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사(野史)

조선을 발칵 뒤집어놓은 스캔들 - 5

깊은산속 2010. 8. 10. 13:44

<조선의 기녀들. 머리에 쓰고 있는 가체(加髢) 값이 집 한 채 값을 호가했 다니 예나 지금이나 여자들이 유행에 지불하는 비용은 상상을 초월한다.> 5. 기녀와 사대부의 비련 이광덕은 경종 2년(1722)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들어선 뒤 시강원 설서 에 임명되어 세자를 가르치는 등 학문이 출중했다. 영조 4년(1728)에는 이인좌 의 난이 일어나자 전라도관찰사에 제수되어 난을 진압함으로써 영조로부터 두 터운 신임을 얻었다. 이어 이광덕은 암행어사의 밀지를 받고 관북지방 수령들 의 비리를 조사하러 떠났다. 이광덕은 사령들을 변복시켜 먼저 함흥에 잠입시 킨 뒤 자신도 거지 차림을 한 채 종자 한 명만 데리고 뒤따라갔다. 구석구석을 누비며 관아의 비리를 탐문했지만, 며칠이 지나도 이렇다 할 실적이 없었다. 알 아보니 암행어사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좍 퍼져 관아에서 입단속을 해두었던 것 이다. 하는 수 없어 이광덕은 관복을 갖춘 채 사령들을 데리고 함흥부를 찾아갔다. 군정(軍政) 환정(還政) 형정(刑政) 등을 세밀하게 뒤졌지만 암행어사 출현 소 식을 듣고 깨끗이 정리해둔 뒤라 역시 별무소득이었다. 함흥부를 나온 이광덕 은 함흥부 아전들을 불러다 다그치니 이미 함흥부에 암행어사가 잠입했다는 소 문이 퍼져 있었다고만 할 뿐 정확한 출처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이광덕은 함 흥판관을 불러 진상조사를 명했다. 오래지 않아 판관은 어린 여아를 하나 데리 고 왔다. “이 아이가 소문을 낸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판관은 지금 어사에게 장난을 치고 있는가!”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장난을 치겠소이까. 사실이옵니다.” 판관은 덜덜 떨면서도 표정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이광덕은 아이에게 묻기 시작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가련이라고 하옵니다.” 어사를 똑바로 쳐다보는 소녀는 눈망울이 초롱초롱하고 영민하게 생겼을 뿐 만 아니라, 대답하는 목소리도 또렷했다. “몇 살이나 되었느냐?” “일곱 살이옵니다.” “어디에 사느냐?” “이원(梨園. =기방)에서 심부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장차 기생이 되려느냐?” “그러하옵니다.” “네가 정녕 암행어사가 출현했다는 얘기를 맨 처음 했느냐?” “예, 그러하옵니다.” 자칫 국법으로 처벌될 수도 있는 대답을, 그러나 아이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 고 너무나 쉽게 했다. 이광덕은 뜸을 들이며 마음을 가라앉힌 뒤 신중하게 질 문을 이어갔다. “암행어사가 출현한 것을 어찌 알게 되었느냐?” “소녀의 집은 길가에 있사온데, 어느 날 창밖을 내다보았더니 거지 둘이 처 마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이 든 거지는 손이 너무 깨끗했고, 옆에 있 는 거지는 나이 든 거지를 깎듯이 모셨습니다. 손이 깨끗한 사람이 거지 차림 을 했다면 필시 암행어사라 여겨 사람들에게 말했던 것입니다.” 신분을 알고 발설한 것이 아니니 국법으로 처벌받을 일도 아니었다. “네 총명함이 대단하구나.” 이광덕은 판관과 아전들을 돌려보낸 뒤 가련에게 시를 한 수 지어 건네주었 다. 어린아이의 재주가 총명하니 문사라 부를 만하고 옥용(玉容)이 아리따우니 한 떨기 꽃과 같구나. 아직은 봉오리가 열리지 않았으나 만개하면 관북의 진랑(眞娘. =황진이)이 되리라. “어사또 나으리, 이 시문을 정표로 간직하겠나이다.” 정표의 뜻을 알고 하는 얘긴지 모르고 하는 얘긴지, 그 말을 뒤로 한 채 가 련은 이광덕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는 쪼르르 대문 밖으로 달려 나갔다. 이광덕은 물론이고 둘러서 있던 사령들이 일제히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일 곱 살 소녀가 어사또의 정인(情人)이 된 것이다. 이광덕은 대제학을 비롯하여 여러 고관직을 전전하던 끝에, 영조 17년(1741)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함흥으로 귀양을 갔다. 당파싸움의 희생자였을 뿐 역모란 가당치도 않은 모함이었다. 한 아전의 뒷방에 유배된 이광덕은 위리안치의 중 형을 받았기 때문에 대문 밖에 나갈 수도, 사람을 방으로 들일 수도 없었다. 이 광덕은 개의치 않고 종일 책을 읽으며 세월을 기다렸다. 그런데 유배 온 다음날 밤부터 울타리 밖에서 여인의 고운 노래 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밥을 해주는 아전이나 울 밖에서 감시하는 포졸에게 물어도 웃 기만 할 뿐 여인이 누구인지, 왜 밤마다 나타나서 노래를 부르는지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내게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거든 다시는 찾아와 노래를 부르지 말라 이르라.” 아전에게 엄히 이른 그날 밤, 이광덕이 마당에 나와 달구경을 하고 있자니 한 여인이 사립문 밖에 나타나 인기척을 했다. “나으리, 소인 가련이옵니다. 