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사(野史)

조선을 발칵 뒤집어놓은 스캔들 - 6

깊은산속 2010. 8. 10. 13:42

6. 희대의 요부 유감동

  쓰개치마를 둘러쓴 부인이 나귀에 올라앉아 한양을 향하고 있었다. 여종이
고삐를 잡고 상전을 수행했다. 나귀가 말죽거리 못 미처 과천고개에 이르렀을
때였다.
  “우리는 좌포청에서 나온 포졸들이요. 사대부를 살인한 범인이 여자라 하여
기찰하겠으니 부인은 나귀에서 내려 잠시 따라오시오.”
  키가 훤칠한 사내가 고삐를 낚아채며 채근했다. 뒤에 어슬렁거리던 두 남정
네는 여종의 몸을 붙잡았다. 영문을 모르는 부인은 사내를 따라 숲속으로 들어
갔다. 곧 작은 움막이 나타나자 사내는 부인의 등을 떠밀었다. 움막 안은 캄캄
했다. 뒤따라 들어온 사내는 다짜고짜 부인을 바닥에 쓰러뜨리고는 한쪽 팔로
부인의 상체를 누른 채 다른 손으로 치마를 걷어 올리고 고쟁이 춤을 벌렸다.
옴짝달싹 할 수 없이 부인의 비기(秘器)가 외간남자의 손에 농락당했다. 사내
는 능숙하게 비경을 자극했다. 사대부의 부인으로서 황망한 일을 당하면서도
분노나 수치심에 앞서 몸이 먼저 달아올랐다. 참으로 오랜만에 경험해보는 사
내의 손길에 잊고 지내던 음심(淫心)이 단번에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사내는
바지를 내리더니 다짜고짜 몸가락을 부인의 비기 깊숙이 찔러 넣었다.
  “학!”
  처음 경험해보는 대물이었다. 사내의 방중술은 금새 부인의 숨결을 뜨겁게
달구었다. 부인은 그때까지 상체를 누르고 있는 사내의 팔을 젖히고 등을 그러
안았다. 육중한 몸집이었다. 부인은 생전 처음 아랫도리에 포만감을 느끼며 사
내의 움직임에 호응하여 현란하게 요분질을 해댔다.
  “아악!”
  고통인지 황홀경인지 부인은 자신의 내부에서 폭발하는 엄청난 에너지에 아
득하니 정신을 잃었다.

  부인은 새벽에 잠이 깨듯 홀연히 정신이 들었다. 여종이 걱정스런 얼굴로 자
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부인은 놀라 아래쪽을 내려다봤으나 치마는 얌전하게
수습되어 있었다. 그제야 부인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사내들은 다 갔습니다. 마님께 혐의가 없으니 모시고 가도 좋다면서 사내
가 저를 데리고 왔는데, 마님께서 잠이 드셨기에…”
  여종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물어볼 생각도 없었다. 아랫도리에
황홀한 쾌감이 오롯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자신이 당했으니 여종도 무사하지는
못했을 터, 저도 당했다면 내가 겪은 일을 미루어 짐작하겠지만 대수롭지 않았
다. 평생 처음 겪어본 엄청난 트리가즘이 경이로울 뿐이었다. 다시 태어난 느
낌이었다. 도적은 아닌지 나귀와 노자는 그대로 있었다. 부인은 쓰개치마를 둘
러쓰고 나귀에 올라 가던 길을 재촉했다. 나귀가 움직일 때마다 아랫도리가 쓸
리면서 잠시 전의 포만감이 되살아났다.
  ‘아, 어찌 그리도 힘이 좋을까?’
  때는 세조 연간, 당시 법도에 따르자면 자결해야 마땅한 봉변이었지만, 부인
은 아랫도리를 가득 채우던 육중한 사내의 몸가락이 그리울 뿐이었다. 부인은
명문 사대부 출신 규수로 무안현감 최중기의 처 유감동이었다. 친정에 급한 볼
일이 있어 잠시 말미를 내어 상경하던 길이었다. 포졸을 사칭하여 부인을 겁간
한 사내는 한양의 유명한 건달 김여달이었다. 유감동은 어려서 부모들 간의 합
의에 따라 최중기와 결혼했는데, 사랑의 감정은커녕 30이 넘고부터는 부부관계
도 없이 지내던 중이었다.

  친정을 다녀온 뒤 유감동은 얼핏얼핏 사내의 육중한 몸가락을 생각하면서 진
저리를 치곤 했다. 남편과 관계를 끊은 뒤 완전히 잊은 줄 알았던 음심이 시도
때도 없이 부인을 자극했다. 김여달도 부인을 잊을 수 없었다. 명색은 양반이
었으나 몇 대에 걸쳐 벼슬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에 평민이나 다름없는 김여달
로서는 사대부의 부인을 품은 일은 평생 잊을 수 없는 행운이었다. 더구나 똘
마니들의 보고에 의하면 부인의 무안현감의 정실이라지 않는가. 똘마니들은 여
종을 윤간한 뒤 후환을 닥달하기 위해 부인의 신분을 확인해두었던 것이다. 특
히 겁간을 당하는 마당에도 처음부터 저항은커녕 금새 달아오르던 부인의 농염
한 육체를 생각하면 잠이 오질 않았다. 김여달은 소문 없이 무안으로 내려갔다.
잡히면 처형을 당할 처지지만 개의치 않았다.

