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삿갓

중매에 나선 김삿갓

깊은산속 2010. 8. 10. 11:05

   중매에 나선 김삿갓

  다음날 아침이었다. 여전히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진수성찬을 차린 위에, 어
제 마시던 미주(美酒)가 반주로 곁들여 들어왔다.
  “삿갓선생. 어떻게 청혼을 넣어야 현진사께서 받아주실지 방도를 좀 가르쳐
주십시오.”
  이제는 아예 깍듯한 존대였다.
  “현진사 환갑에 송아지를 한마리 보내드리면 어떻겠습니까? 풍헌영감께서
직접 가져가시면 자연스럽게 혼담도 나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어른을 몰라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옛날에 현석규라는 조상이 높은 벼
슬을 지냈다며 우리 같은 평민은 만나주지도 않는답니다.”
  “예? 현진사가 세조 때 우찬성을 지낸 이안공 현석규의 후손이란 말입니까?”
  “아니, 삿갓선생께서는 남의 조상까지도 아신단 말입니까?”
  조풍헌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예, 풍헌영감. 이안공은 세조의 각별한 신임을 받던 어른입니다. 그 정도
집안이라면…”
  김삿갓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반주를 몇 항아리 더 비운 다음에야 김삿갓
은 궁리를 마무리하고 자신있게 말했다.
  “아무 걱정 마시고 송아지를 몰고 현진사댁으로 가시면 나머지는 제가 알아
서 처리하겠습니다. 그 전에, 지금 바로 훈장을 찾아가서 「양반전」이라는 책
을 좀 구해달라고 부탁하십시오. 반드시 그 책이 있어야 합니다.”
  김삿갓을 깊이 믿고 있는 조풍헌은 더 묻지 않고 서당으로 행차했다.

  훈장이 고을 안의 온 서당을 뒤져 「양반전」을 구해온 건 그로부터 닷새 뒤
였다. 김삿갓은 송아지를 몰고 가는 조풍헌의 뒤를 따라 현진사댁으로 향했다.
현진사의 기와집은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송아지를 대문 밖에 매어둔 뒤 두 사
람은 하인을 따라 사랑방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의관을 갖춘 현진사가 큰기침
을 하며 사랑으로 들어섰다. 김삿갓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큰절을 올렸다.
  “저는 한양에 사는 장동김씨 집안의 김삿갓이라 합니다. 진사어른께서는 세
조 때 우찬성을 지내신 이안공의 후손이라 들었습니다. 저희 집안과는 한집안
이나 다름없는 사이여서 금강산 가는 길에 인사차 들렸습니다.”
  양반 집안이라고는 하나 몇 대째 벼슬에 나가지 않아 쇠락할 대로 쇠락한 집
안이었다. 한양의 장동김씨 집안에서 일부러 인사차 들렸다는 말에 현진사는
뻑 가버렸다.
  “이거 반갑소이다. 그런데 우리 집안과는 어떤 관계인지…”
  “진사어른께서는 시골에 사시어서 두 가문의 인척관계를 잘 모르시는 모양
입니다그려.”
  김삿갓은 시골을 강조하여 일단 현진사의 기를 꺾은 뒤 말을 이었다.
  “저의 집안 오대조 고모님께서 현씨 가문으로 출가를 하셨습니다. 아마도
진사어른의 오대조와 친형제간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한양에서는 지금껏 두
가문이 한집안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현진사는 한양에서 명문 중의 명문 장동김씨 집안과 자신의 집안이 한집안처
럼 지낸다는 말에 자신의 신분이 업그레이드되는 듯하여 한껏 들떴다.
  “아이구, 그런가요? 이거 아주 귀한 손님이 오셨습니다그려.”
  현진사의 표정이 반가움으로 가득 찼다. 당장 조촐한 주안상을 대령했다.

