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삿갓

김삿갓(1)

깊은산속 2010. 8. 10. 11:13

 - 이순에 접어들면서 김삿갓이 가슴속에 점점 크게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의
학문 풍류 해학 주량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따를 게 없지만, 삼천리강산을 방
랑했던 그의 행적이 무턱대고 부러워서다. 지금이라도 최소한의 호구지책만 해
결되면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단출한 행장으로 길을 나서련만, 내 팔자에 이
승에서 바라기는 너무 과한 욕심인 듯하다. 김삿갓의 가계와 삿갓을 쓰고 전국
을 누비게 된 사연은 갑으네가 우리 사랑방에 올린 17667번 글에서 설명했으므
로 중복을 피해 생략하고, 故 정비석 선생의 「소설 김삿갓」을 바탕으로 김삿
갓을 추적한다. 더러는 건너뛰기도 하고 더러는 재구성하기도 하면서 그의 발
자취와 구수한 인간미, 그리고 촌철살인의 비판과 해학이 담긴 시문을 함께 감
상해보자. 정비석 선생의 혼백도 후배의 가필(加筆)을 크게 나무라시지는 않을
것으로 믿는다. -

1. 취중농담에서 얻은 삿갓 아이디어

  김삿갓의 본명은 김병연, 호는 난고(蘭皐)로 조선조 말 권력을 휘둘렀던 안
동김씨 가문이다. 안동김씨 가운데서도 지금의 서대문로터리 일대인 장동에 집
성촌을 이루고 살민서 대대로 높은 벼슬을 독차지했던 안동김씨 일문을 따로
장동김씨라 불렀는데, 김삿갓은 바로 그 장동김씨 집안이었으니 조부 대까지는
명문 중의 명문이었다.

  김삿갓의 묘를 찾아낸 사람은 영월군농협 조합장과 영월관광협회장을 지낸
박영국 씨다. 문헌을 통해 김삿갓의 묘가 영월에 있다는 기록을 확인한 박영국
씨는 몇 년에 걸쳐 군내 촌로들을 찾아 탐문한 결과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 노
루목마을에서 김삿갓이 묻힌 지 100여 년 만에 무덤을 찾아냈다. 이때 무덤에
서 2km 가량 떨어진 곳에서 그의 생가 터도 함께 찾아냈는데, 김병연이 살 당
시에는 어둔리라는 마을이 있었으나 지금은 영월군청에 의해 생가만 복원되어
있을 뿐 문경새재 동화원처럼 마을은 흔적도 없다. 박영국 씨가 김삿갓의 무덤
을 공표하자 안동김씨 대종회에서는 사초(莎草)를 하고 묘비를 세워 오늘에 이
르고 있다. 묘비에는 「詩仙 蘭皐 金炳淵之墓」라 음각되어 있다. 이후 박영국
씨는 사재를 털어 전국을 돌며 김삿갓의 일화와 함께 39편의 누실(漏失)되었던
시를 찾아내기도 했다. 영월군은 김삿갓 묘역을 조성하면서 입구에 박영국 씨
의 공적비도 함께 세워놨다.

  그 자리에 묘를 쓴 사람은 김삿갓의 둘째아들 익균이었다. 백방으로 아버지
의 행방을 찾아다니던 익균은 아버지가 1863년 3월 25일, 향년 57세를 일기로
전라도 화순군 동북면에서 돌아가신 사실을 확인하고 집에서 가까운 노루목마
을로 이장했던 것이다. 김삿갓이 죽은 지 3년 만이었으니, 소문을 좇아 행적을
뒤쫓다가 아버지의 죽음을 확인한 익균의 심사가 어떠했을까? 김삿갓은 말년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초대를 받기도
했는데, 죽을 때도 어느 만석꾼 집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다가 양반 신분에 어
울리는 임종을 맞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삿갓의 일생에서 시와 술을 빼놓을 수는 없는 일, 우선 술과 관련된 그의
시부터 한 수 감상하고 넘어가자.

  千里行裝付一柯     천리를 지팡이 하나에 의지하여 떠돌다 보니
  餘錢七葉尙云多     남은 돈 일곱 닢이 오히려 많은 편이라
  囊中戒爾深深在     너만은 주머니 속에 깊이 간직해두려 했건만
  野店斜陽見酒何     석양에 술집 앞에 이르니 술이 아른거리는 걸 우짜노?

