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소식

뒤집기의 달인들 박두식 조선일보 칼럼

깊은산속 2012. 2. 8. 18:15

 

정치권은 필요에 따라 당 이름도 바꾸고 철석같이 약속했던 공약도
손바닥 뒤집듯 해왔다… 총선용 '무상공약'에 또 모두가 솔깃해하고 있다

박두식 정치부장

정치가 다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총선·대선이라는 결정적 무대가 펼쳐졌기 때문이다. 선거철이 되면 정치권은 낯이 두꺼워진다. 염치도 양식도 배려도 다 사라진다. 살아남겠다는 생존 본능만이 번득인다. 국회의원들은 종종 자신들을 4년 주기의 총선에서 고용과 실직(失職)이 결정되는 '4년짜리 비정규직 종사자'라고 부른다. '의원님'으로 대접받으며 4년을 지내다 '전(前)의원'으로 굴러 떨어지는 순간의 충격은 밖에서 상상하는 것 이상인 모양이다. 4선(選)의 한 중진의원은 10여년 전 재선 도전에 실패한 직후 "몇 달간 집에 틀어박혀 만화책만 읽었다"며 "폐인이나 다를 게 없었다"고 했다. 국회 주변엔 이와 비슷한 이야기들이 많다.

그렇기에 반드시 선거의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할 태세다. 선거 때가 되면 정치권에선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빈발한다. 평소 같았으면 하지 않을 일과 말을 일삼고, 꼭 해야 할 일과 말은 하지 않는다. 총선을 두 달여 앞둔 요즘의 여·야(與野)도 그렇다.

최근 한나라당은 당의 이름을 새누리당으로 바꿨다. 한나라당이란 당명은 14년 3개월 동안 3번의 대선, 3번의 총선을 치렀던 이름이다. 당사(黨舍)도 그대로이고, 국회의원과 당원·지지층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당 이름을 바꿨다. 다른 때 같았으면 인위적인 정치 이벤트 만들기라며 손사래를 쳤을지 모르는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이 직접 이 결정을 했다.

민주당은 새누리당보다 한 달여 먼저 이름을 민주통합당으로 바꿨다. 그리고 약칭은 민주당으로 쓰고 있다. 4년 전 총선 때 이 당의 이름은 통합민주당이었다. 그때도 약칭은 민주당이었다. 한편의 블랙코미디 같은 일이다.

최근 여·야는 작심한 듯 '달콤한 선거공약'들을 내놓고 있다. 대학생 반값 등록금을 약속했으니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같은 연령대의 젊은이들에게 그에 준하는 돈을 나눠줘야 하고, 군대에 사병으로 가면 제대할 때 1000만원 가까운 목돈을 쥐여주자는 식의 공약이 쏟아져 나온다. 올 들어 정치권이 약속한 대로만 된다면 내년부터 우리는 여태 경험해보지 못한 '복지 천국' '무상 왕국'에서 살게 될 것 같다. 이 문제에서 여와 야, 좌(左)와 우(右)의 구분은 무의미해졌다. 상대가 그럴듯한 무상공약을 내놓으면 다른 쪽에선 바로 다음날 그보다 한 발 더 나아간 내용을 내놓는다. 인류 역사에서 국민이 아무 불편 없이, 아무 걱정 없이 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책임져주는 국가는 존재한 적이 없다. 가장 큰 이유는 돈이다. 국가의 재정(財政)엔 한계가 있고, 특히 요즘처럼 글로벌 경쟁이 치열하고 불확실성이 커진 상황에선 재정 운영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여·야 정치인들도 이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그런데도 여·야는 경쟁하듯 총액을 집계하기도 힘들 대규모 선거공약들을 쏟아내고 있다. 일단 선거라는 급한 불을 끄고 보자는 심사다.

현재 각종 여론조사에서 1위로 나선 민주당은 지난번 집권했을 때 한·미 FTA(자유무역협정)를 추진했고,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계획을 세웠고, 외환은행의 론스타 매각을 결정했었다. 그러나 정권을 넘겨주기 무섭게 입장을 정반대로 바꿨다. 그 당시 총리를 지낸 사람이 현재 민주당의 대표를 맡고 있고, 청와대 비서실장과 장관을 지낸 사람들이 민주당의 유력 대권후보로 거론되는데도 마치 자신들은 집권 때 했던 일들과는 무관한 양 행동하고 있다. 집권 시절 정권 차원에서 추진했던 한·미 FTA 폐기를 합창하고, 강정마을 해군기지에 극력 반대하면서, 외환은행 사태를 규명하겠다고 목청을 높인다. 여당 시절과 야당 때의 태도가 이처럼 완전히 뒤집히는 경우는 우리 정치사에서도 드문 일이다. 물론 새누리당이 민주당과 다를 것이란 보장도 없다. 요즘 하는 걸로 봐선 더할지도 모른다. 실제 현 정권은 선거공약이었던 세종시와 동남권신공항을 뒤집으려 했다.

정당의 간판을 필요에 따라 수시로 바꿔달고, 철석같이 약속했던 공약들을 손바닥 뒤집듯 하는 여·야가 총선·대선을 겨냥해 유권자들이 솔깃할 만한 공약들을 다시 들고 나왔다. 여기에 맞춰 지역·계층·단체별로 하나라도 더 챙기겠다며 집단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우리는 1987년 이후 선거 때마다 똑같은 홍역을 앓아왔다. 이쯤 되면 알면서 속이고, 속는 줄 알면서 일단 뭐 하나 챙기고 보는 선거풍토에서 졸업할 때도 됐다. 그러나 요즘 돌아가는 꼴을 보면 올해도 이 악습(惡習)에서 헤어나기는 틀린 것 같다.

 

원문출처 : [박두식 칼럼] 뒤집기의 達人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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