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삿갓

눈 마저 침침하니 발길 더욱 스산하고

깊은산속 2010. 8. 10. 09:46

북으로 갈수록 산은 더욱 험준하고 길은 더욱 고달팠다. 김삿갓은 대동강 변
에서 헤어진 죽향을 마음에서 지우기 위해 걷고 또 걸었다. 산길을 가다보면 인
가를 못 만나 진종일 굶는 날이 더 많았다. 순천을 지나 안주로 접어들었다. 날
이 저물어 개천가에 있는 한 객점을 찾아들었다. 지나온 고을 대부분이 그러했
듯이, 그 객점에도 다른 손님은 없었다. 주모가 반색을 하며 김삿갓을 맞았다.
  “하룻밤 쉬었다 갈까 하네. 저녁상에 술도 한 병 내오게.”
  40 전후로 보이는 주모는 평안도사람 특유의 강인한 인상이었다.
 
  밥상에는 날계란이 두 개 올라 있었다. 더러 서비스로 날계란을 하나 얹어주
는 객점은 본 적이 있었지만 두 개를 올려놓은 집은 처음이었다. 김삿갓이 의
아한 눈길로 바라보자 주모는 강인한 인상과는 달리 배시시 웃는 얼굴로 추파
를 던졌다.
  “뭘 그런 눈으로 보시우? 날계란이 양기에 좋다지 않수.”
  “예끼 이 사람아. 홀로 떠다니는 나그네가 양기가 무슨 소용인가?”
  주모는 김삿갓의 말에 흙이라도 묻을까 하여 땅에 떨어지기 전에 냉큼 되받
았다.
  “댁도 혼자지만 나도 혼자라우. 혹 양기가 소용 있을지 누가 아우?”
  말을 마치자 너무 심했나 싶었던지 주모는 얼굴을 붉히며 밖으로 나갔다.

  저녁상을 물리자 김삿갓은 이내 곯아떨어졌다가 살기척에 잠이 깼다. 어느 새
아랫도리가 허전한 채 누군가 자신의 양물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무슨 짓인가?”
  “서로 좋자고 하는 짓이니 아무 말씀 마세요.”
  말을 마치기 무섭게 주모는 김삿갓을 올라타더니 양물에 요철(凹凸)을 맞추었
다. 말리고 자시고 할 틈도 없었다. 술기운도 가시지 않았지만 평양 임 진사 댁
에서 기생 삼월을 끼고 자본 이후 음심을 달래준 적이 없던 터라 김삿갓도 주모
를 내칠 형편은 못 되었다. 주모는 살추렴에 이골이 난듯 방사가 능란했다. 삼월
을 보듬을 때처럼 영육(靈肉)이 합일되는 듯한 극치는 느낄 수 없었지만 그런 대
로 몸풀이는 충분했다.

  “어때요? 날계란 효험이 쓸 만하지요?”
  교접에 관한 한 주모는 수어지심(羞於之心)이 없는 듯했다. 방사를 입으로 논
하기는 쑥스러워 김삿갓은 말문을 돌렸다.
  “자네는 가족이 없는가?”
  “이 얼굴이면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는데 가족이 왜 없겠수?”
  “그럼 가족은 어디 사는가?”
  “어디 살기는요, 이 형편에 두집살림이 가당키나 하겠수? 서방은 아들을 데리
고 고향에 계시는 시아버님 병문안을 갔답니다. 며칠 지나야 올거구만요.”
  김삿갓은 놀라 벌떡 일어났다.
  “아니 아까는 혼자라 해놓고 이제 와서 서방이 있다니, 서방이 불쑥 나타나
간통죄로 고변이라도 하면 어찌할텐가?”
  “아니 한밤중에 단 둘이 한 일을 고향 간 서방이 어찌 안대요?”
  말을 하면서도 주모는 음탕한 눈길로 김삿갓을 쳐다보며 손으로는 여전히 양
물을 희롱하고 있었다. 서방이 있다는 말에 기겁을 한 건 김삿갓의 머리였을 뿐
머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양물은 주인이야 놀랐건 말았건 양껏 장대해져 그예
열려 있는 주모의 요(凹)를 찾아들었다.
  김삿갓은 술값을 남겨두고 새벽참에 객점을 나섰다. 팔자에 없는 날계란 두
개에 몸보시까지 받았지만 음란한 주모를 신용할 수 없어서였다. 서방이 돌아
왔을 때 행여 객쩍은 소리라도 한다면 괄괄한 서도기질에 봉변당하기 십상이었
다.

