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사(野史)

조선을 발칵 뒤집어놓은 스캔들 - 11

깊은산속 2010. 8. 10. 13:27

11. 일곱 살에 아들을 낳은 음탕한 아이 영조 43년(1767) 7월, 경상감사가 경상도 산음현에서 일곱 살 된 여자애가 사내아이를 낳았다는 장계를 올렸다. 경상감사는 이 일로 민심이 흉흉하니 신 속하게 조치할 수 있도록 영을 내려달라고 덧붙였다. 영조는 경악했다. 나라에 변괴가 일어나면 임금이 부덕해서라 여기던 시절이었다. 입시해 있던 좌의정 한익모와 좌부승지 윤면헌은 요괴이니 당장 처형해야 한다고 주청했다. “산음의 산모 역시 짐의 백성이다. 무슨 죄로 무고한 백성을 죽이는가!” 영조는 장고 끝에 산음현감이 미숙한 탓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아비가 누구 인지도 밝히지 않고 온 고을이 발칵 뒤집히도록 소문만 냈으니 말이다. 소문은 조정과 한양에도 금새 퍼졌다. 삼삼오오 모여 앉아 나라에 큰 변란이 일어날 조짐이라고 수군댔다. “세상에는 간혹 괴이한 일이 일어납니다. 별일 아니오니 너무 심려치 마시 옵소서.” 영의정 김치인만이 평상심을 잃지 않고 영조를 위로했다. 영조는 구상을 산 음어사에 제수하여 진상조사를 명했다. 구상은 경상감영에 들려 관찰사로부터 경과를 브리핑 받은 뒤 단성현감을 차 출하여 함께 산음현으로 갔다. 산음현감은 이미 신뢰를 잃은 터라 옥사(獄事) 를 대리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어사가 여자아이 집에 도착하자 온 동네 사람 들이 모여들었다. 아이를 낳은 여자애의 이름은 종단이었고 언니는 이단이었다. 일곱 살 난 종단은 열 살인 언니 이단보다 체구가 컸다. 특이체질인 듯했다. 그러나 종단이 좀 모자라는 아이라는 게 금방 드러났다. 엄청난 일을 벌여놓고 도 어사에게 눈웃음을 치며 천연덕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구상은 어미와 동 네 사람들에게 종단이 일곱 살이 맞느냐고 물어 확인했다. “종단은 삼칠일 만에 월경이 시작됐고 세 살에 음모가 났으며, 체구는 여섯 살 때까지는 보통아이와 같았으나 아이를 밴 뒤부터 쑥쑥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어미의 진술은 놀랍기만 했다. 그러나 차마 어미에게 물을 수는 없어 구상은 이단을 불렀다. “종단이 아이를 낳게 한 남자가 누군지 아느냐?” “읍내에 살고 있는 소금장수입니다.” “어째서 소금장수라고 생각하느냐?” “지난해 소인이 어미를 따라 밭에 갔다 들어오다가 소금장수와 종단이가 알 몸으로 이상한 짓을 하는 걸 보았습니다.” 구상은 단성현감에게 명하여 소금장수를 잡아들였다. 송지명이라는 소금장수 는 스물세 살의 훤칠한 사내였다. 송지명은 소금을 팔러 산음 일대를 다니던 중, 지각이 모자라 늘 혼자 집안에 틀어박혀 있는 종단을 보고 양기가 동하여 먹을 것을 사다주며 환심을 산 뒤 욕심을 채웠노라고 실토했다. “그러나 강제로 하지는 않았습니다. 저 아이가 먼저 제 바짓가랑이를 잡아 안방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이어 그 어린 애가 아이를 낳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며 울먹였다. “시끄럽다 이놈아!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지켜보고 있는데 그걸 변명이라고 둘러대느냐!” 호통을 치긴 했지만 구상은 종단이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여기고 있었다. 구상은 단성현감에게 종단의 가족과 송지명을 산음현 옥사(獄舍)에 잡아가두도 록 명한 뒤 한양으로 돌아와 영조에게 복명했다. 그리고는 덧붙였다. “일곱 살이라고는 하나 처녀티가 확연하며, 몹시 음탕하여 심문 중인 소관 에게도 연신 추파를 던졌나이다.” 영조는 일단 시름을 덜었다. “사관(史官)은 어사의 복명을 그대로 기록하라. 지아비를 찾았으니 영남의 민심도 가라앉을 것이니라.” 그러나 산음현감의 장계는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생각할수록 분기가 치솟았다. “이 사람들을 처벌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다. 어찌 종단 같은 아이를 ‘일취 월장한다’고 비유할 수 있단 말인가. 무식한 아전이라면 몰라도 사대부로서 어찌 면밀하게 조사도 해보지 않고 허술한 장계부터 올린단 말인가. 산음현감 을 사적에서 삭제하고 그가 올린 장계를 조보(朝報)에 올려라.” 사적에서 삭제하는 징계는 파면 정도가 아니라 아예 벼슬에 오르지 않은 것 으로 하는 최고의 징벌이다. 영조의 진노가 오죽했으면 산음현감이 올린 장계 를 조보에 올려 온 관리들의 웃음거리로 삼았겠는가. 영조는 송지명을 처형하고 종단의 가족들을 섬에 나누어 귀양 보내라 명했다. 세종 14년(1432) 1월 무진사람 조응이 10세 된 여아를 강간했다 처형당했으며, 중종 18년(1523) 윤4월 해주사람 이천산이 9세 된 여아를 강간했다 처형된 전 례가 있었다. 종단이 낳은 아이는 어른이 낳은 아이보다 크고 튼튼했으나, 흑 산도에 딸린 한 섬에 유배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모자가 함께 죽었다고 기록 되어 있다. 아마도 돌연변이로 인해 성장이 너무 빠르게 진행되어 죽음에 이른 게 아닌가 추정된다. 이어 영조는 음양과 풍수에까지 정통한 조선조 최장수 임금답게 영민한 영을 내렸다. “안음과 산음은 경계가 접해 있는데, 전에는 정희량이 태어났고 지금은 요 부가 태어났다. 안음의 지명을 안의로, 산음의 지명을 산청으로 고치라.” 정희량은 영조 4년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에 동조하여 영조를 폐위시키고 밀 풍군 탄을 옹립하려 한 안음 출신의 역도였다. 안의와 산청의 지명은 현재까지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