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삿갓

죽장에 삿갓 쓰고

깊은산속 2010. 8. 10. 11:11

죽장에 삿갓 쓰고

  취옹과 함께 닷새를 꼬박 술과 시담(詩談)으로 보낸 뒤 집에 돌아온 김병연
은 방랑궁리 삼매경에 빠졌다. 평생 자신을 뒷바라지하며 오직 아들 하나만 믿
고 살아온 어머니, 물정도 모르고 시도 때도 없이 바가지만 긁어대는 아내, 아
직 코흘리개인 외아들, 모두가 두고 떠나기 힘겨운 마음의 짐이었다. 농사일은
어머니와 아내의 몫이었고, 그는 조선조 양반습속대로 낮이나 밤이나 책을 읽
으면서 어떻게 집을 빠져나갈까 자나깨나 그 생각에만 몰두해 있었다. 2년을
그렇게 지내고 있을 때였다. 과거시험도 마다하고 죽치고 들어앉아 괴로움을
곱씹고 있는 아들이 차마 애처로워 어머니는 한 방안을 제시했다.
  “기분전환도 할 겸 홍성에 있는 외가에나 한번 다녀오너라.”
  김병연의 외삼촌 이길원은 충청도에서 이름난 학자였다. 어머니는 오라버니
를 통해 아들의 상심을 덜어줄 생각으로 외가행을 권유한 것이다.
  ‘옳거니!’
  최적의 기회였다.
  “곧 외가엘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잘 생각했다. 외삼촌께서는 속이 깊으신 분이니 반드시 길을 열어주실 것
이다.”

  김병연은 즉시 큼직한 삿갓과 튼튼한 지팡이를 구했다. 그리고 며칠 뒤 어머
니에게 작별을 고하고 집을 나섰다. 김병연의 나이 스물두살 때였다. 등에 짊
어진 바랑에는 지필묵만 들어 있었다. 특히 시상(詩想)이 떠오르면 언제나 써
두기 위해 한지를 넉넉하게 챙겼다. 김병연은 잔소리장이 마누라가 빨래터에
간 틈을 타 어머니에게 하직인사를 올렸다. 떠나는 마당에서까지 마누라의 잔
소리를 귀에 담고 가기 싫어서였다. 어머니는 부득부득 우겨서 아들의 바랑에
노자 30냥을 넣어주었다.

  동구를 나서는 김병연의 양 볼을 타고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것으
로 가족과는 평생 마지막일 터였다. 갈림길에서 김병연은 북쪽으로 노정을 잡
았다. 외가에는 애당초 갈 생각이 없었다. 작정을 하고 방랑길에 오른 몸, 이
왕이면 금강산부터 찾는 게 산천에 대한 예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이제부터 지난날은 다 잊고 평생을 김삿갓으로 살아가리라 마음을 다잡았다.
하여 여기서도 지금부터는 그의 이름을 김삿갓이라 쓴다.

  김삿갓은 산천경개를 완상하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볼일이 있는 것도
아니요 오라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니 서두를 것도 없었다. 나절이 가까워오
자 목이 컬컬해졌다. 그러나 주막은커녕 인적도 없는 첩첩산중이었다. 계속 걸
어가자니 저만치서 빈 지게를 진 농사꾼이 하나 마주오고 있었다.
  “실례하오만 이 근처에 객점이 어디 있는지 좀 가르쳐줄 수 없겠소?”
  “저 고개 너머 술집이 있는데 술맛이나 안주 맛이 천하일품입지요.”
  농사꾼은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김삿갓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보아하니 노형도 술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안 바쁘면 내가 한잔 살테니
같이 가시려오?”
  “그럼 나를 따라오시우.”
  농사꾼은 얼씨구나 하고 휘적휘적 앞서 가기 시작했다. 어지간히 술이 땡기
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술집으로 들어서자 오는 도중 자신을 백건달이라고 소개한 농사꾼이
호기롭게 고함을 질렀다.
  “아주머니, 내가 오늘 큰손님을 한 분 모시고 왔소. 술은 넉넉하겠지요?”
  문을 열고 나온 주모는 60 가까이 되어 보였는데, 백건달을 보자 인상부터
썼다. 뒤에 따라오는 김삿갓을 보고도 심드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백
건달이 외상술값 때문에 속께나 썩이는 모양이었다.
  “주모, 오늘은 내가 술값을 낼테니 염려 말고 주안상을 차려 오시오.”
  주모는 김삿갓의 행색을 아래위로 쓰윽 훑어보더니 못미더운 표정으로 한 마
디 툭 던졌다.
  “틀림없이 손님이 내신단 말이지요?”
  김삿갓은 기분이 좀 상했지만 아침에 어머니가 넣어준 엽전 꾸러미를 꺼내
보였다.
  “여기 돈은 넉넉하니 아무 염려 말고 어서 내오시오.”
  주모의 얼굴에 금방 화색이 돌았다.