  뒤통수가 간질거려 서두른 덕분에 며칠 지나지 않아 청천강에 이르렀다. 묘향
산에서 발원한 청천강은 이름대로 맑고 깊었다. 이윽고 나룻배가 와 닿았다.
  “어디로 가실겁니까?”
  “나를 백상루까지 태워다줄 수 있겠소?”
  “가까운 곳이니 이내 모셔다 드립지요.”
  백상루(百祥樓)는 안주의 소문난 누각으로 거기서 10리쯤 하류에 있었다. 강
에서 봐도 자태가 웅장하던 백상루는 누각에 올라보니 이름 그대로 상서로운 정
경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다. 누각을 떠받치고 있는 기암절벽 아래로는 청천강
푸른 물결이 넘실대고 있었고, 강 건너 널따란 안주평야 뒤로는 고산준령이 병풍
처럼 겹겹이 둘러서 있었다. 강위에서는 어부들의 그물질이 한창이었고 그 위를
나르는 백로와 왜가리도 새끼에게 먹일 물고기를 잡아 나르느라 날갯짓이 분주
했다. 언제 어디서나 같은 느낌이지만 김삿갓은 지금 서 있는 백상루가 조선 제
일의 명승지라 확신하고 있었다. 시선을 거두어 누각 안을 살피니 삼국시대부터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다녀간 듯 현판시가 무수히 걸려 있었다. 그 가운데 당나라
장수들의 방자(放恣)한 현판시도 여럿 눈에 띄어 심기가 불쾌했다. 김삿갓은 당나
라 장수들의 오만방자한 필치와 함께 지금껏 이를 방치해온 지방 수령들의 사대
주의를 꾸짖는 준열한 현판시를 써서 내걸고 백상루를 내려왔다.
 
  김삿갓은 사흘 동안 칠불사를 비롯하여 안주팔경을 두루 감상한 뒤 선천으로
가기 위해 정주 땅에 들어섰다. 선천은 일찍이 조부 김익순이 방어사로 있다가
홍경래 무리의 야습에 포로로 잡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항복했던 통한의 땅
이었다. 부친 안근도 조부의 옥바라지를 하다가 조부가 참수되자 충격으로 죽었
으니, 김삿갓에게 선천은 악연이 겹친 땅이었다. 김삿갓은 20여 년 전 집을 나
설 때부터 언젠가 그 선천 땅을 반드시 들리리라 마음먹고 있었던 것이다.

  날이 저물었으나 객점이 없어 산골의 외진 민가를 찾아들었다.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에는 오두막보다 먼저 쓰러질 것 같은 팔순 노부부가 살고 있었다. 노파
가 저녁을 지으러 나간 사이 김삿갓은 노인에게 말을 걸었다.
  “노인장은 슬하에 자식을 두지 않으셨소?”
  “에효, 자식이 있긴 있었지요. 건장한 아들을 셋이나 두었으나 그 놈의 홍경랜
가 뭔가 하는 역적 때문에 다 죽었다오.”
  “아니, 역도에 가담했더란 말이오?”
  “예끼 여보시오! 우리도 한때는 뼈대 있는 가문이었는데 설마하니 역적무리들
에게야 가담했겠소. 선천방어사란 작자가 저 한 목숨 살자고 역도들에게 항복했
다는 소문이 나자 이 고을 저 고을에서 백성들이 맨손으로 궐기했는데, 내 자식
놈들도 쇠스랑이나 도끼를 들고 역도들에 맞섰다가 하나는 칼에 맞아 죽고 두
녀석은 조총에 맞아 죽었다오. 그때 선천뿐만 아니라 우리 정주고을 장정들도
거의 씨가 말랐지요.”
  김삿갓은 가슴이 뜨끔하면서 다시 한 번 운명의 질긴 멍에를 실감했다. 이튿
날 조반까지 얻어먹은 김삿갓은 남은 노자를 다 털어 억지로 노인네 손에 쥐어
주고 일찌감치 길을 나섰다. 노인의 말에 의하면 서도 가운데도 선천의 인심이
유독 스산한 것은 홍경래의 난 때 역도와 군관민연합군으로 편이 갈렸기 때문
이라 했다. 수십 년 세월이 흘렀건만 서로를 죽인 원한만은 후손으로서도 결코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노인의 이야기를 들은 이상 차마 선천에 발을 들여놓
을 수 없어 묘향산으로 직행하는 김삿갓의 발길은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김삿갓은 묘향산을 향해 부지런히 길을 줄였다. 그러나 영변에 이르자 약산
을 지나칠 수는 없었다. 조선에서 진달래가 가장 유명한 약산은 관서팔경의 하
나로 약초가 흔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약산동대는 무주고을의 동쪽에 있
다 하여 붙은 별칭이다. 관서팔경은 약산 외에 평양의 연광정, 성천의 강선루,
안주의 백상루, 의주의 통군정, 만포의 세검정, 성천의 동림폭포, 강계의 인풍
루 등이다. 약산을 따라 축조해놓은 약산성은 험준한 멧부리로 둘러싸여 있어
철옹성이라 부르기도 했다. 남문 위에 우뚝 솟아오른 운주루(雲籌樓)에 오르
니 산 밑을 유유히 흘러가는 구룡강과 대령강이 선두를 다투고 있고, 약산의
제일봉과 동대와 학벼루가 절경을 겨루고 있었다. 성 안에는 영변읍이 아늑하
게 엎드려 있고, 밖으로는 저 멀리 박천평야가 드넓게 자리 잡고 있었다. 주변
경관에 사로잡혀 김삿갓은 날이 저문 뒤에야 운주루를 내려왔다.

