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삿갓

이별의 대동강

깊은산속 2010. 8. 10. 09:47

 하루에도 몇 차례씩 치르는 과한 방사(房事) 탓이었을까? 삼월이 몸살이 나서
기방으로 돌아갔다. 김삿갓은 허전한 발길로 연광정에 올랐다. 다른 누각도 마
찬가지지만 이미 여러 번 둘러본 정자였다. 덕암이라는 수백 척 낭떠러지 위에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얹혀 있는 연광정은 올 때마다 다른 숨결, 다른 정취로
김삿갓을 반겼다. 연광정은 성종 때 평안감사로 있던 허광이 지은 정자로 평양
의 여러 누각 가운데 규모도 가장 크고 건축미도 가장 뛰어났다. 연광정은 임
진왜란 때 적진으로 잠입하여 왜장을 죽이고 순국한 평양기생 계월향이 생전에
즐겨 들리던 곳이기도 했다. 절벽 아래로는 넘실대는 대동강을 건너 능라도와
백은탄(白銀灘)이 그림처럼 어우러져 있고, 좌우에서는 대동루와 읍호루가 춘색
(春色)에 겨워 손짓하고 있었다.

  김삿갓이 솟아오르는 시심을 붓으로 담아내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여인네
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는데, 간드러진 목청이 여염의 아낙네들 같지는
않았다. 김삿갓의 발길이 자신도 모르게 가락을 따라갔다. 언덕을 넘어서자 저만
치 너른 풀밭 위에서 한 무리의 여인들이 장구 장단에 맞춰 더러는 노래를 부르
고 더러는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가춘지절(佳春之節), 여인
네들이 화전놀이를 나온 모양이었다. 복색(服色)으로 보아 퇴기들인 듯했다.
  “지나가는 과객인데 파흥(破興)이 안 된다면 술 한 잔 얻어먹을 수 없겠소?”
  당시 기생들은 열 살 전후에 기방에 나가 남정네와 요철(凹凸)을 맞추기 시작
하여 스물이 넘으면 노기요 서른이 넘으면 퇴기라 했으니, 조선의 남정네들은
오늘날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영계를 즐겼던 모양이다. 하긴 남자나 여자나
열 살을 넘기면 이미 혼기에 접어든 것으로 치던 시대 아니던가.
  “그러잖아도 남정네가 없어 흥이 시들하던 참인데 마침 잘 오셨소. 어서 오시
구려.”
  좌장인 듯한 기녀가 반색을 하며 김삿갓을 맞아들였다. 노래와 춤이 이어지는
가운데 기녀들이 돌아가며 술을 권했다.

  주흥이 도도해질 무렵이었다. 한쪽에서 두 기녀가 김삿갓을 흘낏거리며 소곤
대더니 한 기녀가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혹 김삿갓 선생님이 아니신지요?”
  “허허,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대놓고 물으니 아니랄 수도 없구려. 맞소,
내가 바로 김삿갓이요.”
  가락이 멎으며 여기저기서 동시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가무와 시화에 능한
평양기생 치고 김삿갓의 이름을 안 들어본 사람은 없었다. 술잔이 더욱 분주해
졌다. 좌장이 한쪽에 쌓여 있던 종이뭉치를 가져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저희들이 심심파적으로 시를 지었사온데, 선생님께서 한번 보시고 격려의 말
씀을 좀 해주시면 일생의 영광으로 삼겠나이다.”
  언사가 극진했다. 김삿갓은 선지를 한 장씩 넘기며 시를 읽었다. 시문을 배웠
다고는 하되 모두가 운도 잘 안 맞고 맥락도 애매했다. 그 중에 단 한 수가 김
삿갓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제목은 강촌모경(江村暮景)이었다.

  千絲萬縷柳垂門     실버들 수만 가지 문 앞에 휘늘어져
  綠音如雲不見村     구름처럼 눈을 가려 마음을 볼 수 없네.
  忽有牧童吹笛過     목동의 피리소리 그윽하게 들려오고
  一江烟雨白黃昏     보슬비 내리는 강에는 황혼이 찾아오네.