  무안 비룡산 자락에 있는 허름한 한 초가로 유감동과 여종이 들어섰다. 칠순
노파 혼자 사는 외딴집이었다. 마당에는 여종에게 연통했던 주인 노파가 서 있
다가 유감동을 맞았다. 댓돌에는 큼지막한 짚신이 한 켤레 놓여 있었다. 노파
와 여종은 사립문 밖으로 나가 망을 보기 시작했다. 유감동은 방안으로 들어섰
다. 김여달이 몸을 일으켜 들어서는 유감동을 힘차게 끌어안았다.
  “어쩌자고 이리 무모한 짓을 하시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도저히 견딜 수 없었습니다. 한시도 부인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말은 거기서 멎었다. 둘은 이내 알몸이 되어 노파가 깔아놓은 요 위에 나뒹
굴었다. 유감동의 감창소리가 사립문 밖에까지 낭자했다. 감창소리는 끊어졌다
가는 한참 뒤 다시 터져 나오기를 여러 번 거듭했다. 이윽고 매무새를 고치고
밖으로 나온 유감동은 여종에게 눈짓을 했다. 여종이 동전 한 꾸러미를 노파에
게 내밀었다. 노파는 황송한 듯 주저주저 동전을 받더니 부엌으로 들어갔다.
김여달은 노파의 집에 보름 동안 머물렀고, 유감동은 매일 찾아와 운우지정을
나눈 뒤 노파에게 동전 한 꾸러미씩을 쥐어주고 돌아가곤 했다.

  김여달이 떠나자 유감동은 인생이 끝난 듯 허전했다. 곁에 누워 잠을 자기는
하지만 남편 최중기는 무용지물이었다. 아랫도리가 엄동설한에 알몸으로 허허
벌판에라도 나선 듯 시려왔다. 유감동은 도저히 끓어오르는 음심을 억제할 길
이 없어 야밤에 집을 뛰쳐나와 한양으로 내달았다. 유감동이 자신의 집으로 들
어서자 배포 두둑하기로 소문난 김여달도 기절초풍을 했다. 여인의 음심이 이
지경인 줄은 짐작도 못하고 있었다. 자연 김여달의 몸가락도 기운을 잃었다.
유감동은 민감했다. 김여달로써 만족할 수 없었다. 그녀는 김여달이 건달질을
하기 위해 집을 비울 때마다 사내를 불러들여 음행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대는 양반집 아녀자 같은데 어찌 이런 행각을 하시오?”
  유감동의 유혹에 이끌려 김여달의 안방으로 따라와 한 차례 환애를 나눈 양
반 장지가 물었다.
  “나는 창기요.”
  유감동은 스스로를 창기(娼妓)라 여겼다. 창기가 아니고서야 밤낮없이 음기
가 발동할 수는 없을 터였다. 음기 앞에서는 양반의 체통도 수어지심(羞於之心)
도 한 낟 티끌이었다.
  “내 친구도 그대에게 음심이 있는데 데려와도 되겠소?”
  “행하(行下. =화대)만 두둑이 준다면 뉘를 마다하겠소.”
  소개가 이어지면서 한양에 거대한 동서 군(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유감동의 방중술이 입소문을 통해 널리 알려지자 영의정을 지낸 정탁은 거금
을 주고 아예 그녀를 첩으로 들어앉혔다. 첫날밤의 쾌감만으로도 회춘한 듯하
여 정탁은 이미 본전을 뽑고도 남은 것으로 계산했다. 그러나 유감동에게는 전
혀 만족스러울 수 없었다. 유감동은 정탁의 조카 정효문을 비롯하여 여러 친척
들을 끌어들여 은밀히 정사를 즐겼다. 그러나 사대부 댁이라 눈과 귀가 많았다.
유감동의 음행은 오래지 않아 정탁의 귀에 들어갔다. 정탁은 소문 없이 유감동
을 쫓아냈다. 유감동은 이후에도 한 번 이승이라는 벼슬아치의 첩실로 들어앉
았으나 역시 한 사내에게 얽매이기 싫어 집을 뛰쳐나왔다.

  유감동은 날개를 단 듯 자유로웠다. 그녀는 한양뿐만 아니라 경기도와 황해
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남자를 유혹하여 음욕을 채웠다. 상호군 이
효량, 해주판관 오안로, 도사 이곡, 황희의 아들 치신 등 유감동의 거미줄에
걸려 농락당한 사대부가 해마다 수십 명에 이르렀다. 그녀의 소문은 온 나라에
자자하게 퍼졌다. 그녀를 품어보지 못한 사대부는 양반 축에 끼지 못한다는 얘
기도 나돌았다. 유감동의 음행은 세종에게까지 보고되었다.
  “풍교가 땅에 떨어졌다. 사헌부는 즉시 그 음란한 여인을 잡아다가 철저하
게 조사하라!”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오래지 않아 유감동은 사헌부에 체포되었다. 소문의
진원지인 김여달도 잡혀왔다. 숱한 전․현직 벼슬아치들이 숨을 죽인 채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속 관리들이 유감동과 교접하지 않은 부처가 없었던 것이
다.

  심문이 시작되었다. 형장에는 유감동과 김여달의 장혈(杖血)이 낭자했다. 장
형(杖刑)이 진행될수록 유감동의 입에서는 교접한 관리들의 이름이 꼬리를 물
었다. 전임 영의정에서부터 천민에 이르기까지 동서들의 행렬은 끝이 없었다.
중간보고를 받은 세종은 더 이상 조사하지 말라 일렀다. 잘못하면 조정이 쑥대
밭이 될 판이었다. 그때까지 유감동의 자백으로 거명된 관리들이 줄줄이 불려
와 죄상에 따라 곤장을 맞거나 벼슬을 내놓고 귀양을 떠났다. 유감동의 아버지
유귀수도 끌려 나와 곤장을 맞았다. 유감동은 곤장을 맞은 뒤 변방에 유배되어
군막에서 평생 노비로 종사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혈기 방장한 군사들 틈에
서 조신하게 노비로만 지냈을 턱이야 절대로 없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기록
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