  묘향산은 백두산 금강산 구월산과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4대 명산으로 영변
에서 130리 떨어져 있는데, 가는 길이 모두 다 첩첩산중이라 행장이 여간 고달
픈 게 아니었다. 산중에서 토굴을 찾아 하룻밤을 자고 아침도 굶은 채 산길을
걷자니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그 힘든 심경을 김삿갓은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平生所願者何求     내 평생소원이 무엇이던가 하면,
  每擬妙香山一遊     묘향산 한번 구경하는 일이었네.
  山疊疊千峰萬仞     산은 첩첩 모든 멧부리가 높고도 높아
  路層層十步九休     길은 층층 열 걸음에 아홉 번은 쉬어야 하네.

  향나무가 많다 하여 이름 붙은 묘향산에는 가장 큰 보현사를 비롯하여 모두
360개의 절이 있었다. 산이 험하다 보니 어느 산보다 절경도 많았다. 김삿갓은
묘향산으로 들어서자 보현사로 직행했다. 웅장한 산봉우리에 둘러싸인 보현사는
대웅전만 해도 600칸이 넘는 조선 제일의 거찰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강토
가 쑥대밭이 되자 보현사에서 수도하고 있던 서산대사는 승병을 일으켜 모란봉
전투에서 왜적을 크게 깨뜨렸다. 낭보가 전해지자 전국의 젊은 승려들이 일제히
승병에 가담하여 그 수가 5천을 넘어섰다. 금강산 유점사에서 수도하던 사명대
사도 이때 승병을 이끌고 유격전에 뛰어들어 곳곳에서 왜군을 무찌름으로써 조
선이 임진 정유 두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김삿갓은 서산대사가
85세에 임종했던 원적암도 둘러보았다. 벽에는 서산대사의 유시(遺詩)가 걸려
있었다.

  山自無心碧     산은 스스로 무심히 푸르고
  雲自無心白     구름은 스스로 무심히 희구나.
  其中一上人     그 가운데 앉아 있는 한 사람
  亦是無心客     그도 또한 무심한 나그네로다.

  그는 이미 무아의 경지에 도달한 듯했다. 그 즈음에는 김삿갓 또한 얼마간 무
심의 경지를 체득하고 있었다.

  서도에 겨울이 왔다. 솜옷을 찾을 형편이 못 되는 김삿갓은 옷에 난 구멍을
기우려고 바늘에 실을 꿰다가 바늘귀가 보이지 않아 장탄식했다. 상투를 고치
려고 거울을 보다가 백발이 된 두발을 보며 속절없는 세월을 한탄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때의 심경을 김삿갓은 「백발한(白髮恨)」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嗟乎天地間男兒     넓고 넓은 천지간에 대장부 사나이여
  知我平生者有誰     내 평생 지낸 일을 뉘라서 알 것인가.
  萍水三千里浪跡     삼천리 방방곡곡 부평초로 떠돌아서
  琴書四十年虛詞     40년 긴긴 세월 글과 노래 마캉 도루묵이었네.