  김병연의 어머니는 조부 김익순이 역적으로 몰리자 아들 3형제를 데리고 황
해도 곡산으로 숨어들었다. 역적은 3대9족을 멸하던 시절이었으니 아이들 목숨
이라도 살리고자 해서였다. 김익순이 처형되자 옥바라지를 하던 병연의 아버지
안근도 화병으로 죽었는데, 이를 감안하여 당초 멸족형에서 폐문형(閉門刑)으
로 1등급 감형되어 병연 형제는 무사할 수 있었다. 폐문형이란 양반 자격과 함
께 모든 혜택을 폐지하는 형이었으니, 양반사회인 조선조의 규범으로 볼 때 멸
족된 것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할 것이다. 어머니는 어떻게 해서든지 가문을
다시 일으켜야 되겠다는 일념으로 어릴 때부터 병연에게 엄하게 학문을 익히도
록 교육했다. 다행히 병연이 명철하여 10살에 이미 사서삼경에 통달했을 정도
로 학문이 깊어졌다. 병연의 어머니는 소문을 피해 경기도 광주→가평→강원도
평창→경기도 여주로 계속 이사를 다니다가, 마지막에 심심산골인 영월 어둔리
로 이사하여 자리를 잡았다. 그 동안에도 어머니는 병연의 학문 연마를 계속
닦달한 결과 영월군에서 실시하는 백일장에서 장원급제하여 과거를 볼 수 있는
자격을 얻었던 것이다.

  김병연이 방랑길에 오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있다. 병연이 ‘김
익순이 바로 너의 할아버지’라는 얘기를 들은 충격으로 억수로 상심해 있자 어
머니는 어디 가서 술이라도 마시고 오라며 술값을 쥐어주었다. 이에 병연은 예
쁜 주모가 있는 한 주막을 찾아갔는데, 백일장을 치르던 날 찾아갔다가 환대를
받은 적이 있는 술집이었다. 주인은 취옹이라는 별명을 가진 70대 노인으로, 번
번이 낙방하기는 했지만 여러 번 과거에 응시했을 정도로 학문이 상당한 경지
에 이르러 있었다.
 
  김병연이 할아버지 김익순을 탄핵한 시는 구구절절 중국의 예를 들어 잘잘못
을 따지고 있다. 조선조 선비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던 사대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서글픈 풍조는 오늘에까지 이어져 무슨 책이 좀 팔린다 싶으면 ‘장
안의 지가(紙價)를 올려놓았다’ 하는 식으로 아직도 서울을 당나라의 수도 ‘장
안’에 비견하고 있으며, 사람이 죽어도 ‘북망산에 갔다’ 하여 서울로 치면
망우산에 해당하는 중국의 한 산이름을 인용하는 등 사대주의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하여 김병연이 장원급제한 칠언절구 가운데 중국 얘기가 ‘쏙’ 빠진 한
구절만 인용하고자 한다. 할아버지인 줄 모르고 김익순을 지독하게 몰아붙인
구절이다.

  忘君是日又忘親     너는 임금도 배반하고 조상도 배반한 놈
  一死猶輕萬死宜     한 번은 너무 가볍고 만 번은 죽어 마땅하다.
  春秋筆法爾知否     너는 춘추의 필법을 아느냐 모르느냐?
  此事流傳東國史     치욕적인 이 사실은 역사에 남겨 길이 전해야 하리라.

  김병연이 다시 주막을 찾아갔을 때는 취옹이 김병연의 시를 구해 읽은 뒤였
다. 김병연이 장원급제한 시는 워낙 명문장이라 백성들을 진무(賑撫)하는 의미
에서 군수에 의해 일반에게 널리 공개되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인생을 달관한
노인답게 사람의 도리에 대해 설파했다. 취옹은 그때까지 김병연이 신랄하게
질타한 김익순이 바로 그의 할아버지라는 사실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자네 글은 홍경래에게 항복한 선천방어사 김익순을 너무 난도질해놓았데그
려. 죽은 사람을 그처럼 매도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지. 글의 무서움을 모르는
선비는 반드시 글로써 망하는 법이거든. 자네는 김익순에게도 후손이 있으리라
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가? 후손들이 자네 글을 읽는다면 얼마나 큰
상처를 받겠는가? 덕을 쌓지 못한 사람이 재주만 믿고 남을 함부로 매도하는
것은 글로써 사람을 죽이는 일일세.”
  김병연은 부끄럽기 짝이 없었지만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글재주만 있었
지 세상이나 사람에 대한 이해와 포용은 부족했던 것이다. 그때가 막 약관이었
으니 무리도 아닐 터였다. 그는 자신이 바로 김익순의 손자임을 실토하고 눈물
로 하소했다.
  “죄가 너무 중해 하늘을 우러러볼 수가 없으니 어이했으면 좋겠습니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서로 권커니 잣거니 한 탓에 취옹은 어느덧 취기가 도
도했다.
  “으하하하하하. 하늘을 우러러볼 수 없으면 삿갓을 쓰고 다니면 되지 뭐가
걱정인가?”
  삿갓의 아이디어가 번쩍, 김삿갓의 뇌리로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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