 홍련을 보듬어 안았다. 이 밤이 지나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기
약도 할 수 없는 처지, 자신에게 몸을 허락한 그녀를 하룻밤이라도 마음껏 품
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도 온 힘을 다해 흠모해 마지않던 정인(情人)을 받
아들였다.

  두 번이나 폭풍우 같은 격정을 치르고 나니 온 몸이 혼곤해졌다. 마주 껴안
고 홍련의 청포묵같이 말캉말캉한 히프를 쪼물거리던 김삿갓은 장난기가 동해
시를 한 수 읊조렸다. 

  毛深內闊     털이 무성하고 속이 넓은 걸 보니
  必過他人     틀림없이 누군가 먼저 따먹은 모양이오.

  홍련이 즉각 항변했다.

  溪邊楊柳不雨長  시냇가 버들은 비가 오지 않아도 절로 자라고
  後園黃栗不蜂坼  뒷동산 밤송이는 벌이 쏘지 않아도 절로 벌어지잖아욧!

  홍련의 재치 있는 화답에 취해 김삿갓은 ‘절로 벌어진’ 밤송이에 다시 한
번 정염의 불꽃을 토해냈다. 한창 왕성한 청춘남녀는 동창이 훤해질 때까지 마
지막 한 방울의 정염도 남기지 않고 모두 불태웠다.

  “자기야, 속히 일어나야 해요.”
  날이 샌 뒤에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아이들이 서당에 올 시간이 다 돼가요. 귀한 손님을 맞아 아침진지도 못
해올려 대단히 송구스럽지만, 제 처지를 좀 헤아려줘요, 응?”
  홍련은 보자기에 싼 물건을 내밀었다.
  “시원찮은 솜씨지만 노찬(路饌. =도시락)을 쌌어요. 조반 대신 가시다가 드
세요. 다시 뵙지 못하더라도 평생 잊지 않고 자기를 소중하게 기억할거예요.”
  김삿갓은 그녀의 자상한 배려에 목이 메었다.
  “나도 평생 홍련낭자를 가슴속에 고이 간직하겠소. 참으로 고맙소.”
  그 말에 가슴이 메어 홍련은 입술을 가리고 휑하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김
삿갓은 행장을 챙겨 아쉬운 걸음걸이로 서당을 나섰다.

'김 삿갓'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삿갓(2)  (0) 2010.08.10
중매에 나선 김삿갓  (0) 2010.08.10
백락촌에도 세월은 가고(1)  (0) 2010.08.10
백락촌에도 세월은 가고(2)  (0) 2010.08.10
명판관 김삿갓  (0) 2010.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