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마지막 가는 12월이다.
동지가 가까워 하루해가 매우 짧은 시기 이지만 평일날 시간을 내어 지인 내외와 강원도 영월 김삿갓면에 위치한 난고 김삿갓 묘와 문학관을 관람하였다.
단양에서 고수재를 넘는 고갯길은 2차선이긴 하지만 경사가 급하고 굴곡이 많아 조심운전을 해야 하고 요즘 같이 겨울날엔 빙판이 있으면 더욱 조심하고 안전운전이 요청되는 길이기도 하다,
남한강을 따라 펼쳐지는 풍경은 한폭의 그림과 같아 보였다. 가는길 옆엔 레프팅 업소가 많아 여름 한철 관광객들이 많이 몰려오는 지역임을 한눈에 알수 있다.
- 아래 사진은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것임 -
김삿갓 묘
김삿갓면 와석리 노루목 김삿갓묘역
난고김삿갓문학관
하얀눈을 보며
天皇崩乎人皇崩 萬樹靑山皆被服
明日若使陽來弔 家家簷前淚滴滴
천황붕호인황붕 만수청산개피복
명일약사양내조 가가첨전누적적
- 번역
천황씨가 죽었는가 인황씨가 죽었는가
산과 나무 모두 상복을 입었구나.
햇님이 소식 듣고 내일에 문상 오면
집집마다 처마가 눈물을 흘리리라.
- 해설
하얀 눈을 상복에 견준 것이 얼마나 오묘한 비유인가
거기다가 햇님이 문상을 오면 처마가 눈물을 흘리다니
우리 모두가 느꼈던 것을 이렇게 단순하게 표현 할 수 있는 것도
아마 타고나는가 보다.
- 천황씨와 인황씨는 고대 중국 전설에 나오는 임금이다
난고 (蘭皐) 김병연 (金炳淵) 은 안동김씨 시조인 고려 개국공신 김선평 (金宣平)의 후예로 휴암공파 (休庵公派)의 24세 손이다.
1807년 (순조7년) 3월 3일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회암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병연 (炳淵), 자는 성심 (性深), 호는 난고 (蘭皐)
별호는 김삿갓이다. 다섯 살때인 1811년 민란의 선구 역활을 한 홍경래난이 일어 났을당시 선천 부사였든 그의 조부 김익순은 홍경래에게 투항한 죄로 처형당하고 부친은 남해로 귀양을 갔다.
김병연은 멸족의 화를 피해 노복 김성수와 황해도 곡산에서 숨어 살았다.
훗날 당대의 권문세가인 그의 집안은 멸족에서 폐족으로 감형되었으나 세상 사람들의 괄시와 천대가 심하여 가족들은 십승지 (十勝地)로
알려진 영월군 김삿갓면 어둔에 정착하였다.
김병연은 영월 동헌에서 실시한 백일장에 참가하여 "논정가산충절사, 탄김익순죄통우천 (論鄭嘉山忠節死, 嘆金益淳罪通于天) 이라는 시재로
글을 지어 장원을 하였다. 이는 가산군수 정시(鄭蓍)를 예찬하고 선천방어사인 조부 김익순을 호되게 비판하는 내용이였다.
그후 어머니로 부터 자신의 집안에 대한 내력을 듣게된 김병연은 조상을 욕되게 하였다는 큰 자책감에 빠지게되어 22세때 노모와 처자식을
영월 어둔 (於屯)에 남겨둔채 방랑의 길을 나섰다.
이때부터 김병연은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 하여 삿갓을 쓰고 전국 곳곳을 떠돌아 다녔다.
그는 방랑시인으로 민중의 한과 서러움을 해학적으로 읊으며 일세를 풍미하였다.
또한 정형화된 한시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식의 시 세계를 추구하였고 ,파격적인 시작(詩作) 활동으로 세계문학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1940년대 "김립시집" 을 편찬한 이응수는 김삿갓을 미국의 시인 휘트먼과 일본의 시인 이사키와 다쿠보쿠와 함께 19세기 "세계 시단의 3대 혁
명가" 로 높이 평가 하였다.
김삿갓은 1863년 (철종14년) 3월 29일 전라도 화순에서 57세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고 3년 후 아들 익균이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 노루목으로
묘를 이장하였다.
이곳에 있는 난고 감삿갓문학관은 2003년 "강원의 얼 선양사업" 에 의해 개관하였으며 김삿갓 선생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매년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 그의 문학정신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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