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시대를 거역한 요부 어우동
승문원지사 박윤창의 딸 어우동(於于同)은 혼기가 차자 태강현감 이동과 혼
인했다. 이동은 왕실의 인척으로 무척 고루한 사람이었다. 그는 주로 책을 읽
거나 시회(詩會)에 시간을 할애했을 뿐 아내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어느 해
여름이었다. 이동은 은장공을 집안으로 불러 은그릇을 만들도록 주문했다. 며
칠째 우람한 근육을 드러내고 땀을 뻘뻘 흘리며 일에 몰두하고 있는 은장공은
어우동의 음심에 불을 붙였다. 어우동은 여종 차림으로 은장공에게 다가가 수
작을 걸어 오랜만에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이 일이 이동의 귀에 들어가자
이동은 가차없이 어우동을 소박했다. 친정에서는 동대문 인근 변두리에 아담한
기와집을 한 채 사서 사비(私婢)를 딸려 어우동을 내보냈다. 소박맞은 딸과 한
집에 사는 건 사대부 체통에 위배되는 일이었다.
그날도 슬피 울고 있는 어우동에게 여종이 접근했다.
“버림을 받았으면 새 사람을 찾으면 될 일이지 언제까지 이러고 계실 작정
이십니까?”
맹랑한 여종이었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속에 불덩어리를 간직하고 있는
어우동은 단번에 귀가 번쩍 띄었다.
“네게 방법이 있느냐?”
“태강현감보다 나은 사내들이 널려 있습니다.”
여종은 그날 밤으로 사헌부 도리 오종년을 은밀하게 내당으로 불러들였다.
모처럼 사내를 맞은 어우동의 몸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밤새 몇 번이나 절정에
올랐는지, 사내가 떠나고 날이 밝을 때까지 어우동은 신열에 들떠 희열의 여운
을 즐기고 있었다. 떠나기 전 오종년은 어우동의 청에 따라 그녀의 팔에 자신
의 이름을 새겨주었다. 오종년은 밤마다 어우동을 찾아와 그녀의 잠든 음심에
불을 붙였다.
저 자신 음탕한 계집인 여종은 어우동을 밖으로 인도했다. 때는 성종 11년
(1480) 3월, 두 여인은 동대문 밖 제기현의 들길을 거닐고 있었다. 춘정이 동
해 사내 사냥을 나온 길이었다.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한양으로 향하던 한 사내
가 어우동의 미색에 반해 수작을 걸어왔다. 차림을 보아하니 사대부집 마님 같
았지만, 시절이 춘삼월이라 사내 또한 양기가 솟구치고 있는 터였다.
“어디를 가는 여인네이신지요?”
웬만한 여염집 아낙이라도 외출할 때는 쓰개치마를 두르는 게 법도였건만,
여인은 쓰개치마는커녕 사내의 수작에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돌려 냉큼 대거
리를 했다.
“그건 알아서 무얼 하시려우?”
사내는 어우동의 살인미소에 매혹되어 휘청 무릎이 꺾였다.
“물으면 사실대로 대답할 일이지 아녀자가 어찌 함부로 대거리를 하시오?”
“정 궁금하면 따라와 보시면 될 것 아니오?”
말을 마치자 어우동은 간드러지게 웃어젖혔다. 사내는 애간장이 녹았다.
“길가의 버들이면 꺾어보려 하는데 어떠신지요?”
“노류장화는 본디 임자가 없는 법인데 꼭 물어보고 꺾으려오?”
사내는 완전히 넋이 빠진 채 어우동을 따라갔다. 그러나 그녀가 아담한 기와
집 안으로 들어가자 더는 따르지 못하고 대문 밖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들어오시지 않고 무얼 하십니까?”
한식경이 지나도 사내가 들어오지 않자 여종이 나와 그를 인도했다. 안내를
받아 들어간 안방에는 조촐한 주안상이 차려져 있었다. 그러나 둘은 술을 마시
지 못했다. 맨살이 훤히 비치는 속옷을 입고 일어서는 어우동을 보고 사내가
미친 듯이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대낮부터 시작된 어우동의 감창소리는 다음
날 새벽까지 단속적(斷續的)으로 이어졌다. 사내는 서리 김의향이었다. 어우동
은 등에 그의 이름을 새기게 한 뒤 돌려보냈다.