  김삿갓은 호기로 생각하고 풍헌을 소개했다.
  “진사어른께 귀한 분을 소개하겠습니다. 이 분은 산 너머 마을에 사시는 조
풍헌영감이신데 제게는 외숙뻘이 되십니다. 진사어른과 아직 교분이 없으시다
기에 오는 길에 모셔왔습니다.”
  현 진사는 조풍헌의 얼굴은 알고 있었으나 지체가 달라 사귀지는 않고 있었
다. 그런 자가 한양에 사는 장동김씨 선비의 외숙이라니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김삿갓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조풍헌영감 댁이 지금은 비록 평민으로 살고 있지만 세조 때 영의정을 지
낸 조영무 대감의 후손입니다. 이후 집안이 몰락하여 조풍헌영감의 4대조께서
쌀 천석에 양반신분을 팔았지 뭡니까.”
  조풍헌은 가슴을 졸이며 김삿갓의 노가리를 듣고 있었다. 김삿갓은 품속에서
「양반전」을 꺼낸 뒤 한 부분을 펼쳐 현진사 앞에 펼쳐놓았다.
  “여기에 풍헌영감 집안의 내력이 적혀 있습니다.”
  김삿갓이 펼쳐놓은 「양반전」의 그 부분에는 ‘정선고을에 어떤 양반이 살
고 있었는데 집안이 빈한하여 쌀 천석에 양반신분을 팔아먹었다’는 내용이 씌
어 있었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양반전」은 연암 박지원의 한문소설로서,
그 부분은 양반신분을 팔아먹는 한심한 세태를 비꼬는 순수한 픽션이었다. 그
러나 「양반전」을 처음 보는 현진사가 그러한 내막을 알 턱이 없었다. 현진사
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조풍헌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선조께서 집안이 빈한하여 양반신분을 팔았다고는 하나 근본이야 어디 가
겠습니까? 내 일찍이 이런 훌륭한 집안의 후손을 알아보지 못해 송구합니다.
앞으로는 양가가 교분을 나누도록 합시다.”
  아직도 얼떨떨하기만 한 조풍헌을 대신하여 김삿갓이 말을 받았다.
  “그렇고말고요. 이제부터라도 두 집안이 교분을 나누셔야지요. 풍헌영감은
신분을 숨기고 살면서도 사재를 털어 서당을 열고 육영사업을 하고 계십니다.”
  “아이구, 육영사업까지 하시는군요.”
  이야기가 현실로 이어지자 조풍헌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예, 제겐 늦둥이 자식이 하나 있사온데, 그 아이도 가르칠 겸 훈장을 두고
성미제라는 작은 서당을 하나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때다 싶어 김삿갓이 한 발짝 본론으로 다가갔다.
  “진사어른. 풍헌영감께서 처음으로 진사어른을 찾아뵙는 자리라 작은 선물
을 하나 준비해왔습니다. 물리지 마시고 받아주시면 양가의 교분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선물이라니요?”
  “곧 진사어른의 환갑이 다가온다는 풍문을 듣고 송아지를 한마리 몰고 왔습
니다.”
  현 진사의 눈이 둥그레졌다.
  “아직 두 가문이 세교(世交)도 없는 터에 어찌 이런 과분한 선물을요?”
  “진사어른. 제가 불민하여 지금껏 인사를 못 올렸습니다. 송구스러울 따름
입니다. 제 성의를 생각해서 거두어주시기 바랍니다.”
  김삿갓이 틈을 주지 않고 끼어들었다.
  “외숙어른, 얼른 송아지를 몰고 와 직접 진사어른께 넘겨드리십시오.”
  받는 사람의 체면을 생각해서 송아지라 했지만 다 큰 황소였다. 환갑을 앞두
고 비용걱정에 잠을 설치던 현 진사는 속으로 부처님이라도 만난 듯 반색을 했
다.