  오래지 않아 술상이 나왔다. 그런데 안주 맛이 일품이라던 백건달의 장담과
는 달리 달랑 도토리묵 한 가지뿐이었다. 맛도 일품이라기엔 한참 떨어졌다.
  “아니 주모, 건달양반이 안주가 일품이라던데 이게 다요?”
  “예, 우리 주막에는 사시사철 도토리묵밖에 없는데요.”
  마침 시장기가 돌던 참이라 김삿갓은 서운하기 짝이 없었다. 술을 한잔 얻어
걸치기 위해 뻥을 친 백건달은 계면쩍은 표정으로 주모를 다그쳤다.
  “그러지 말고 씨암탉이라도 한마리 잡아 오시우. 삿갓선생이 술값을 내신다
잖소.”
  “술값 아니라 술값 할애빌 준다 해도 씨암탉은 안돼요. 우리 집 살림밑천인
데 어이 잡소?”
  “아, 한마리에 다섯마리 값쯤 쳐주면 되지.”
  백건달의 성화에 김삿갓이 가세했다.
  “아, 잡아만 오면 열마리 값은 못 쳐주겠소?”
  “내가 무슨 도둑이우? 한마리를 잡아오면 한마리 값만 받으면 되지 다섯마
리 값은 뭐고 열마리 값은 또 뭐란 말이요? 삿갓선생이 몹시 시장하신 것 같으
니 내 한마리 잡아 오리다. 천천히들 들고 계시우.”
  “말은 퉁명스러워도 마음은 고운 분인 모양이군요.”
  “예, 입이 걸어서 그렇지 인심도 후하고 잔정도 많답니다.”
  얼마 뒤 주모가 씨암탉 백숙을 솥째 들고 들어왔다. 김삿갓은 국물을 한 숟
갈 떠 마셨다. 간이 입에 딱 맞았다.
  “이거야 말로 천하일품이로구먼.”
  본격적으로 술자리가 어우러졌다. 김삿갓도 술이라면 누구에게 뒤져본 적이
없지만, 백건달은 아예 밑 빠진 독이었다. 백건달이 공술에 눈이 뒤집혀 폭음
을 하자 주모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김삿갓에게 귀엣말을 했다.
  “삿갓선생. 저 사람은 한번 퍼마셨다 하면 사나흘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니 너무 많이 주지 마시우.”
  밀린 외상에 타박은 하면서도 속으로는 은근히 챙겨주는 주모의 마음씨가 살
가웠다.

  김삿갓은 백건달과 주모의 투박한 인심에 반해 사흘 동안을 주야장창 술독에
빠져 지냈다. 씨암탉이 씨가 말랐다. 마시다가 취하면 자고 자다가 깨면 또 마
시기를 계속하고 난 나흘째 아침, 아침식사를 끝낸 김삿갓은 행장을 챙겨 일어
났다.
  “주모, 사흘 동안 융숭한 대접 정말 고마웠소. 이제 떠나야 할 때가 되었구
료. 술값은 얼마나 쳐드리면 되겠소?”
  “그냥 보내드렸으면 좋겠지만 살림살이가 워낙 궁하니 열냥만 주시우.”
  “예? 열냥이라니요? 씨암탉 세마리에 두 장정이 사흘 낮밤을 먹고 마셨는데
열냥으로 어찌 술값이 된단 말이우?”
  “삿갓선생, 그만하면 본전은 될테니 열냥만 내고 어서 떠나시우. 우리 같은
무지랭이가 언제 또 삿갓선생 같은 훌륭한 분을 만나 좋은 말씀 듣겠수. 아주
머니도 다 생각이 있어 부른 금이니 그것만 내시구려.”
  닭 한마리에 다섯마리 값을 내라며 은연중에 주모 편을 들던 백건달이 이제
는 김삿갓의 처지를 두둔하고 나섰다. 김삿갓은 억지로 열다섯냥을 쥐어주고
휘적휘적 길을 나섰다.

  실의에 빠진 아들에게 외가행을 권유하며 어머니가 억지로 넣어준 노자, 그
가운데 딱 절반을 방랑 첫날부터 내리 사흘간 퍼마신 술값으로 탕진한 것이다.
김삿갓은 애시당초 돈에 대한 개념이 이처럼 백지상태였다. 어머니가 몇 년에
걸쳐 먹고싶은 음식 안 먹고 입고싶은 옷 안 해입으면서 아껴 모은 돈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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