  靑雲難力致非願     청운의 꿈을 이룰 힘은 이미 사라져 버리고    
  白髮惟公道不悲     백발도 으레 오는 것 슬퍼하지 않노라.
  驚罷還鄕神起坐     귀향 꿈을 꾸다가 놀라 일어나니
  三更越鳥聲南枝     깊은 밤 소쩍새도 고향 그려 우는구나.

  강계로 가는 산길 역시 험난했다. 날이 저물어 고개 아래 있는 외진 오두막
에 드니 늙수레한 주인 부부가 반가이 맞아주었다. 감자로 저녁을 때우고 잠자
리에 들었는데, 주인이 인기척을 하며 방안으로 들었다.
  “주무시는데 대단히 죄송하지만, 제 형님의 명이 시방 경각에 달했는데 좀 도
와주실 수 없겠는지요?”
  행색은 초라하지만 저녁상을 물린 후 잠시 책을 읽던 모습에서 주인은 한 가
닥 기대를 걸고 고심 끝에 찾아온 모양이었다. 김삿갓은 방랑 중에도 수단껏 읽
고 싶은 책을 구하여 잠시도 손에서 놓지 않고 있었다. 집으로 찾아온 친구가
형님과 장기를 두다가 말다툼 끝에 심장마비로 죽었는데, 서당 훈장이 소장(訴
狀)을 교묘하게 써주어 꼼짝없이 살인죄를 뒤집어쓰게 생겼다는 것이었다. 장황
한 소장은 다음과 같은 끝구절로 현감의 판단을 결정적으로 돌려놓았다는 것이
었다.

  毒酒在房 不飮不醉     독한 술이 있어도 마시지 않으면 취하지 않을 것이요,
  腐繩繼牛 不引不絶     썩은 끈으로 소를 매도 당기지 않으면 끊기지 않으리.

  김삿갓은 당시의 정황을 들은 대로 자세히 적고 다음과 같은 끝구절로 진정
서를 마무리했다.

  油盡燈盞 無風自滅     등불은 기름이 마르면 바람이 안 불어도 절로 꺼지고
  晩秋黃栗 不霜自圻     늦가을 밤송이는 서리가 내리지 않아도 절로 터지네.

  김삿갓은 주인과 함께 그의 형님인 김득춘 댁으로 가서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결과를 기다렸다. 사흘 뒤, 김득춘은 무죄 방면되어 귀가했다.
  “아이구 삿갓선생. 선생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
니다.”
  온 마을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벌였다. 김삿갓의 진정서에 대한 칭찬으로 잔치
는 흥겨웠다. 다음날 아침, 김삿갓은 겨울을 나고 가라는 김득춘의 만류를 뿌리
치고 그가 내주는 솜옷만 챙겨 입은 채 부득부득 길을 나섰다.
  “생명의 은인을 이리 보낼 수는 없습니다. 얼마 안 되지만 노자에 보태 쓰십
시오.”
  김득춘이 내미는 500냥을 김삿갓은 백배 사례하고 받아두었다. 강계로 가기
위해 고개 아래 오두막 앞에 당도했을 때였다. 오두막 주인은 자신의 형님을 살
려준 김삿갓이 고마워 그때까지 형님 댁에 머물다가 함께 돌아왔다. 김삿갓은
바랑에서 엽전꾸러미를 꺼내 50냥을 빼고는 모두 주인에게 건네주었다.
  “삿갓선생. 어인 까닭으로 이 돈을 내게 주시오?”
  “당연히 받으셔야지요. 주인장이 내게 말하지 않았더라면 어찌 형님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겠소. 그러니 형님이 주신 돈이라 생각하고 요긴하게 쓰시구려.”
  말을 마치자 김삿갓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고개를 향해 휘적휘적 걸어갔다.
원래 사례금을 받지 않는 성격이었으나 저는 부유하게 살면서 동생 집안을 돌보
지 않는 인심이 고까워 두말없이 500냥을 받아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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