  현진사가 어느 정도 주기가 도는 듯하자 김삿갓은 눈짓을 하여 조풍헌을 밖
으로 내보내고 본론을 꺼냈다.
  “진사어른. 풍헌영감에게 아들이 하나 있는데 참으로 영민합니다. 나이 열
넷에 이미 「사략」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골이라 어울리는 혼처가
없어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돈도 많은 집안인데다 부모가 다 훌륭한 분들이라
어느 집 처자가 시집을 오더라도 시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어디 적
당한 혼처가 있으면 진사어른께서 다리를 좀 놓아주시지요.”
  현진사는 얼핏 딸 보옥이 떠올랐지만 촐싹 말을 꺼낼 수는 없어 딴청을 부렸
다.
  “조풍헌 집안쯤 되면 얼마든지 좋은 혼처가 있을텐데요?”
  “신랑 될 자제가 글도 잘하고 미색도 뛰어난 규수를 찾으니 시골에 어디 그
런 처자가 있어야 말이지요.”
  “물론 사돈댁의 재력도 따지겠지요?”
  “재력은 전혀 문제 삼지 않는다 합디다. 돈이야 풍헌영감 댁에 얼마든지 있
으니까요.”
  현진사는 생각에 잠겼다. 쎄지 않은 주량에 막걸리를 거푸 두잔이나 들이켠
다음에야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내게도 과년한 딸이 하나 있기는 한데…”
  김삿갓은 짐짓 놀라는 체했다.
  “아, 그렇습니까? 그러시다면 제가 나서서 중신을 넣어보면 어떨까요?”
  현진사도 딸의 혼사가 목구멍까지 차올라 있었다. 혼기는 찾지만 아무 집안
에나 줄 수는 없는데다가, 혼례를 치를 비용이 막막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글쎄요, 워낙 중대한 사안이라…”
  “아무렴요, 혼인이야말로 인륜지대사라 하지 않습니까? 저도 풍헌영감의 의
중을 떠볼테니 진사어른께서도 사위 될 총각의 됨됨이나 집안의 내력을 자세히
알아보십시오. 피차간에 마음에 들면 성사가 되는 것이고, 어느 한쪽이라도 만
족하지 못하면 없던 일로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예, 나도 알아보겠지만 삿갓선생도 풍헌영감의 의향을 잘 좀 알아봐주시지
요.”
  현진사는 ‘잘 좀 알아봐달라’고 했다. 마음이 기울고 있는 것이다. 조풍헌
이 들어오면서 그 얘기는 그쯤에서 끝났다. 석양 무렵이 되어서야 술자리가 파
해 김삿갓은 조풍헌과 함께 귀가길에 올랐다.

  “삿갓선생의 수완에 새삼 놀랐습니다. 나 같은 평민이 하루아침에 영의정의
후손이 되었습니다그려.”
  두 사람은 산천이 떠나가도록 한바탕 크게 웃어젖혔다. 까짓 양반이 뭐관데
찌그러진 갓을 쓰고도 그리 행세를 하러드는지…
  “혼사는 계획대로 잘 될 것 같습니까?”
  “일간 현진사댁을 다시 한번 다녀와야 될 것 같습니다.”
  조풍헌의 사랑에서 나흘 동안 주지육림에 빠져 지낸 김삿갓은 닷새째 아침
길을 나섰다. 현진사는 김삿갓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러나 혼사문제는 아직 망
설이고 있는 기미였다. 이에 김삿갓은 현진사의 딸과 조풍헌의 아들이 이미 서
신을 주고받으며 밀회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있는 대로 들려주었다. 현진사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김삿갓은 마지막으로 겁을 주었다.
  “조풍헌영감도 진사어른의 가세(家勢)가 걸려 주저하는 걸 제가 설득하여
겨우 마음을 돌려놓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진사어른께서 결정을 미루다가
두 사람의 밀회 사실이 소문이라도 나 보십시오. 아마도 진사어른 쪽이 훨씬
더 곤경에 처할 것입니다.”
  듣고보니 황망한 일이었다. 현진사는 눈에 띄게 허둥댔다.
  “그렇겠지요. 그럼 삿갓선생께서 속히 혼사를 성사시켜주십시오. 특히 아이
들이 밀회한 얘기가 새나가지 않도록 힘을 좀 써주십시오.”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일간 택일하여 풍헌영감 댁의 가신(家臣)인 훈장
을 시켜 보내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이제 자신은 발을 뺄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고 훈장 얘기를 해둔 것이었다.
김삿갓은 융숭한 술대접까지 받고 조풍헌 댁으로 돌아왔다.

  조풍헌은 골목 어귀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멀리서 김삿갓의 모습이 눈에 띄자
더 기다리지 못하고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가셨던 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허혼을 받고 돌아왔습니다. 일간 훈장을 시켜 사주단자를 보내겠다고 했습
니다.”
  “삿갓선생. 이 은혜는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겠습니다. 우리 가문에 이만한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날따라 저녁상은 더욱 뻑적지근했다.
  “삿갓선생. 부디 아들녀석 혼인하는 날까지 우리 집에 머물러주십시오. 대
사가 끝나기 전에 혹 예기치 못한 일이라도 벌어지면 제가 무슨 수로 감당하겠
습니까? 그러니 제발 끝까지 살펴주십시오. 내 혼례가 끝나면 섭섭하지 않게
후사하리다.”
  “예,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김삿갓은 이미 떠날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사례로 돈뭉치라도 두둑
이 안겨주면 그만한 낭패가 없었다. 다음날 이른 새벽, 김삿갓은 살며시 조풍
헌 댁을 빠져나왔다. 너무 오래 호사한 탓에 뱃살이 올라 고개를 오르는 발걸
음이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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