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사(野史)

조선을 발칵 뒤집어놓은 스캔들 - 8

깊은산속 2010. 8. 10. 13:35

8. 너무나 매혹적인 선친의 애첩 선조 때 경상도 합천에 문신 문홍도가 살았다. 그는 남명 조식의 문인인 정 인홍의 제자로서 임진왜란 때는 정인홍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역 시 정인홍과 함께 유성룡을 탄핵하는 등 파당에 집착하여 높은 관직에는 오르 지 못했다. 그가 죽자 큰아들 신(藎)이 가문을 이었으나 곧 추문에 휘말렸다. 선친의 애첩인 명개와 통정한 사실이 온 마을에 소문이 난 것이다. 둘째아들 지(贄)는 부인의 조언에 따라 장모와 상의했다. 장모도 이미 소문을 듣고 분개 하고 있던 중이었다. 장모는 ‘형 신이 정인홍의 제자이므로 경상감영에서는 처벌할 수 없으니 사헌부에 고변하라’고 일렀다. 지는 장모의 의견이 옳다 여 겨 사헌부에 정장(呈狀)을 올렸다. 신이 선친의 애첩과 통정한 일이나 동생이 형을 고변한 일은 모두가 강상(綱 常)의 죄에 해당했다. 효와 가족윤리를 가장 중요시한 조선에서는 강상의 죄를 역모 다음으로 무겁게 다루었다. 친척 간에는 윗사람을 고변할 수 없었으며, 노 비는 주인을 고변할 수 없었다. 보고를 받은 광해왕은 문홍도의 업적을 참작하 여 그의 두 아들을 불문에 붙이려 했으나 정장을 받은 사헌부로서는 유야무야 넘길 수가 없다고 진언했다. 광해왕은 합천에 조사관을 파견했다. 조사관은 먼 저 동생 지를 불러 심문했다. 지는 증인까지 동원하여 형 신이 선친의 애첩 명 개와 통정한 일을 낱낱이 고했다. “한 방에서 잔 적은 있으나 술이 취해 잠들었을 뿐 결코 통정한 일은 없습 니다.” 신은 명개와 미리 입을 맞춘 뒤 감쪽같이 오리발을 내밀었다. 심증은 가되 물증이 없었다. 그러나 더 이상 추국할 권한이 없는 조사관은 심문 내용을 정 리하여 사헌부에 올렸다. 사헌부는 논의 끝에 신․지 형제와 서모 명개 및 관련 증인들을 한양으로 압 송하여 의금부로 넘겼다. 심문 결과 의금부는 형 신과 명개가 간음한 사실이 없는데도 동생 지가 무고한 것으로 보고했다. 지는 장형(杖刑)을 받고 함경도 경흥으로 유배되었고, 신은 명개와 함께 방면되었다. 사헌부는 이의를 제기했 다. 서모와 형을 무고한 죄는 강상의 죄이므로 유배형은 너무 가볍다는 것이었 다. 사헌부는 지를 불러다 형틀에 묶어놓고 장형을 가하면서 배후를 밝히라고 고문했다. 지는 장상(杖傷)이 도져 광해왕 2년(1609) 2월 24일 옥사했다. 남편의 옥바라지를 하다가 억울하게 죽은 시신을 안고 돌아온 지의 아내는 실성해버렸다. 지의 처는 머리를 산발한 채 종일 중얼거리며 마을을 돌아다녔 다. 맨발로 들판을 쏘다니는가 하면, 강물에 뛰어들어 마을사람의 구조로 간신 히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그녀를 동정하는 사람도 있었고 형을 고변한 사람의 아내라고 홀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가뜩이나 자신을 고변한 동생 지를 고깝게 보고 있던 신은 제 세상을 만났다. 신은 사노 출신인 선친의 다른 첩 애진과도 통정을 시작했다. 신이 대낮에 애진의 방에서 한창 통정하고 있을 때였다. 지 의 처가 종들을 데리고 들이닥쳐 두 남녀가 벗어놓은 옷과 이부자리를 밖으로 내온 뒤 방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합천현감에게 고발해버렸다. 지의 처는 결 정적인 증거를 잡을 때까지 실신을 가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과 애진이 벌거벗은 채 체포되어 현청으로 끌려왔다. 합천현뿐만 아니라 무고죄로 지를 장살한 의금부와 사헌부도 발칵 뒤집혔다. 삼성추국(三省推鞠. 의정부 사헌부 의금부가 합좌하여 패륜을 저지른 죄인을 국문하던 일)에 가담 한 의정부도 분분했다. 신과 선친의 두 첩은 즉각 한양으로 압송되어 추국 끝 에 처형되었다. 지의 처는 비로소 외관을 바르게 정돈하고 지의 묘에 제를 올 려 억울한 혼백을 위로했다. 신을 옹호하여 동생 지를 죽음으로 내몬 정인홍도 손자를 보내 지의 묘에 참배하도록 하여 사죄했다. 신이 처형되자 지를 무고로 몰아 억울하게 죽게 한 관리들도 광해왕에게 죄를 청했다. 특히 우의정 이항복 은 자신의 잘못을 조목조목 열거하며 석고대죄를 청했다. 그러나 광해왕은 단 순한 실수이니 석고대죄를 허락할 수 없다며 이항복을 돌려보냄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