  “여기 강촌모경은 누가 지었소?”
  한참 뜸을 들인 뒤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던 한 기녀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
리로 대답했다.
  “소녀가 지었사옵니다.”
  곁에서 좌장이 거들었다.
  “저 아이는 죽향이라고 하는 기생이온데 시문이 뛰어납니다.”
  “아닌 게 아니라 글이 참 훌륭합니다. 죽향이는 어디서 이런 훌륭한 글재주를
배웠는가?”
  “어릴 때 아버지한테서 글을 깨우친 뒤 교방에 다닐 때 시문을 배웠나이다.”
  죽향은 미모도 뛰어났다.
  “참 훌륭한 솜씨로구나. 앞으로도 계속 갈고닦도록 하게.”
  청에 의해 시도 몇 수 짓고 평양을 거쳐 간 선비들의 일화도 들려주면서 술
을 몇 잔 더 마신 김삿갓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좋은 자리 흥을 깨지나 않았는지, 참으로 미안하게 됐소. 잘 얻어먹고 갑니
다. 참, 여러분 중에 혹 예곤옥이라는 아명을 가진 기녀를 아시는 분 없소? 기
명은 모르겠소만.”
  서로를 쳐다보며 의논이 분분했으나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몸살을 다스리기 위해 기방으로 돌아간 삼월이 며칠째 소식이 없자 걱정과 궁
금증이 얽혀 뒤숭숭했다. 무엇보다 그녀의 체온과 타고난 방중술이 그리워 자주
아랫도리로 손이 갔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물어보거나 병문안을 갈 수도 없는 처
지, 답답하고 그리운 대로 제 쪽에서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도리밖에 없었다. 일
찍 조반을 들고 임진사의 별채를 막 나서려던 참이었다. 여러 번 갔던 곳이지만
평양의 절경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다투어 김삿갓에게 유혹의 손짓을 보내고 있
었다.
  “삿갓어른. 손님이 찾아오셨는데요.”
  쓰개치마를 둘러쓰고 문지기의 뒤를 따라온 손님은 죽향이었다. 며칠 전 연광
정 아래서 화전놀이를 하다가 김삿갓과 처음 만났던 기녀 죽향은 여염집 아낙의
차림을 하고 있었다. 수소문 끝에 찾아온 모양이었다. 김삿갓은 죽향을 반갑게
맞아 안으로 들였다.
  “어인 일로 나를 찾아왔는가?”
  “제가 바로 예곤옥입니다. 제 본명을 어떻게 아셨는지요?”
  김삿갓은 크게 놀랐다. 여럿이 있는 데서는 차마 나서지 못한 모양인데, 생면
부지의 사람 입에서 자신의 본명이 튀어나왔으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여러 달 전에 자네 아버지를 만났는데 아명을 일러주며 평양에 가거든 꼭 좀
찾아서 안부를 전해 달라 부탁하시더구나. 이렇게 만나게 되나니 천운인 모양이
다. 아버지는 고희가 넘었는데도 아직 정정하시더라.”
  “흐흐흑!”
  죽향은 꿈에도 그리던 아버지 소식에 격정을 못 이겨 오열을 터뜨렸다. 김삿
갓도 측은한 눈길로 죽향을 바라보며 침묵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한동안 소리 내어 울던 죽향은 이윽고 울음을 그치고 입을 열었다.
  “선생님께서는 저의 아버지를 어떻게 만나게 되셨는지요?”
  “예서 50리 상거한 중화고을의 어느 산중에서 홀로 객점을 하고 계시더구나.”
  “옛? 평양에서 50리요?”
  놀랄 만도 했다. 지척에 살면서 오매불망 그리기만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죽
향은 다시 한 번 흐느끼기 시작했다. 얼마나 안타깝겠는가. 눈물을 거둔 죽향이
고개를 숙인 채 지나온 얘기를 시작했다.
  “일곱 살 때 한 노기의 양녀로 팔려온 저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아버지를 그리
워했지만 아버지 얘기는 입에도 담을 수 없었습니다. 혹 아버지에게 도망이라도
칠까 싶어 양모가 엄히 닦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와 헤어진 게 너무 어릴
때라 성함도 잊었고 살던 동네도 몰라 혼자 숨어서 수없이 울었답니다.”
  죽향은 말을 하는 도중에도 중간 중간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선생님께 간곡한 청이 하나 있습니다.”
  “말해보게. 무슨 청이든 들어주지.”
  “저는 평양에 끌려온 이후 한 번도 성 밖엘 나가보지 못해 혼자서는 아버지를
찾아갈 수 없습니다. 몇 해 전 양모가 죽어 이제는 맘대로 바깥출입을 할 수 있
으니, 제발 저를 아버지 계시는 곳에 좀 데려가주십시오.”
  “그럼, 데려다주고말고. 20여년 만에 부녀가 상봉하는 일인데 내 무엇을 주저
하겠는가.”
  “고맙습니다.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죽향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정중하게 큰절을 올렸다.