하루는 어우동이 방산현감 이난의 집 앞을 지나는데, 이난이 첫눈에 반해 어
우동에게 수작을 걸었다. 이난은 마침 본처가 죽고 혼자 사는 처지였다. 어우
동은 이난의 청을 받고 냉큼 그의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뻔한 목적, 두 사람
은 바로 옷을 벗어던지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우동은 이난의 이름도 팔뚝에
새겼다. 이난은 첫 만남에 어우동에게 깊이 빠져 그녀를 재취로 맞아들이고자
했으나 어우동은 듣지 않았다. 한 남자에게 매어 사는 일은 이동 하나로 족했
다.
단오가 되자 어우동은 여종을 데리고 동대문 밖으로 나가 그네를 탔다. 수산
현감 이기가 그 모습에 반해 여종에게 수작을 걸었다.
“저 여인이 뉘댁이신고?”
“우리 마님이 마음에 드십니까?”
“이르다 뿐이겠느냐. 네가 다리만 놓아준다면 내 후사하겠다.”
“마님을 어디로 모시고 가면 됩니까?”
“경저(京邸. 지방 관리들이 공무로 한양에 올라와 머무는 공관)로 오너라.”
어우동은 그날 밤 경저에서 이기와 몸을 섞은 뒤 그의 이름을 팔뚝에 새겼다.
다음날 낮에는 노비를 팔러 온 전의감 생도 박강창을 안방으로 불러들여 교접
했다. 젊은 박강창의 기운에 흠뻑 취한 어우동은 그의 이름을 앞가슴에 새긴
뒤 자주 불러들여 운우지정을 나누었다. 이후에도 어우동은 여종을 시켜 숱한
사내들을 내당으로 불러들였다.
어우동은 직접 헌팅에 나서기도 했다. 어느 해 여름, 어우동이 시내를 거닐
고 있는데 생원 이승언이 그녀의 미색에 혹하여 다가와 수작을 걸었다.
“어느 기방의 기녀이냐?”
그즈음 어우동의 화사한 차림은 누가 봐도 기녀였다.
“따라와 보시면 알 것 아닙니까?”
이승언은 만사 젖혀놓고 어우동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그녀가 당도한 집은
기방이 아니라 호젓한 기와집이었다. 이승언은 그녀를 따라 안방으로 들어갔다.
“춘양군의 사위 이승언이라고 하네.”
어우동은 바로 옷을 훌훌 벗어버리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승언 역시 제 손
으로 어우동의 팔뚝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은 뒤 돌아갔다.
다음날 어우동은 유가(遊街. 과거에 급제한 선비들이 풍악을 울리며 거리를
돌던 풍습)를 지켜보다가 문과 급제자 홍찬의 준수한 용모에 반했다. 몇 달 뒤
어우동은 홍찬이 지나는 길목을 지키고 서 있다가 그를 유혹하여 취했다. 홍찬
을 유혹하는 데는 사향이 묻은 옷자락을 슬쩍 스치는 것으로 족했다.
여종 역시 상당한 미색으로 때로는 젊은 사내 둘을 끌어들여 어우동과 함께
운우지정을 펼친 듯도 하다. 세조 대부터 연산군 대까지 벼슬을 지낸 성현의
「용재총화」에는 어우동과 여종의 엽색행각이 다음과 같이 그려져 있다.
‘어우동의 여종 역시 미색이 출중하여 저녁마다 거리에 나가 미소년을 끌어
들여 주인 침소에 넣어주고, 저도 따로 미소년을 불러들여 음행을 저질렀다.
꽃이 피거나 달이 밝은 밤에는 욕정을 참지 못해 주종이 함께 도성을 돌아다니
다가 수작을 거는 사람이 있으면 아무나 따라가 욕정을 채운 뒤 귀가했다.’
소문이 무성하여 결국 어우동과 여종은 사헌부에 잡혀갔다. 어우동의 몸에
새겨진 이름만도 수십 명에 이르렀으니 심문은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수십 명
의 사대부들이 곤장을 맞거나 파직당한 뒤 귀양을 갔다. 대신들은 세종 연간
유감동의 전례를 들어 어우동을 유배에 처하자고 진언했지만 성종은 굽히지 않
고 사형을 명했다. 다음날로 어우동은 참수된 뒤 저자에 효수되었다. 어우동은
조선의 왜곡된 남존여비제도에 거역하여 자유분방하게 성을 즐겼지만, 끝내 관
습의 벽을 넘지 못했던 것이다.
끝으로 부여를 여행하면서 지은 어우동의 시 한 수를 소개한다.
「부여 회고시」
白馬臺空經幾歲 백마대 텅 빈 지 몇 해나 되었던고
落花巖立過多時 낙화암 서 있은 지 많은 세월 흘렀구나.
靑山若不曾緘黙 청산이 만약에 말을 할 수 있다면
千古興亡問何知 천고의 흥망을 물어 알 수 있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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