기억하실는지요?” 열려 있는 사립문 밖에 모습을 드러낸 여인은 20대 초반으로 보였으며 자색 이 빼어났다. “누군지 기억에 없소만.” 여인은 소매 속에서 한지를 한 장 꺼내 이광덕에게 내밀었다. “소인이 일곱 살 때 나으리께서 어사로 오셨다가 써주신 정표이옵니다.” 정표라는 말에 얼핏 희미한 기억이 한 올 떠올랐다. 시문을 다 읽은 이광덕 은 새삼 여인을 바라보았다. 수려한 미모 속에 어린 시절 총명하던 모습이 어 렴풋이 남아 있었다. “이제야 생각이 나는구나. 참으로 곱게 성숙했도다. 그런데 그대가 어인 일 로 이곳에 왔는가?” “소인 이제야 나으리를 모실 수 있게 되어 이렇게 찾아뵌 것입니다.” “뜻은 가상하다만 나라님께 죄를 지은 몸이라 너를 들일 수가 없구나.” “소인 나으리의 죄가 풀릴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이튿날부터 가련의 정성스런 수발이 시작되었다. 온갖 반찬도 만들어 오고 옷도 지어 가져와 아전을 통해 넣어주었다. 가련은 기적(妓籍)에 이름을 올리 고 나서 숱한 남정네들의 유혹과 사대부들의 협박을 뿌리치고 수절을 지켜오 던 참이었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늠름한 어사또의 모습을 잊을 수 없어 성 년이 되도록 가슴속에 품어온 것이다. 어사또로부터 영광스럽게 시문을 내려 받으면서 그녀가 던진 정표라는 말이 최면처럼 그녀의 마음을 옭아매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이가 들면서도 한 번 본 어사또의 모습은 조금도 퇴색하지 않고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그 정인이 함흥으로 귀양을 온다는 소식을 듣고, 가련 은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참담하기도 하여 몇 날 며칠을 뜬눈 으로 지새우며 기다렸다. 드디어 정인이 한 아전의 뒷방에 안치되자 가련은 다 음날부터 밤마다 울 밖에서 노래를 불러 간곡한 사랑을 표하게 되었던 것이다. 가련은 하루도 빠짐없이 아전의 집 밖에 나타나 정인을 기다렸다. 이광덕도 때 맞게 마당으로 나가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가련과 정담을 나누었다. 그러나 국법이 지엄하여 손 한 번 잡을 수 없는 답답한 처지였다. 날이 갈수록 두 사 람의 연정은 깊어만 갔다. 가련은 달 밝은 밤이면 제갈공명의 「출사표」를 읊 고 「적벽가」를 불러 정인을 위로했다. 이광덕은 지니고 온 퉁소를 불며 정인 의 노래에 화답했다. 마을 사람들도 한 사람 두 사람 나와 이 기막힌 사랑의 장면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나중에는 이웃마을 사람들도 소문을 듣고 찾 아와 함께 눈물을 흘렸다. 몇 년이 지나 이광덕의 귀양이 풀렸다. 한양으로 떠나기 전날 밤을 이광덕은 가련의 집에서 머물렀다. 방안에는 황초가 켜져 있었고 은은한 향내가 지친 이 광덕의 심기를 누그러뜨렸다. 가련은 미리 마련해둔 비단이불을 펼쳤다. 가련 은 촛불을 끄고 이광덕의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온갖 유혹과 협박에 도 굴하지 않고 궂게 지켜왔던 정절의 문을 활짝 열었다. 20대 중반의 무르익 은 육체는 밤새 뜨겁게 타올랐다. 두 사람은 그 밤을 꼬박 새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내 이제 상감의 부름을 받고 올라가야 하나, 너를 두고 가자니 발걸음이 떨어지지를 않는구나. 죄를 용서받고 돌아가는 길이라 차마 양계(兩界)의 금 (禁)을 어길 수가 없다. 내 한양에 올라간 뒤 벼슬에서 물러나는 날 반드시 너 를 부를 터이니 너무 탓하지 말거라.” ‘양계의 금’이란 관리들에게 관북과 관서의 기생을 한양으로 데려올 수 없 도록 금한 조선의 법이었다. 남남북녀라, 양계 기녀들의 미색을 시기한 한양 기방의 어느 기녀가 형조판서의 품에 안긴 채 교태를 부려 만들게 된 형률은 아닐는지. “소인은 나으리의 부름이 있을 때까지 참고 기다리겠습니다.” 그러나 가련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광덕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어린 정인 앞에서 차마 눈물을 보일 수는 없었다. 이윽고 이광덕이 나귀에 오 르자 가련은 계속 눈물을 흘리며 삼십 리 밖 함흥부 경계까지 따라와 정인을 배웅했다. 떠나는 이광덕도 보내는 가련도, 그러나 그 이별이 정녕 이승에서 마지막인 줄은 몰랐다. 한양으로 올라와 다시 벼슬에 오른 이광덕은 얼마 뒤 급사했다. 기별을 받은 가련은 며칠을 두고 대성통곡을 했다. 세상만사 일장춘몽이라지만 그렇게 허망할 수가 없었다. 이윽고 정신을 수습한 가련은 목욕재계하고 상복 을 차려입은 뒤 제사상을 차리고 엄숙하게 제를 올렸다. 마지막으로 정인이 좋 아하던 「출사표」를 읊었다. 함흥부 관리들을 호령하던 정인 이광덕의 모습은 백만대군을 호령하던 제갈공명에 못지않았었다. 가련의 양 뺨을 타고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노래를 마치자 가련은 대들보에 목을 매어 정인을 따라갔 다. 함흥 사람들은 그녀의 시신을 길가에 묻어주었다. 죽어서라도 길가에서 이 광덕의 혼령을 기다리도록 한 배려였다. 훗날 함흥을 지나던 암행어사 박문수 는 두 정인의 안타까운 사연을 듣자 사비를 털어 「咸關女俠可憐之墓」라는 묘 비를 세워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