  이튿날 아침 일찍, 죽향은 임 진사 댁으로 왔다. 대문 밖에는 부담마(負擔馬.
사람도 타고 짐도 싣는 말) 두 마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김삿갓은 임 진사에게
백배 사례하고 난생처음 말에 올랐다. 임 진사는 김삿갓의 사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안장에 엽전꾸러미를 두둑이 걸어주었다. 절세미인과 나란히 말을 타고
가자니 신행이라도 가는 듯하여 날아갈 것처럼 상쾌했다.
  두 사람은 한나절 만에 객점에 도달했지만 사립문이 닫힌 채 인기척이 없었다.
김삿갓이 사립문을 열고 주인을 불렀으나 역시 대답이 없었다. 안방 문을 열자
제사상이 차려져 있었고, 벽에는 누가 쓴 것인지 ‘縣辟學生府君神位’라는 지방이
붙어 있었다. ‘辟’이란 후사가 없는 자의 지방에 붙이는 글자다.
  뒤따라 들어온 죽향은 지방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까무러쳤다. 김삿갓은 죽
향을 반듯하게 눕히고 옷고름을 느슨하게 풀어주었다. 얼마 만에 깨어난 죽향
은 까무러쳐 있던 시간보다 더 길게 울었다. 김삿갓도 부녀의 기구한 사별이 애
통하여 눈물을 흘렸다. 밤을 새워 두주를 불사하던 강건한 사람이 몇 달 사이
에 유명을 달리하다니, 노인들의 저녁약속은 믿을 게 못 된다던 옛말이 실감이
났다. 울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려 김삿갓은 죽향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을 꺼냈다.
  “이보게 죽향이. 자네의 슬픔은 가늠하겠네만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마을을
찾아 아버님이 언제 돌아가셨는지, 무덤은 어디에 모셨는지 알아내서 제를 올려
야 할 것 아닌가.”
  “알겠습니다, 삿갓선생님. 나가시지요.”

  두 사람은 풍헌을 찾아갔다.
  “그 어른이 돌아가신 건 열흘 전이었다오. 자녀가 없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장성한 딸이 있었구려.”
  ‘열흘만 일찍 찾아왔더라면 뵐 수 있었는데…’
  죽향은 안타까움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 다시 한 번 통곡했다. 풍헌은
앞장서 무덤으로 향했다. 무덤은 객점 뒤 양지바른 곳에 모셔져 있었다. 예를
올리고 내려온 죽향은 그 길로 김삿갓과 함께 장을 다녀와 음식을 장만하기
시작했다. 이튿날 죽향은 온 마을사람들을 모두 초대하여 무덤 앞에서 성대하
게 제를 올리고는 음식을 골고루 대접했다.
  “어르신들. 제 아버님을 이렇게 거두어주셔서 참으로 고맙습니다. 좀 더 일찍
찾아뵙지 못해 부끄럽고 송구스럽습니다. 속죄하는 뜻에서 지금부터 3년 동안
시묘하며 날 맞추어 제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불쌍한 소녀를 많이
좀 도와주십시오.”
  동네사람들의 칭찬이 끊이지 않았다.

  방에 드니 노인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더욱 스산했다.
  “열흘 뒤 선생님을 평양에 모셔다드리고 몇 가지 준비를 하여 내려와야겠습
니다.”
  “자네의 효성이 참으로 지극하이.”
  “임종도 못한 불효자식인걸요.”
  김삿갓은 죽향을 도와 열흘 동안 아침저녁으로 제를 올린 뒤 나란히 평양으로
향했다.

  평양의 춘색은 여전히 김삿갓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러나 임 진사 댁으로 돌
아갈 수는 없었다. 빌린 말을 내주고 김삿갓은 하직의 말을 꺼냈다.
  “평양은 어지간히 구경했으니 그만 떠날까 하네. 자네를 만나 뜻 깊은 우정을
나누었네.”
  “그 무슨 섭섭한 말씀이십니까? 여기까지 오셨는데 제 집에서 며칠이라도 쉬
시다 가셔야지요. 그리고 제가 중화로 돌아간 뒤에도 계집애가 집을 지키고 있
을테니 계속 머무시면서 평양구경을 더 하다 가세요.”
  김삿갓은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사흘 간 죽향의 집에서 유숙했다. 대동강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죽향의 집은 아담한 기와집이었다.
  사흘 뒤였다. 죽향이 중화로 떠나기 위해 집을 나서려 하자 김삿갓도 따라 나
섰다.
  “더 머물다 가세요.”
  “자네 없는 평양에 무슨 낙으로 남아 있겠는가.”
  죽향은 주르륵 눈물을 흘렀다. 살 한 번 섞은 적은 없지만 그새 정이 흠뻑 든
것이다. 김삿갓도 마찬가지였다. 연광정 아래 화전놀이 자리에서 그녀가 지은 시
에 마음을 뺏긴 이래 지금껏 그녀를 은근히 사모해오고 있었다. 중화고을에서 제
를 올리느라 열흘 동안 한방에서 잘 때도 상중이라 차마 어찌할 수는 없었지만,
곁에서 함께 잤다는 사실만으로도 정을 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김삿갓은 죽향
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동강 나루터까지 나가 그녀를 전송했다. 죽향은 손수건
으로 연신 눈물을 찍어냈다. 김삿갓은 배가 떠난 뒤 북으로 발길을 돌리고 나서
야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